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청주의 개칭인 강주(康州)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지금의 창선면(昌善面)은 본래 가야국에 속해 있었는데 신라가 이를 병합하여 고자군 인선현(古自郡 一 善縣)이라 하였다.
그 후 경덕왕조에 이르러서부터 그 명칭이 자주 바뀌어지는데 양성지(梁誠之)의 《팔도지지(八道誌志)》에는 경덕왕(742~764년)에 상선현(尙善縣)이라 개명하여 고성군에 귀속시켰고 고려초 다시 영선현(永善縣)으로 이름을 고쳐 현종(1010~1031년) 때 하나의 속현(屬縣)으로서 진주목(晉州牧)에 내속(來屬)하였다.
당시 진주목의 속현으로는 악양현(岳陽縣) 살천부곡(薩川部曲) 화개부곡(花開部曲)과 영선현 등 4개가 있었다.
이 무렵은 이미 농경이 상당히 발전되고 특산물도 흥성한 한편 문무 신문왕조, 다시 말하면 전야산군으로 불리워지기 전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금산에 찾아들어 보광사(普光寺)를 짓고 불교를 광포하였다는 전설도 있고 또한 686년 영주에서 부석사(浮石寺)를 세운 의상대사(義湘大師)도 전후해서 금산에 찾아들어 의상암(義湘菴)을 세우는 등 고승들의 강설(講說)과 사찰건립에 관한 전설들이 아직도 전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남해군으로 개칭되던 무렵은 불교문화도 상당히 꽃피워진 태평스런 세대였던 것 같다.
高麗朝時代(고려조시대) ······ 서기 928년 왕건(王建)이 고려태조에 오른 이래 과도적인 행정기구와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여 고려조의 체제를 뚜렷하게 나타낸 것은 제6대 성종(成宗)과 제8대 현종(顯宗)을 중심으로 한 시대였다.
성종은 2년 2월 서기 993년에 중앙관서개조(中央官署改組)와 더불어 지방행정기구를 개편하여 광주(廣州) · 양주(揚州) · 충주(忠州) · 청주(淸州) · 공주(公州) · 진주(晉州) · 승주(昇州) · 황주(黃州) · 해주(海州) 등 12목제(牧制)를 단행하고 상무관(常住官)인 목사(牧使)를 각기 소관 주 · 군 · 현에 파견하여 제향직(諸鄕職)을 감독케 하였다.
이어 성종 14년에 이르러 전국을 4도호부(四都護府 - 安東 지금의 金海 安南 安北 安邊)로 나누고 도(道)를 관내(關內) · 중원(中原) · 하남(河南) · 강남(江南) · 해양(海陽)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山南) · 삭방(朔方) · 저서(沮西)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12목을 12주절도사(州節度使)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10도소관제의 주 · 현진(州 · 縣鎭)는 모든 580여에 달하여 지방제도가 확고하게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번 개혁의 특징의 하나는 지방군제(郡制)가 폐지된 일로 우리 남해도 서기 995년인 이때 남해현으로 개칭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남해현지 등에는 8대 현종조 서기 1018년 행정개혁 때 남해현으로 개칭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종 14년 개편 때 이미 군제가 폐지되고 10도 4도호부 128주 449현 7진(鎭)으로 체계화되었음이 분명한 이상 당시의 남해호칭은 산남도(山南道) 남해현이었던 것이다.
이어 1018년 현종 9년 2월 또한 대대적으로 행정구획 대개편이 단행되었다. 즉 각도의 안무사(安撫使)를 폐하고 전국에 4대도호부 8목-광주 · 충주 · 청주 · 진주 · 상주 · 나주 · 황주 · 전주-56지 주 군사(事) 28진장(鎭將) 20현령을 두었다." 따라서 도제(道制)는 없어지고 성종 14년 개편된 128주 449현 7진도로 재개편되었으며 현령수는 겨우 20에 불과하였다. 이때의 남해 명칭은 남해현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현령을 두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2백년 뒤인 충숙왕조 10년간에 걸쳐 원나라에서 주자학 성리학(朱子學 性理學)을 연구하고 돌아온 거유 백이정이 첨의평리(僉議評理)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로 활약하면서 전성을 이룬 때이며 후에 남해로 이거해 온 것은 복위(復位) 충숙왕 8년이 아니면 충의왕조 초(1339~40년) 경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제 백이정이 남해로 이거하였다고 추측되는 때로부터 약 10년 후인 서기 1350년경부터 내우외환으로 고려 조야는 이미 흔들려 쇠퇴 내지 붕괴기로 접어 들었으며 왜구들의 약탈로 우리 남해는 점차 형언할 수 없는 수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즉 충정왕 2년 서기 1350년 대거 거제, 고성 등지에 침공한 왜구들은 이듬해 11월 남해에 침공하여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왜구들의 도량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제31대 공민왕조에는 조삼모사(朝三暮四) 격인 행정구역 개편만 네 번이나 이루어졌다.
왜구에 의해 초토화된 남해현은 그 행정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서기 1352~3년경 진주 관내 대야천(大也川—晴川) 부곡으로 임시 예속시켜 행정을 보게 했다. 그러나 이 조처는 결코 남해현을 폐했거나 병합시킨 것은 아니다.
왜구의 약탈과 방화 살육 등 온갖 만행으로 관아(官衙)는 소실되고 주민들은 남부여대 난을 피해 타지로 일시 떠나버려 현지(縣誌)의 표현 그대로 남해는 생물구망(生物俱亡)한 초토가 되고 말았으니 이렇게 임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는 몇백년동안 폐군되었느니 내버려졌느니 하는 과장된 추측은 버려져야 한다.
이로부터 약 30년 후인 1383년 5월 당시의 해도원수 정지장군(海道元帥 鄭地將軍)이 최후로 왜구들을 관음포 앞바다에서 섬멸하였을 때 이고을 주민들이 그 고마움을 잊지못해 손수 돌을 쪼아 정지장군승첩탑(勝捷塔)까지 세워놓지 않았던가 왜구들의 집요하고 간악한 침공으로 우리 남해는 몇번이고 생지옥같은 고역을 치뤄야 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은 끝내 고향을 버리지않고 지켜 주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으로 초토화된것은 옛 창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왜구들 때문에 현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원종 10년(1269년) 왜구들이 우리 변경(邊境)을 침공해오려 한다는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모두 진도(珍島)에 옮겼다는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