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제5장 남해 연혁연구 (第五章 南海 沿革硏究) - 李朝時代의 生活斷相 (이조시대의 생활단상)
상세내용
李朝時代의 生活斷相 (이조시대의 생활단상)
南海의 在來氏姓……일반 백성들이 성명을 사용하게 된것을 대략 신라통일기 (新羅統一期) 를 전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무렵부터 우리 남해에도 점차 씨족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는 쉽게 추측되지만 각성별 (各姓別) 의 입남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자료를 얻지 못하였다. 여기에서는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와 진주진관 남해현기 (晉州鎭管 南海縣誌)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이조시대의 남해 성씨 (氏族) 분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증보문헌비고는 一七七〇년 영조四十六년八월에 편집청 (編輯廳) 에서 一백권 四〇책으로 완간된 동국문헌비고를 一七二八년 정조六年에 증보에 착수하여 一七九六年 十四년만인 정조二十년에 완성되었으므로 여기에 수록된 남해의 재래성씨 (在來姓氏) 는 천七백년대 이전부터 입남 거주하고 있었던 대성 (大姓) 으로 보아서 무방할 것이다.
이 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의 재래대성으로는 이 (李) 김 (金) 박 (朴) 정 (鄭) 윤 (尹) 조 (趙) 오 (吳) 강 (姜) 심 (沈) 안 (安) 장 (張) 남 (南) 서 (徐) 조 (曹) 임 (林) 양 (梁) 손 (孫) 배 (裵) 고 (高) 지 (池) 진 (陳) 진 (秦) 백 (白) 차 (車) 제 (諸) 화 (和) 동 (董) 등 二十七 개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와 거의 같은 해에 편찬된 남해현지 (縣誌) 에는 이밖에도 하 (河) 류 (柳) 채 (蔡) 최 (崔) 곽 (郭) 공 (孔) 신 (申) 권 (權) 한 (韓) 유 (兪) 홍 (洪) 황 (黃) 감 (甘) 전 (田) 어 (魚) 빈 (賓) 등 四十여개 씨성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의 남해인구는 四천九백四호 (戶) 에 남자 一만二천二백十六명 여자 一만三천四백六十五명으로 도합 二만五천七백九十一명 이란 비교적 조밀한 인구분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참고로 당시 경상도 (주로 영남의 慶南지방) 에 살고있던 대소 씨성들의 중요분포지역과 그생활본거지인 고을 (郡) 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혹은 입남거주 이전의 각 씨성의 분포와 이동을 이해하는데 도움되고자 함에서 임을 말해둔다.
(괄호안은 고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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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진주 함안 현풍 남해등 |
金—김해 은양 진주 남해등 |
朴—밀양 하동 함양 남해등 |
鄭—동래 진주 창원 남해등 |
崔—고성 진주 밀양등 |
洪—진주 거창 밀양등 |
申—진주 하동 밀양등 |
權—진주 하동 밀양등 |
趙—창녕 하동 김해 남해등 |
韓—진주 하동 밀양등 |
吳—남해등 |
姜—진주 하동 남해등 |
沈—의령 남해등 |
安—남해등 |
許—진주 밀양등 |
張—창녕 진주 남해등 |
閔—밀양 |
任—진주 밀양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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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〇 |
四〇 |
四〇 |
二〇 |
二四 |
八 |
一四 |
六 |
一八 |
九 |
一七 |
七 |
八 |
七 |
五 |
一九 |
一 |
一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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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남해등 |
徐—진주 남해등 |
具—진주 밀양 김해등 |
成—창녕 진주등 |
宋—진주등 |
兪—진주등 |
元—진주 하동등 |
黃—진주 하동 고성등 |
曺—창녕 진주 남해등 |
林—진주 남해등 |
梁—진주 창녕 남해등 |
孫—밀양 남해등 |
蔡—진주등 |
辛—진주 의령등 |
丁—진주등 |
裵—진주 남해등 |
高—진주 하동 남해등 |
田—진주 고성등 |
|
一〇 |
一五 |
三 |
一〇 |
二〇 |
一六 |
四 |
一二 |
三〇 |
一八 |
九 |
一二 |
六 |
四 |
一二 |
一三 |
九 |
一三 |
|
文—곤양 진주등 |
河—하동 진주등 |
池—진주 하동 남해등 |
陳—고성 김해 남해등 |
卓—진주 하동 어령등 |
白—진주 하동 남해등 |
甘—거창 의령 창원등 |
千—진주 김해등 |
秋—진주 하동등 |
孔—진주 김해등 |
玄—김해 의령등 |
魚—진주 하동등 |
呂—함안등 |
禹—진주 창녕등 |
盧—진주 김해 창녕등 |
魚—진주 김해 함안등 |
曉—사천등 |
