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문화원 사업
[ 2023 ] 제5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작성자남해문화원
등록일23.11.24
조회수123
◈ 제5회 남해문화원 향토사연구소 학술포럼 ◈
수운의 일생과 동학의 창도
수운은 1824년 10월 28일 오늘의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근암 최옥과 어머니 한씨 부인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태어날 때에 하늘이 아주 맑았으며 해와 달이 밝은 빛을 발했다. 상서로운 기운이 집 주위를 둘러졌고, 구미산 봉우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아버지 최옥은 경상도 일대에서 이름난 유학자였다. 『근암집』이라는 문집이 남아있고, 노계 박인로의 문집을 편찬할 때 영남의 여러 유학자들과 참여한 사실로 보면 알수 있다. 어머니 한씨 부인은 한번 결혼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다. 아버지 최옥은 한씨를 만나기 전에 두 부인이 있었으나 딸 둘만 얻고 아들이 없었다. 아들을 얻기 위해 세 번째 인연이 된 사람이 한씨 부인이었다. 근암은 그의 나이60세가 넘어 보게 된 아들이라 수운을 지극히 사랑했다.
수운은 어려서부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영민함도 있었기 때문에, 근암은 수운에게 큰 기대를 걸고 가르쳤다. 수운이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 한씨부인이 돌아가셨다. 3년상을 치른 뒤에, 13세에 결혼을 했다. 수운을 이렇게 빨리 결혼을 시킨 것은 근암공이 빨리 후손을 보아 대를 잇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4년 뒤에 근암공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바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운의 처지는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글공부는 배우긴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양반가문이라 농업이나 상업을 배우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번 결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실 수운은 글공부를 잘해도 과거를 볼 자격이 없는 신분이었다.
아버지의 3년 상을 치르고 난 뒤 수운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그의 나이 20세 무렵이다. 10년간 전국을 떠돌면서 세상의 인심을 살펴보았다. 세상의 인심을 살펴본 결과 양반들은 자신과 집안의 안위만 생각하고 나라를 어떻게 경영해 나갈지 방안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힘든 것은 백성들이었다. 일 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자신의 손에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온갖 명목의 세금을 내고 나면 빚지는 수가 많았다. 목숨을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삶의 희망이 없었다. 힘없는 선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미 과거 합격자는 결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힘 있는 양반 가문들이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고, 임금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수운은 이렇게 해서는 나라가 얼마 못가서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에 유행하던 서학 즉 천주교 공부도 해 보았다. 장점은 새로운 과학기술과 모든 사람은 신분에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이었다. 단점은 유일신을 숭배하여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하고는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담점을 극복하고 장점은 살려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한 수운은 공부에 몰입하기 위해서 잠시 고향을 떠나 울산 처가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가 1855년인데 선생에게 인생의 대전환을 가져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봄날 기거하는 초당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차림새가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자신을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하던 스님이라고 하면서 처음 보는 책을 수운에게 꺼내 놓았다. 자신이 백일기도 끝에 얻은 책인데,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전국을 떠돌며 알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흘의 말미를 주면서, 그 책의 내용을 알아보아 달라는 것이었다. 수운이 책을 살펴보니, 지금까지 보던 책이랑 내용이 너무나 달라 놀랐다. 그 책의 핵심 내용은 “이 세상의 궁극의 진리를 깨달으려면 하늘에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사흘 뒤에 스님이 다시 찾아왔다. 스님은 “혹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수운은 “제가 이 책의 내용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스님은 밝은 얼굴로 웃으시면서 말하기를 “이 책은 진실로 선생의 책입니다. 저는 다만 전하기만 할 뿐입니다. 부디 성취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운은 이 일로 인해서 크게 깨달았다. 그동안 수운이 진리를 찾기 위해 주력한 방법은 주로 독서였다. 독서도 나름대로의 방법은 될 수 있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수운은 책에서 가르친 데로 하늘에 기도하여 진리를 구하는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하고 기도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을묘천서’라고 한다. ‘을묘년에 하늘에서 받은글’이라는 뜻이다.
을묘천서의 체험 이후 수운이 기도할 장소를 선택한 곳은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이었다. 이때가 1856년 여름이었는데, 수운이 살던 경주 근방에도 이름난 사찰이나 수도하기 좋은 장소가 많은데도 굳이 멀리 있는 천성산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의 일화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원효스님은 고차원적인 불교 이론을 정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불교를 민중 친화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한 분이다. 즉 ‘나무아미타불’을 무시로 외우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수많은 백성들이 원효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천명의 성인이 탄생한 곳이 바로 ‘천성산’이었다.
