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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第四章 悲嘆의 謫所에 핀 流配文學 (제4장 비탄의 적소에 핀 유배문학) -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2

내용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落島의 風俗과 土言 珍奇하기만...... 섬중의 풍속은 무지해서 사리를 판별하지 못하는 자의 움직임이 심하여 인륜의 행실이 전혀 없고 어버이의 장례를 모실 때 수일 전올기하여 집에 차일을 치고 주육(酒肉)을 많이 장만하여 동네 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당과 경쟁이를 모아 아침부터 밤이 되기까지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하여 갈 적에 북과 장구 치며, 피리와 저를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산까지 가니 장수(葬需)는 부조 받는 일이 없고 장사 지낼 때 산신께 폐백을 드리는 이가 없고, 선비라 이름하는 신주(神主)를 모시는 이가 없고 돌아와 제사 한번 지내니 제 이름은 넋제라 하니 대범 장사에 주육과 풍류를 착실한 후에야 이웃 사람들이 장사를 잘 지내니 그 상인(喪人)이 착하다 하고, 장수를 약간 잘 차려 지내어도 풍류와 주육이 착실치 못하면 장사를 잘못 지냈다 하고 꾸지람이 많다 하니, 들으니 우습기도 우습고 놀랍더라.

 

장례가 이러하거든 혼인하는 모양은 더욱 이를 것 없더라.

 

혼인날 신랑이 오면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매달아 신랑의 얼굴에 먹칠도 하는 등 매우 끓게 보채어 급제한 선달을 선진이 보채는 듯이 보채고 딴 방에 종일토록 앉혔다가 신랑의 집에서 신부집으로 구혼하는, 납채하는 일도 없고, 신랑이 색시댁에 가서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상위에 올려놓고 절하는, 전안하는 일도 없고, 신랑 신부가 낮에 보는 일도 없고, 동네 잔치하는 일도 없이 밤에 신랑 있는 데 처녀를 들여보내고, 다른 예절이 없다 하니 도중의 칭명 양반이라 하는 것도 장사 지내는 예절과 혼인하는 의례가 이렇듯 망측하니 이 땅이 비록 서울서 천리가 넘은들 예의지방의 교화가 아니 미친데 없건마는 이 땅이 이렇듯 무식하고 예의범절 없이 언행이 서툴까? 측연하기가 심하더라.

 

다름이 아니라 이 고을 원은 이전부터 무관이 오기에 정치를 혹 잘한다 하여도 예의지교와 어버이를 잘 섬기는 도리와 절개를 굳게 지키는 도리를 일컫는 이가 없기에 풍속이 준준(蠢蠢)하여 한 해 그러하고 두 해 그리하여 백성들이 오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성질이 모질고 완만하게만 길러 오고 중간에 문신을 사이사이 보내게 변통하였으되 문관 원이 한 번 다녀간 후 무변 원이 매양 연하여 오기 관학하는 일이 없고 예법 붙이가 매우 경솔하고 오만하니 도중 늙은이들이 혹 애달퍼하는 이가 있더라, 소중 풍속이 그리 무식하고 예의없이 상스러운데 효자 하나가 있으니 성명이 이성삼이라, 제 아비 종실 후예로 세계책이 있고 전주에서 옮겨와 사는지라 성삼이 천성지효하더니 아버지의 상을 만나 초상 습렴부터 모든 것을 다 상례비요(喪禮備要) 대로 하고 장사에 굿과 풍류를 아니하고 장사 지낸 후 산중에 초막을 짓고 시묘하니 사람들이 범의 해가 있는 데라 말리되 성삼이 손수 죽을 쑤어 먹고 삼 년을 지내고 내려올 제 그 집에 사람을 얻어 들이고 논을 사주어 지어먹고 묘를 조석으로 보살펴 달라 하고 내려와 기제와절사를 극진히 하고 하룻길이라도 갈 적과 올 적에 사당에 분향 고사하여 온갖 일을 다 예대로 하고 그 노모가 갑술생, 금년이 칠십 팔 세라 근력이 강건하되 성삼이 주야 곁에서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드리고 새벽에는 문안드리는 일과 목마르지 않게 항상 보살펴드리는 효양을 지극히 하고,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전답을 사나 반드시 제 형의 이름으로 사는 문서를 하니 이웃사람들이 말려 가로되

