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사업
[ 2004 ] 남해문화저널 제8집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5.03.04
조회수163
◈ 남해문화저널 제8집 ◈
남해는 대륙과 연결된 육지와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고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인간생존에 매우 좋은 조건과 환경, 사면이 바다인 섬으로 해산물이 풍부하고 농경과 어로에 최적지로 채집경제와 생산경제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유목민들의 좋은 보금자리가 되어 한 번 기착하면 영구히 생활터전을 잡고 정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690년(신라 신문왕 10년) 전야산군 757(경덕왕 16년) 남해군으로, 1018년(고려 현종9년) 남해현으로 강등되었고 1358년(공민왕 7년) 진주목의 대야천부곡(지금의 하동군 북천동)에 피난하였으며 1404년(조선태종 4년) 왜구로 말미암아 진주땅으로 피난한지 49년만에 남해현을 복구하여 읍성을 축성하였으며 1413년(태종 13년) 하동현과 합하여 하남현이 되었다가 1415년(태종 15년) 다시 하동현과 분리하면서 진주목의 금양부곡을 편입하여 해양현으로 개칭되었으나 2년 뒤에 다시 남해현으로 환원되어 현령을 두었다.
1419년(세종 1년) 곤명현과 합하여 곤남군이 되었다가 1437년(세종 19년) 다시 남해현으로 복귀하여 1895년(고종 32년) 남해군으로 개칭되었고 1905년(광무 9년) 창선도가 진주목에서 남해군으로 편입하였으며 1973년 이동면 갈도가 통영군에 편입되고 1979년 남해면이 읍으로 승격(1읍, 7면)되었으며 1986년 상주·미조출장소가 면으로 승격(1을 9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이땅에는 선인들의 얼이 담긴 슬기로운 고 유적들이 주옥처럼 산지 사방에 깔려 더욱 자랑스럽게 빛을 뿜고 있다.
수 천년전 선사시대의 유지가 있는가 하면 도요지가 있고 신라 때의 역원이 있는가하면 고려 때 그대로의 봉수가 슬픈 옛날을 회상케 하고 있다.
그 옛날 몽고군과 왜구들을 맞아 싸웠을 성곽들, 온갖 만행을 자행하다가 패주한 왜적의 잔영인 왜성, 유서 깊은 사찰, 석탑, 석불, 추모·기념·사적·유허비·천연기념물 등 다양한 유적들이 신비의 베일을 벗지 못한체 고이 간직되어 오고 있다.
남해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게 금산이다. 소금강산 또는 남해금강이라고 하는 남해제일의 금산은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 대장봉, 사선대, 봉수대, 상사암 등 38경으로 이루어져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개암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금산은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사찰을 짓고 보광산이라고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전국 명산을 찾아 기도를 하여도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이곳 금산을 찾아 100일 기도 후 등극하게 되어 보은의 뜻으로 보광산을 비단으로 두른다는 뜻에서 비단 금을 써 '금산'이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또, 금산에는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장생하기 위해 신하 서불을 보내 불로초를 구하려 보냈으나 구하지 못하고 갔다는 표시로 자연석 위에 상형문자를 남겼다 한다. 그것이 바로 서불과차암으로 남해를 찾는 이들에게 역사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신화적인 전설과 전국의 3대 기도 도량인 보리암이 있다.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 시내 쪽으로 3Km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이충무공전몰유허가 보인다. 일명 이락사로 불리는 이곳은 사적 제 232호로 이곳은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삼도통제사가 순국(1598, 음력11.19)한 곳이다. 이 때 장군은 왜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전방급신물언아사" 즉 '전쟁이 바야흐로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곳에는 그 말을 그대로 새긴 비가 있어 장군의 고매한 뜻을 더욱 기리고 있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증의정부영의정시충무공이공순신유허비와, 이충무공 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사당의 현판 "대성운해"는 '큰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으로 이락사와 일맥상통한다. 이락사의 끝자락에 세워진 첨망대는 관음포만을 내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서있어, 당시 피로 물들었던 노량해전을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서면 노량해전 당일 의연히 죽어 갔던 이충무공의 넋이 다시 살아 숨쉬는 것 같기도 하다.
남해대교 아래에 위치한 남해충렬사는 사적 제233호로 이충무공 위패를 모시고 있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신 이충무공의 시신은 이충무공전물유허(이락사)에서 잠시 초빈된 후 이곳 충렬사로 옮겨와 약 3개월간 현 가묘 자리에 안치 되었다가 유해는 군영지인 고금도를 거쳐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충렬사에서는 지금도 그의 뜻을 기리고자 매년 4월 28일 탄신제를, 순국하신 11월 19일(음력)에는 기향제를 모시고 있으며 충민공비, 충무공비와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증시충무이공묘비 등이 있다. 충렬사의 현판인 "보천욕일"은 '나라를 위해 세운 극히 큰 공적'이란 뜻으로 사당 처마 밑에 게시되어 있다.
서포 김만중 유허로 알려진 노도는 김만중이 3년간의 유배생활 중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 등의 작품을 남기고 운명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동면에 있는 '다정 지석묘'는 남방식으로 논밭사이에 15기가 일렬로 배치. 3~4m 간격으로 주위에 분묘도 함께 있고 묘제중의 하나로 지상에 대석을 올려 봉분을 삼는 형식 인데 일명 고인돌이라고 한다. 다정 지석묘를 비롯 평현, 야촌, 심천, 상가, 죽전, 평산, 당항, 서호, 대곡, 관당, 창선당항, 서대 등 남해 지역 곳곳에 100여기가 분포 되어 있고 이곳에서는 마제석검, 토기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서면 동정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숭배되고 있어, 음력 10월 보름에는 금줄에 새끼줄과 참종이를 붙이고 황토를 뿌린 후 동제를 모시고 있다. 선돌은 길쭉한 네모난 자연석(입석)으로 일부만을 가공한 거석이며 고인돌 열석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하나이다.
문화재 자료 제42호인 정지석탑은 고현면 대사리에 위치하고 있다. 대형 자연괴석 위에 4층으로 만들어진 탑신석은 옥개석과 재질이 다르며 이 탑은 고려말 정지장군의 승첩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관음포대첩기록에 의하면 정지장군은 겨우 전선 47척으로 왜선 120척을 함몰시켜 남해를 구한 훌륭한 장군으로 향토인들이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사찰인 용문사(이동면 용소리 산868)는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현 용문사에는 첨성각을 세웠고 금산에 있는 보광사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또한, 백월당 대사가 남쪽에 있는 용소에 터를 정하여 선당양당을 짓고 6년 뒤 1666년(현종5년) 일향이 대웅전을 창건하였다. 여기에는 대웅전을 비롯 석불, 종각, 천왕각, 봉서루, 명부전 등이 있다.
화방사(고현면 대곡리 산 1448)는 망운산 남쪽에 원효대사가 세운 연죽사가 화방사의 전신이다. 진각국사 혜심이 연죽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영장사라 개칭하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 영철 두 선사가 이건중수하고 연화형국의 뜻을 취해 화방사라 하였다. 그 후 2번에 걸친 화재로 소실 ·복원하는 등 보광전 자리에 신축복원 대웅전이라 현액하였다.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종각, 채진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