수운은 천성산 깊은 골짜기에 있는 내원암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했는지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불교 사찰이다 보니 좌선을 통해서 염불을 하거나 화두를 들고 삼매에 들어가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한지 47일 즈음에 문득 고향의 숙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마음에서 전해졌다. 실제로 고향에 가보니 숙부가 돌아가신 게 사실었다. 친척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소식을 전한 일이 없는데 스스로 알고 온 것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동안 기도의 효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 뒤로 수운은 한번의 49일 기도를 더 하는데 이번에는 내원암에서 한 것이 아니고 천성산 정상 부근에 있는 자연동굴인 ‘적멸굴’에서 했다. 단단한 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동학의 역사에는 천성산에서는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이 없다. 아쉽지만 수운에게 있어서 천성산은 경주 용담에서 한울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는데 가장 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곳이었다. 수운은 1859년 10월에 울산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경주 용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드디어 한울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의 일을 수운은 『논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수운은 한울님을 만나는 순간을 접령하는 기운과 강화는 가르침은 있는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한울님과의 대화를 통해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면 너는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리라는 가르침을 받게 된다. 한울님은 또 수운의 마음을 시험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한다. “너는 백의의 재상을 제수 받겠는가?”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한울님의 아들로서 어찌 백의의 재상이 되겠습니까? 한울님이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나의 조화를 받아라, 이제 나의 조화를 보도록 하라, 선생께서 가르침을 받아 이를 시험해 보니 모두 세상에 있는 조화였다. 선생께서 응하지 않으니, 또 다시 말씀하기를 이 조화를 행한 이후에 저 조화를 행하도록 하라... 그후 비록 한울님의 가르침이 있어도 이를 거행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열하루 동안을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음식을 끊은 이후 한울님께서 단 한마디의 가르침도 내리지 않다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르러 가르침을 내려 말씀하기를, 아름답구나. 너의 절개여, 너에게 사용할 수 있는 무궁의 조화를 내려서 포덕천하 하게 하리라.“
수운은 한울님의 유혹 즉 높은 벼슬자리와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좋은 능력을 준다는 것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절개를 지켜서 결국은 한울님으로부터 진짜 세상을 건질 수 있는 것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이런 일이 있은 후 1년간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 수운이 만들게 된 것이 21자 주문이다. 내용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이다.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주문만 받은 것이 아니고 영부도 받게 된다. 영부를 받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럭저럭 장등달야 백지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길없어 백지펴고 붓을드니 생전못본 물형부가 종위에 완연터라,,,,,, 한울님 하신말씀 지각없는 인생들아 삼신산 불사약을 사람마다 볼까보냐 미련한 이인생아 네가 다시 그려내서 그릇안에 살라두고 냉수일배 떠다가서 일장탄복 하여스라 이말씀 들은후에 바삐한장 그려내어 물에 타서 먹어보니 무성무취 다시없고 무자미지 특심이라 그럭저럭 먹은부가 수백장이 되었더라 칠팔삭 지내나니 가는몸이 굵어지고 검던낯이 희어지네 어화세상 사람들아 선풍도골 내아닌가
한울님의 수운에게 백지를 펴라고 분부하여 백지를 펴니 처음 본 모양의 그림이 종이 위에 그려지는데 이상한 것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수운에게는 실제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 한울님은 종이 위에 그린 그림을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셔보라고 한다. 그래서 먹은 종이가 수백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동안 혹사했던 몸이 굵어지고 검게 변했던 얼굴이 하얗게 변화되었다. 그야말로 영부는 한울님이 내려준 신선의 약이었던 것이다.
1861년 6월부터 용담의 문을 열고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오로지 전해주는 것은 21자 주문과 영부였다. 수운이 용담에서 가르침을 펼친다는 소문이 경주는 물론이고 다른 지방까지 전달되어 1862년에는 각 지역에 접주를 둔 ‘접주제’를 실시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16개였다. 1년 만에 이렇게 많은 접주제가 만들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빨리 동학의 가르침이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수운이 영부를 불에 태워 물에 타서 마신 결과 몸이 좋아졌다는 것과 주문을 외운 결과 자신이 한울님을 모신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동학의 가르침이 순식간에 백성들에게 전달되자 위험을 느낀 조선의 관리들은 동학의 가르침이 서학과 비슷하다 하여 최제우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한다. 그때가 1864년 3월이다. 41년간의 짧은 시간에 최제우는 새로운 가르침을 만들어 놓고 돌아가신다. 2대 제자 최시형에 의해 동학의 가르침은 조선 팔도에 전해져 나중에는 동학혁명을 일으켜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