 
「사방은 자네 형제 우애 극진하기니와 자네 자식들은 종형제니 저희 장래 서로 다투어 어지러워짐이 나기 쉬우니라」
 
성삼이 가로되
 
「내 비록 전토를 사나 형이 가장이니 형의 이름으로 삼이 당연하고 장래 종제 사이에 전토로 싸움의 화근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 전토 있은들 무엇에 쓰리오?」
 
하니 성삼의 효우 언행이 실로 기이하여 해도(海島) 인물 같지 아니하되 시골무리들이 이웃들이 조소하고 귀히 여길 줄을 모르니 풍속이 무식하고 예의없이 상스럽기 가이 없더라, 성삼이 이따금 내게 왕래하여 상계 제례에 의심된 곳을 묻고 상례비요 책이 없어 걱정하거늘 내 제 행실을 귀히 여겨 백지를 얻어 대구(大邱)에 보내어 박아다가 주며 생각하니 서울의 사대부가에 예서를 많이 쌓아 두고도 행치 못하는 이가 몇 집인가 하노라.
 
읍촌 여인들이 음풍(淫風)이 성하여 정절 지킬 이 적은데 열녀 일 인이 있으니 이름이 연대(蓮臺)라 상사람 김지명(金至明)의 딸이요, 사노 임봉선(林芳善)의 처가 되었더니 연대 나이 겨우 십칠 세에 홀로 되어 삼년상의 슬픔을 마치니 그 아비 젊은 과부를 참혹하게 여겨 개가 시키려 하니 연대 묏 나무에가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남해 현감이 계를 올려 왕께 여쭈어 지금 임금의 기유년(영조 五년·一七二九년)에 정문을 마을에 세우는 은전을 내리오시니 성세 포상지은이 이런 바닷 고을에도 미쳤는 일을 뉘 아니 감동하리오.
 
관장되었던 이가 효열지행을 각별 숭상하면 풍속이 거의 나을 듯싶고 효열지행을 가르친 후에야 나라에 충성하고 웃사람을 섬길 줄을 알리로다.
 
마을이 산 밑에도 있고 물가에도 있으니 울과 사립을 다 대나무로 하고 동산에 대숲이 푸르러 있고 뜰가에 석류꽃이 붉었으니 보기에 경가(景佳)롭고 전답이 옥토요, 길쌈들이 착실하고 해물이 갖추어 있으니 생존의 길은 좋은 곳이로되 내 주인의 마루에 앉았더니 지붕에서 홀연히 앞에 떨어지는 것이 있거늘 보니 큰 뱀이 앞에 떨어져 방석에 서리는지라 매우 놀랍고, 지네도 방과 마루에 기다(幾多)하니 물리기는 면하나 이 두 가지 일이 복거(卜居)하여 있든 못할 곳이더라.
 
주인이 음식을 하여 줄 때 내 매양 지네가 들까 염려하여 단단히 꾸짖어 경계한즉 주인이 대답하되
 
「경지를 육궁 비진하니 염려 말으소서.」
 
하니 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하니 곁에 사람이 해득하여 이르되
 
「경지란 말은 부엌이란 말이요, 육궁이란 말은 매양이란 말이요, 비질이란 말은 뷔질(현·표준어 비질) 이란 말이다.」
 
하니 방언이 우습고 이뿐 아니다. 「너희」란 말은 「늑의」라 하고, 「저희」란 말은 「즉의」라 하고, 「계집아이」는 「가산이라」 하고, 「오라비 아내」는 「올체」라 하고, 「먹으란」 말은 「묵으라」라 하고, 「아무 일이나 아주」란 말은 「함부래」라 하고, 「아직」이란 말은 「당사」라 하고, 「달라」는 말은 「도라」하고, 「바삐 걸으라」는 말은 「팽팽 걸으라」 하고, 「뽕」이란 말은 「뽕」이라 하고, 「질경」이란 말은 「배피장」이라 하고, 「기러기」는 「글억」이라 하고, 「병아리」는 「비가리」라 하고, 「옷」은 「볼모」라 하여 「핫옷」은 「핫볼모」, 「흘옷」은 「흘볼모」, 「겹옷」은 「겹볼모」, 「긴 옷」은 「긴 볼모」, 「짧은 옷」은 「짧은 볼모」라 하고, 「화로」는 「화리」라 하고, 「키」는 「청」이라 하고, 「옥수수」는 「강남수수」라 하고, 「지팡이」는 「작지」라 하고, 「지렁이」는 「거생」이라 하고, 「소래개」는 「솔방」이라 하고, 「다리미」는 「다립」이라 하니, 이런 방언을 처음들안 적은 귀에 설더니 오래 들으니 이어가더라.
 
