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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문화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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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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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지방문화원 임원 및 지역사연구위원 워크숍(보도자료)

◈ 경남 지방문화원 임원 및 지역사연구위원 워크숍 ◈ 이날 행사는 코로나 펜디믹으로 인해 4년만에 열려 경남문화원연합회 김길수 회장과 시군문화원장, 향토사연구소장 및 연구위원 등 350여 명이 참석했다. 내빈소개와 국민의례에 이어 지방문화원 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남해문화원 사무국장 김미숙)에 대한 도지사 표창패를 김길수 회장이 수여 했으며, 이어서 김길수 회장의 개회사, 박인주 양산문화원장 환영사, 나동연 양산 시장과 이종희 양산시의회 의장이 축사, 하미자 남해문화원장의 문화비전 선언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개회식 후 특강 시간에는 강신웅 경상대 명예교수의 '영남선비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한국 인문학과 영남선비론을 중심으로 특강을 진행했으며, 이어서 경상대 김영기 명예교수는 '경남의 역사적 이해 - 남명 조식과의 대화'라는 주제로 학자들이 평가한 선비정신의 표방이요 민족의 스승으로 평가받는 남명 조식의 학문, 사상, 실천 등에 대한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 후 점심식사 시간에는 양산문화원 경기민요반(김동연 선생 지도)에서 준비한 태평가와 말양아리랑을 열창해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오후 1시 20분부터 진행 된 연구 발표 시간에는 양산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김성곤 사무국장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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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제3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유의향과 남해문견록남해 문견록은 조선 후기 후송 유의양(1718~?)이 국문으로 지은 필사본 유배기행록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작가는 영조 47년(1771년) 2월 그의 나이 54세 때 남해로 귀양 가서 6개월을 지내고 돌아와 이 글을 지었다고 하는데, 표제는 '남해문견록', 내제는 '남ㅎ ㅓ문견녹'으로 되어 있다. 유의양은 영조 39년(176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언관으로만 여러 벼슬을 지냈고, 남해에서 6개월의 유배 생활을 한 후 영조 51년(1775년)에 재 등용되었다. 남해문견록은 필자가 영조 47년 2월 노량 나루에 도착하면서부터 귀양이 풀렸다는 소식을 들은 7월까지 유배지에서 겪은 사실들을 국문으로 기록해 놓은 풍물기이다. 주요내용은 노량나루와 이순신, 남해읍의 마애비, 친분이 있는 유배객과의 만남, 금산의 아름다운 경지, 남해섬의 물산, 섬사람들의 생활풍속, 효자 이성삼과 열녀 김연대 이야기, 남해지방 토속어, 여거사들의 폐단, 교리 유언호와의 교유, 육지의 남자들이 본처를 버리고 이 섬에 와서 현지 여자들과 새살림을 차리는 나쁜 풍습에 관한 이야기, 하동에 산다는 동성인 유씨들의 선물이야기, 지은이의 벗 사귀는 철학 등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산문 유배 기행록 가운데 국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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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삼벌초의 역할 최우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다. 그러던 중 야별초의 규모가 커지자 좌별초와 우별초 나누었고,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들로 평성된 신의군을 합하여 통친한 것이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당시의 권력구조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전통적인 중앙군이 아니라 역대의 권신들과 파벌적으로 깊이 유착되어 무인정권을 보위, 옹호하는 무력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삼벌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별초·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종 44),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 정권 말엽이었다. 전국의 정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삼별초는 군사 활동에 있어서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편의대 등의 업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고려병제의 근간이 되었던 2군6위가 유명무실하게 되자 삼별초가 국가의 안보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종 6년(1261) 7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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