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사업
[ 2020 ] 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0.11.27
조회수181
◈ 제2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삼벌초의 역할
최우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 밤에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다. 그러던 중 야별초의 규모가 커지자 좌별초와 우별초 나누었고,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들로 평성된 신의군을 합하여 통친한 것이 삼별초였다.
삼별초는 당시의 권력구조 내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전통적인 중앙군이 아니라 역대의 권신들과 파벌적으로 깊이 유착되어 무인정권을 보위, 옹호하는 무력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삼벌초의 정확한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보면, 야별초에 대한 기록은 1232년(고종 19) 처음으로 보이고 신의군 및 좌별초·우별초에 대한 기록은 1257년(고종 44), 1258년에 각각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야별초의 설치는 최우 때라 할 수 있지만, 삼별초로 형성된 것은 최씨 정권 말엽이었다.
전국의 정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삼별초는 군사 활동에 있어서 수도경비대· 친위대· 특공대· 경찰대· 전위대· 편의대 등의 업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고려병제의 근간이 되었던 2군6위가 유명무실하게 되자 삼별초가 국가의 안보와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종 6년(1261) 7월에 "남도 연해주군에 나타난 왜구들을 명장군 안홍민이 삼별초를 인솔하여 방위를 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병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별초는 고종 19년(1232) 철래탑의 제1차 침입에서부터 고종 46년(1259) 차라대의 제6차 침입까지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전투에 있어서 결사적이었다. 야습으로 적을 무찌르기도 하고 복병 또는 협격으로 적을 쳐부수기도 하며, 최선두에 서서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적의 소재를 정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사』병지에는 삼별초가 기동성이 강했기 때문에 권신들이 자기들을 수호하고 보좌하는 부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삼별초는 권신에 의하여 설치되고 권신에 의하여 지휘되었다.
삼별초는 40여 년간(1232년~1273년) 자주정신과 항몽정신으로 장기간의 대몽항쟁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글안(거란), 여진, 몽골 등의 북방 이민이 침입했지만 그때마다 고려는 그들을 슬기롭게 격퇴하였다. 특히 삼별초의 항몽은 일시적 감정이나 사사로운 병란이아니라 국토를 수호하고 몽골에 항복한 국권을 보존하고자 한 투쟁이었다.
삼별초는 사병인가? 공병인가?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그들에게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간혹 사적인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의거 사병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가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