남방 풍속이 괴이하여 여거사(女居士)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놀음하며 동냥하는 것이 무수한지라 읍내집마다 다니며 북치며 염불 소리하고 놀음하면 마을 사람들이 굿을 보며 돈과 쌀을 낱낱이 주어 염불을 더하라 하여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그치는 때 없고, 그 거사가 지나가면 또 다른 거사가 이어 와 연하여 그리하여 춘하추 삼절에는 그칠 때 없다 하니 읍내가 이러하면 외촌은 더 알 만하더라.
 
내 이전 해서(海西=황해도 지방) 원에 갔을 때 도임초에 각면에 분부하여
 
「거사들이나 중 광대들이나 요지경이나 잔나비 같은 잡된 것들을 민가에 들여두지 말라」
 
금하기 인접한 지경(地境)에서 오던 것들이 소문 듣고 경내에 들지 못하니 사 년을 가니 조용하던 것이니 이 일이 예기(禮記)에
 
「공교한 것 가지고 다니는 것 금하라.」
 
하는 것과 같은지라, 이 남해 일읍에는 이 노랑 나루에 한 번 금하였으면 이런 일이 쾌히 없으리로라.
 
삼월에 유교리(兪校理=柳彦鎬)가 귀양 오니 이웃하여 든든히 지내거니와 집에 칠십 팔 세 노친을 두고 천리 밖에 와 있기 주야로 생각을 많이 하며 침식을 불안하여 하니 소견에 불쌍하기가 다른 적객에서 더하더라.
 
도중에 달포 있으니 자연히 들으니 서울 사람이나 송도(松都) 사람이나 먼데 사람들이 장사로 오거나 다른 일로 오거나 이 도중에 와서 관비들이나 촌여자들을 얻어 혹 하여 있어 칠팔 년이나 혹 십 년이라도 돌아가지 아니하고 혹 어버이 있어도 아니 간다 하니 들음에 절통하고, 이런 풍속이 과연 금함직하더라.
 
이런 일은 제주도의 풍속과 같아서 내 이전에 들은 일이 있는 지라 이전에 서울 있을 적동네에 조봉사(趙奉事) 집이라 하는 여인이 있어 길쌈을 잘하는지라 내 집에서 아이 비자들께 방적을 가르칠 때 그 여인이 방적 스승으로 왕래하기 그 인물이 극히 양선하여 짐직 보통 백성의 살림집 어미 노릇 잘할 듯한지라 그 홀로 있는 곡정을 물은즉 조봉사란 것이 제주 군관으로 갔다가 양식이 없어 못 나오니 들어갈 때두 살 먹은 자식이 십오 세 되었다 하기 마음에 불쌍히 여겼더니 우리 계구께서 제주어사로 들어가 인하여 목사(牧使)를 하시게 되었기에 길을 떠나실 때 청하되
 
「조봉사라는 것을 찾아 대접하고 양식을 주어 보내소서.」
 
하였더니 제주에 도임하신 후 섬안의 서울 사람이나 들어가 부모 처자식을 버리고 제 집에 혹하여 십 년, 수십 년 나오지 않은 것들을 일체 중형하여 쫓아내어 보내니 조봉사란 것도 매 맞고 돌아와 집을 찾아가는 제 십오 세 된 딸이 보고 놀라 괴이한 사람 온다 하고 숨더라 하니 그 일이 벌써 누이 해가 된 줄 가히 알 만하더라.
 