劉—동래 고성등 |
|
五 |
一〇 |
九 |
一五 |
六 |
一四 |
三 |
五 |
五 |
七 |
一三 |
九 |
七 |
六 |
一一 |
三 |
一 |
一二 |
|
諸—이음동 남해등 |
秦—진주 남해등 |
卞—밀양 김해등 |
石—진주등 |
蕭—진주 남해등 |
史—진주등 |
那—진주 창원등 |
孟—밀양 김해 곤양등 |
愼—거창 진주등 |
廉—진주 밀양등 |
蘇—김해 진주등 |
周—진주 밀양등 |
廉—진주 밀양등 |
楊—진주 하동등 |
奉—김해 하동 함안등 |
太—밀양등 |
馬—진주 밀양등 |
黃—김해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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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
二 |
四 |
七 |
六 |
五 |
三 |
三 |
六 |
六 |
三 |
六 |
五 |
五 |
三 |
三 |
二 |
二 |
本貫과 分布 한편 성(姓)에는 반드시 관(貫)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적(籍) 또는 향관(鄕貫), 성향(姓鄕) 등으로도 불리워졌으며 대개 그 씨족의 본거지가 되는 지명에서 취해졌다. 이 제도는 신라말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 이조시대의 향관에 대해서는 통계가 없어 전혀 알 수 없으나 一九三十년대의 우리의 성의 총수는 무려 四百九十六종에 이르르고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각 성의 성향 즉 본관의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이라 하겠다. 즉 당시 통계에 나타난 대성과 그 본관수를 알아보면(괄호아래 숫자는 본관 수)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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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四七〇 |
金 五〇〇 |
朴 三二四 |
崔 三三六 |
張 二四六 |
鄭 二二〇 |
趙 二一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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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 二一六 |
黃 一六三 |
吳 一六四 |
白 一五七 |
田 一四二 |
徐 一五三 |
宋 一七二 |
|
尹 一四九 |
盧 一三七 |
申 一五五 |
柳 一三一 |
韓 一三一 |
文 一三二 |
黃 一二八 |
|
裵 一二二 |
孫 一一八 |
全 一七八 |
陳 一一八 |
車 一一一 |
玄 一〇六 |
方 一一七 |
|
姜 一〇四 |
洪 一〇一 |
安 一〇九 |
高 一〇一 |
梁 七九 |
許 五九 |
南 五七 |
|
秋 四七 |
河 七〇 |
閔 二五 |
卓 二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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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 남해를 성향으로 하는 성도 적지 아니 하였다. 즉 본관을 남해에 둔 성으로는 옛 난포현(蘭浦縣—現二三東面一帶)에 뿌리를 박아 내려온 김·박·정·손·배·백·고씨등과 평산현(平山縣—現 平山浦)에서 내려온 오·윤·안·서·조(曹)·동(董)·화(和) 등 十四개 씨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당시 남해에서의 대성(大姓)은 김·박·이·정·최의 순으로 변천되었는데 동일 씨성으로 각면총세대수의 一활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세대수를 각면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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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별/성별 |
김 |
이 |
박 |
정 |
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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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면 |
三六九 |
二九四 |
一九七 |
二六七 |
- |
|
이동면 |
四〇〇 |
二八八 |
一九八 |
二一七 |
- |
|
삼동면 |
五四四 |
四〇七 |
- |
- |
二九一 |
|
남 면 |
五〇四 |
二〇七 |
二六二 |
- |
- |
|
서 면 |
二六七 |
一八六 |
二四八 |
二一一 |
- |
|
설천면 |
二八一 |
- |
二八七 |
二一八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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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면 |
四一六 |
- |
三七二 |
- |
- |
참고삼아 끝으로 남해에서의 단일 성향으로 가장 많이 집단적으로 살고있는 씨성의 분포를 추가해 둔다. (숫자는 호수).