계구께서 제주에서 교체되어 온 후 내 여쭈오되
 
「그 조가를 대접하여 보내게 칭렴하였더니 증형하여 보내었으니 무슨 연고이옵니까?」
 
하니 계구 웃어 가로되
 
「서울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운 섬의 백성들이 부모 처자식을 잊어버리고 행실이 날래고 성한 것들을 일병 고치려 하거든 하물며 서울 사람이란 것들이 행실이 그러하거든 어이 아니 다스리리오?」
 
하시던 것이 이제 이 도중 풍속을 보니 계구의 정치 과연 지당하신지라 조봉사 집이 십육 년 만에 자식 하나를 다시 낳으니 매양 우리 목사의 은혜라 일컫더니라. 이 말을 이야기 삼아 일컬으니 도중 사람들이 이르되
 
「이 남해 도중에 그렇게 쫓아 보내게 되면 나갈 것이 무수하리라.」
 
하더라.
 
일일에 어떤 여인이 뜰에 와서 말하되
 
「서울에서 귀양 온 사람일러니 양식을 얻어지라.」
 
하거늘 혹 임금에게 불충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흉악한 것에 연좌된 죄인만 여겨 사람더러
 
「급히 내어 보내라.」
 
하니 주인이 이르되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사복서리(司僕書吏)의 계집으로서 귀양 와 불쌍하니이다.」
 
하거늘 내 자세히 물으니 여인이 대답하되
 
「사복서리 김가의 정치로 아들 낳고 살더니 지아비가 딴 계집을 얻어 정신을 잃고 깊이 빠지거늘 시앗 새암하다가 지아비로부터 죄를 몹시 얽혀 귀양 와서 십 년이 되어 이리 설계되어 빌어먹고 지내노라.」
 
하거늘 내 이르되
 
「여자의 편성(偏性)이 강새암이 혹 피치 아니하거니와 어찌 대단히 해괴한 짓을 하여 그리 되었는가?」
 
하니 제 말이 연하여 지아비의 흉을 일컬으며 어성과 안색이 심히 어그러지고 독살스러워 화평한 거동이 전혀 없으니 군자가 절교하여도 사나운 말을 내지 아니한다 하니 이런 도리를 하천인에게 책망할 바가 아니어니와 김가 서리로 이른들 유자식한 정처를 불과강샘함한 일로 귀양 보내어 십 년을 버려두니 가위 유시부 유시처로다. 주인의 기둥에 부화부순(夫和婦順)이라 입춘을 써 붙였거늘 주인더러 가르치며
 
「너희는 이처럼 하라.」
 
하니 대소하더라.
 
 

 
 
講友兪彦鎬와 閑談으로 歲月을...... 귀양살이 이후에 아무 데 사람이 와서 보아지라 하여도 내 사양하고 아니 보았으되 우리 동생 유씨들이 진주(晉州) 하동(河東)에 사는 서너 사람이 결코 섬 속에 오는 일이 드물기에 그저 보내기 어려워 보아 대접하여 보냈더니 하동 있는 유생이라는 이가 또 와서 보기를 청하되 저희 성의 본관이 문화요, 전주 동종이 아닌지라 못 보아 보내니 박절히 여기더라.
 
하동 있는 동종 수인이 와 보고 홍합과 고사리를 가져와 받기를 간청하기에 마지못하여 고사리를 받고 홍합은 도로 주어 보내니 다른 사람이 묻거늘 내 이르되
 
「그 사람의 집이 물가이 아니오, 지리산 밑이니 홍합은 사 온 것이니 받지 못하고, 고사리는 동산에서 꺾은 것이니 받았으되 안심되지 않는다.」
 
하니 대답하되
 
「고사리는 중국의 은나라 충신 백이 숙제도 먹었느니라.」
 
하고 대소하더라.
 
유교리 머무는 곳에 한데 앉았더니 마침 유교리가 간평신이 오니 본 후 이르되
 
「가중은 무사하거니와 빚도 얻지 못하여 조석이 어렵다 하였으니 우리들의 가난이 이려운지라 노형을 이전 범범히 알았기 가난할 줄 대체만 알고 자세 모르거니와 그리 심히  어렵지 아니한가?」
 
하거늘 내 대답하되
 
나는 시방 서울과 시골에 집이 없어 동서남북으로 남의 집을 빌어 다니니 옛사람의 一명년(明年)에 또 어느 곳에 있을 줄 알지 못하여라—말이 짐짓 내 형세로다. 수년 전에 광주 팔곡가 있을 때 양식이 없기 관대를 팔아 장에서 보리를 사다가 노처가 손수 방아를 찧어 밥을 지어 놓고 웃으며 이르되 『원지내고 급제하였으되 가난이 점점 더하여 이젠 못 먹던 보리밥을 억지로 자신다』 하거늘 내 구절 한 수를 지으니 시에 왈
 