남해면
△평현리 성주李氏 九〇 △아산리 진양河氏 三〇 △립현리 함안趙氏 五七 △차산리 밀양朴氏 三九 △심천리 진양鄭氏 三七
이동면
△초음리 경주金氏 九八 △다정리 전주崔氏 三七 △초음리 성산李氏 二四 △무림리 죽산朴氏 五四 △초음 양아리 장수李氏 二七 △석평 양아리 밀양朴氏 七 △무림 석평리 진주河氏 八三 △양아리 김해金氏 九六 △용소 화계리 진주姜氏 九七
△양아리 경주鄭氏 二七 △신전리 파평尹氏 四四 △신전 청주韓氏 二三
삼동면
△난화리 경주金氏 三九 △동 은진宋氏 四一 △동 진양河氏 三四
동 경
△주 崔氏 三六 △영지리 경주崔氏 一一一 △동 김해金氏 七〇 △동 진양姜氏 三〇 △동 남양洪氏 三〇 △금송리 경주李氏 六九 △동 김해金氏 三五 △지족리 김해金氏 三六 △동천리 김해金氏 五一 △동 초계崔氏 一九 △동 진양姜氏 二七
△봉화리 금녕金氏 九三 △물근리 전주李氏 五六
남 면
△남면월리 은진宋氏 八〇 △상가리 진양河氏 六五 △당항리 김해金氏 五七
△동 파평尹氏 五三 △평산리 남원梁氏 四六
서 면
△연죽리 금성林氏 二五 △서호 진양鄭氏 三〇 △동 경주金氏 五〇 △대정리 경주金氏 五〇 △동 밀양朴氏 六〇 △서상리 밀양朴氏 五二 △동 현풍郭氏 三〇 △동 남평文氏 二〇 △작장리 파평尹氏 五四 △동 밀양朴氏 四〇 △동 현풍郭氏 六二 △남상리 밀양朴氏 三〇 △동 전주李氏 八〇 △동 경주崔氏 二〇 △노구 경주崔氏 二〇 △동 진양鄭氏 二〇 △중현리 진양鄭氏 四五 △동 평산申氏 五三 △정포리 문화柳氏 四一 △동 진양鄭氏 五六、
고현면
△차면리 남원梁氏 二六 △남치리 밀양朴氏 五五 △동 진양鄭 三三 △포상리 죽산朴氏 二三 △대곡리 장수李氏 三七 △이어리 경주金氏 四〇
설천면
△비란리 밀양朴氏 八〇 △진목리 진양鄭氏 二一 △동 수원白氏 二一 △양朴氏 二六 八五 △문항리 문화柳氏 四〇 △동 진양鄭氏 六九 △금음리 진양鄭氏 三〇
△동 경주金氏 二〇 △남양리 금녕金氏 三九 △동 용궁金氏 一七 △문의리 파평尹氏 四七 △동 진주姜氏 一五 △노량리 충주池氏 二〇 △덕신리 청주韓氏 一七
△노량 진양鄭氏 一九
창선면
△동대리 진양姜氏 二七 △당항리 현풍郭氏 四五 △동 진양鄭氏 三〇 △율도리 경주鄭氏 四四 △대벽리 밀양朴氏 四三 △광천리 밀양朴氏 三七 △남대리 밀양朴氏 二六 △동 달성徐氏 四〇 △지족리 나주林氏 四四 △동 전주李氏 二五 △옥천리 광주鄭氏 一八 △부윤리 밀양朴氏 二五 △오룡리 김해金氏 三五 ·
生業과 風習 ······ 일반 백성들은 경직(耕織)과 어로(漁撈)를 각기 생업으로 영위하였으며 어떤 유형의 것인지는 모르나 무예를 연마하는 풍조(風潮)가 매우 강했던 것처럼 현지(縣誌)에 기록되어 있다. 또 특산물로는 문어(文魚) 홍어(洪魚) 오징어(烏賊魚) 복합(鰒蛤) 대구어(大口魚) 청어(靑魚) 게(蟹魚) 홍합(紅蛤) 낙지(絡締) 진어(眞魚) 석수어(石秀魚) 수어(秀魚) 해삼(海蔘) 등 해산물과 석류(石榴) 유자(柚子) 비자(榧子) 저(楮) 등 특산물이 생산되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기록하고 있다.