조복 팔아 보리를 바꾸어 돌아오니 (賣却朝衣換麥歸)
거친 부엌 사흘을 가히 요기하리로다 (荒廚三日可充饑)
뫼 아내는 생계가 졸함을 웃지 말을지어다 (山妻莫笑身謀拙)
 
하니 대답하되
 
열 섬이 많은 때에 일이 그르기 쉬우니라 (千魁多時事易非)
(옛말에 전사용이 보리 열 섬을 더 장만하면 아내를 바꾼다 하였기에 그 말을 일컬음이다) 이 글을 지어 놓고 한 집안 온 전체가 대소하였으니 이 한 글에 형세를 족히 알리로다.」
 
하니 유교리 듣고 이르되
 
「안빈하면 일도 좋거니와 글과 말이 다 좋다.」
 
하고 일기에 베껴 집에 가 노친께 뵈려노라, 하고 웃고 지내니라. 유교리 이따금 왕래하여 담소하며 날더러 이르되
 
「이 시절 제배 사귀기 어려우니 어떤 사람을 취하느냐?」
 
하거늘 내 대답하되
 
「내 성품은 남과 달라 벗 구하기를 부귀 극진하여도 취치 아니하고, 문장이 이름나도 취치 아니하고, 언론이 추상 같아도 취치 아니하고, 다만 그 집안이 효우 행실이 내게 도움이 되고 배울 듯하면 사귀노라.」
 
하니 유교리 써 좋은 말이라 하고 그후 벼슬아치가 벼슬살이 하는 도리를 의논하다가 내 이르되
 
「어느 벼슬을 조심 아니하리오마는 만일 의주(義州), 동래(東萊) 원이거나 관서, 영남 감사거나 혹 남북 사신이거나 이런 벼슬들은 타국에 상교(相交)하매 다른 벼슬과 다른지라 더욱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잘 단속하기를 청렴결백 강엄히 하여 다른 벼슬보다 십배 조심할 것이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타국이 가볍게 여김이 이편 한 몸뿐 아니라 조정에 사람이 없는가 여기기 쉬우니라.」
 
하니 유교리 대답하되
 
「이 의논이 더욱 좋다.」
 
하더라.
 
칠월 십삼일 내 귀양 풀린 기별을 듣고 이틀을 치행하여 떠나려 할 때 이성삼이 와서 이르되
 
「이 땅이 노인성이라고 하는 남극성이 비치기에 노인이 많아 백 세 넘는 이도 자주 있고, 근 백 세 하는 이는 지금도 많이 있고, 이전에 한성부 호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남해 노인이 팔도중 제일이라 하니 노인성 효험이라 지금 추분이 멀지 아니하니 기다려 노인성을 보시면 좋을 듯하다.」
 
하거늘 내 웃고 대답하되
 
「천문서에 이르되 노인성이 빛이 매우 성하면 세상에 노인이 극히 많다 이르고, 사람이 노인성 보고 아니 보기로 일컬은 말이 없는지라 지금 세상에 노인이 극히 많아 중국의 당우(唐虞) 시절 같았으니 노인성의 빛이 극히 성한 줄은 보질 않아도 알리로다. 노인성 비치는 곳을 의논하면 신선이 살고 있다는 봉래 궁전에 먼저 비치고 장안 팔만 가와 팔역 생령 가가호호이 다 비치어 있는 것이어든 어찌 남해 한 섬 뿐이리오? 이 땅에 노인 많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우 때 농부가 땅을 치며 태평성세를 노래한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던 노인이 요순(堯舜) 덕화를 입어 장수함과 같으니라.」
 
하니 이성삼이 대답하되
 
「과연 그러하니 우리도 예 있어 격양가를 노래하올 것이니 서울 돌아가신 후 서울의 경운가(慶雲歌)를 해마다 무궁무진히 노래하오소서.」
 
하더라.  (弘益大學校 崔康賢 敎授 現代文 譯 轉載 - 홍익대학교 최강현 교수 현대문 역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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