또 一七七一年 남해로 귀양살이를 갔다가 「남해문견록」을 남긴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은 「섬중의 풍속은 무지해서 사리를 판별하지 못하는 자의 움직임이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라고 신랄하게 혹평을 가하고 있다.
그는 이 문견록에서 관혼상제의 풍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어버이의 장례를 모실때 수일전부터 집에 차일을 쳐놓고 주육(酒肉)을 많이 장만하여 동네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당과 점쟁이를 불러모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굿을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적에 북과 장구를 치고 피리와 저를 불어 상여앞에 인도하여 산소까지 가니······ (중략)······ 장우(葬儒)를 약간 잘차려 지내어도 풍류와 주육이 착실치 못하면 장사를 잘못 지냈다고 꾸지람이 많다하니 우습기도 우습고 놀랍더라」「혼인하는 모양은 더욱 이를 것 없더라, 혼인날 신랑이 마을에 들어서면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내달아 신랑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둥 매우 끓게 보이며…… (중략)…… 남방풍속이 괴이하여 「여기 사(女居士)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노름하고 동량하는 것이 무수한지라 읍내 집마다 다니며 북치며 염불소리하고 노름하면 마을 사람들이 굿을 보며 돈과 쌀을 낱낱이 주어 염불을 더하라 하여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그치는 때 없고 그 거사가 지나가면 또 다른 거사가 이어 와 연하여 그리하여 그칠때 없다하니……」
그의 눈에 모든 풍습이 이체롭고 어떤 의미에서는 야만스럽게 비쳤을지 모른다. 그는 여인들이 놀이만 좋아하며 몹시 경박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박한 일부여인층의 노증(露呈) 된 행동에 불과한 것으로 그역시 다음과 같은 열녀(烈女) 이야기를 전하면서 깊이 감동하고 있다.
열녀(烈女)의 이름은 연대(蓮臺)로 상사람 김지평(金至平)의 딸이었다. 연대는 남의 집 머슴 임분선(林芬善)의 처가 되었는데 그녀의 나이 겨우 十七세에 남편을 잃었다. 아비인 지평은 청상과부인 딸을 개가시키려 설득하였으나 연대는 한사코 반대하면 끝에 뒷물 나무가지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남해 현감이 계를 올려 왕께 상주(上奏) 하여 영조五년 一七二九년에 정문을 마을에 세우는 은전(恩典)을 내렸다는 것이다.
목숨을 내던지고 정조와 수절을 지켜 낸 전형적인 남해여인의 상징인 것이다.
또 장날이 되면 전복 홍합 미역들이 많이 나와 거래되고, 입는 것으로는 무명 모시 베옷을 명주옷보다 많이 입었던것 같다. 특히 전복은 물길로 五·六십리 혹은 백리를 더 나가 뒤웅박을 띄워놓고 깊은 물속에서 캐내온 것으로 포작이 즉 지금의 보자기가 그때부터 성행되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