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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第四章 悲嘆의 謫所에 핀 流配文學 (제4장 비탄의 적소에 핀 유배문학) -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1

내용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柳義養의 南海聞見錄 (유의양의 남해문견록)

 

 

 

금산에 올라 시름 달래어 보기도 …… 남해 지형이 사면으로 바다인데 남쪽은 더욱 가이없는 바다이라. 금산(錦山)이라는 이름난 뫼가 있으니 읍내서 삼십 리를 남으로 가서 평지에서 수십 리를 올라가니 초대 중대 상대 라 하여 셋이 있으니 초대 중대는 볼 것이 별로 없고 상대는 기이한 바위가 많고, 그중에 높고 큰 바위 또 바위 둘이 있는데 바위 모양이 마치 큰 나막신 한 쌍을 남향하여 벗어 놓은 듯하니 나막신 키는 사람의 길로 두어 길이나 되니 너비도 그렇게 커서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선이 이 예 와 놀다가 나막신을 벗어 두어 돌이 되었다.」

 

일컬으니 그 말은 극히 허황하나 모양을 보면 천연한 한 쌍의 대단히 큰 나막신 같으니 억지로 갖다 붙인 그런 말이 있기가 괴이치 아니하더라.
나막신 바위 옆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세붕(周世鵬)」

 

이라 하고 새긴 것이 있으니 주세붕은 고려 때 (이것은 작자의 오해) 사람으로서 유산(遊山) 와서 자기 이름을 기록한 것이더라.

 

그 봉에 적정을 살필 수 있는 대를 높이 쌓았으니 배가 오는가, 사람을 두어 살피는 곳이러라. 이 봉에서 동으로 대마도(對馬島)를 보고 일출도 본다 하고 서로는 전라도 좌수영이 보이고 남으로는 바다가 가이없는데 바다로 수백 리는 한데 큰 뫼 하나가 있으니, 그 뫼 가운데 구멍이 크게 뚫어져 이 금산서 바라보면 서울 남대문 안에서 바깥을 내밀어 보는 듯이 구멍이 크게 분명히 보이니 그 뫼 이름을 유혈도라 일컫더라.

 

유혈도는 명산이라 옛적엔 신선이 매양 와 놀았기 때문에 바위 위에 밥을 지어 먹던 흔적이 더러 있다 하더라. 유혈도의 고기 잡기와 생복 따기를 이 뫼 앞에 와 하고, 가뭄 때에 여기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를 매양 얻는다 하되 풍랑으로 하여 왕래가 어렵다 하더라.

 

또 유혈도 밖은 넓고 멀어서 아득한 바다이니 하늘인지 구름인지 물인지 안력(眼力)이 다하여 알지 못하니 좋은 큰 배에 돛을 달아 순풍에 내어 놓아 하늘가를 보고 싶으되 그리 할 길이 없으니 옛사람의 글에

 

「해가 뜨는 동해 바다 속에 있다는 신성스런 나무인 부상을 다하도록 보지 못함을 한하노라.」

 

란 말이 그르지 아니하더라. 

 
목화봉 아래는 남으로 의상대(義湘臺)란 대와 의상암자가 있고 또 그 곁에 굴 둘이 있으니 하나는 용굴(龍窟)이요, 하나는 음성굴(音聲窟)이니 두 굴이 그리 깊진 아니하되 음성굴은 밖에서 나무로 굴바닥을 두드리면 천연한 북소리가 나더라.
 
두 굴 서편으론 무지개 같은 홍문(虹門)이 있으니 뫼의 속이 비어 그 속에 들어서면 사면으로 구멍이 뚫리이고 위로 하늘이 보이니 형상이 무지개 다리 모양과 같기 때문에 이름을 홍문이라 하더라.
 
홍문에서 서쪽으로 가니 뫼 위에 바위가 있어 천연한 돼지머리 같으니 이름을 「저두석」이라 하더라.
 
또 그 서쪽으로 구정봉이라 하는 대(臺)가 있으니 뫼 봉 위의 바위에 작은 우물처럼 파인 것이 아홉이 있기에 이름을 구정공이라 하고, 옛 신선이 와서 놀던 곳이라 일컫더라.
 
그 바위틈에 돌이 패어 그릇같이 되어 있는데 위에 바위가 높이 덮이어 빗물이 들지 아니하되 매양 맑은 물이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고 장마에도 더하지 아니하여 극히 이상한 물로 일컫거늘 떠내어 한 그릇을 마시니 맛이 과연 달고 물빛이 차기가 시원하여 기이하더라.
 
이 구정봉과 의상대들이 바다로 임하여 보는 경치는 목화봉보다 한결 쾌활하더라.
 
이것이 다 금산 남쪽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요, 금산 전체는 소나무를 장양(長養)하는 곳으로 통영(統營)서 엄금하기에 수목이 하늘을 찌르고 사슴이 많다하니 사슴이란 짐승이 뫼에서도 새끼 치거니와 바닷고기가 화하여 사슴이 되기 때문에 별로 많다 이르니 북도도 바닷가이요, 전라도 변산(邊山)도 바닷가로 사슴들이 많으니 그 말이 옳은가싶고 금산에 범도 많아 사람이 상해(傷害)를 입는 일도 많으니 내 이르되
 
「한 번 크게 사냥하여 섬 속 범을 다 없이 하면 다시 사람이 상해를 입는 일이 없을 듯하다.」
 
하니 거기 사람들이 이르되
 
「금산에는 범이 없으되 다른 데 범이 매양 바다를 헤어 건너 들어오기 때문에 도중(島中) 범을 없이 하여도 효험이 없다.」
하고
 
「범이 물을 헤엄쳐 건널 때에 머리를 물 위에 내고 오매 사람이 볼까 하여 짚검불이나 아무 넝쿨이나 써서 머리를 가리고 건너오기 때문에 사람이 모르고 있다가 놀랄 적이 많다.」
 
하니 그 짐승이 바다를 건너는 것이 영장하고 머리를 가리우는 것이 지혜가 있더라.
 
남해 땅이 멀리 있기 임진년에 왜적들이 남해 앞으로 돌려하면, 전라 좌수영이 있고 물길이 더욱 험하고 하륙하여도 서울이 매우 멀어지는고로 노량목으로 질러 들어와 하륙하면 서울길도 가깝고 다시 병수영(兵水營) 꺼릴 데가 없기 때문에 왜적들이 부디 노량목으로 들어와 다투던 일이 과연 지형이 그러하더라.
 
내 일시 귀양으로 왔어도 벼슬하는 몸으로 온 후에는 각처 관방(關防) 지형과 백성들이 아프고 괴로운 일을 항상 평소에 유의하여 보는 것이 옳으매 금산에 올라 구경할 적에 사람들이 바위나 수목들만 구경코자 가르치며 일컫되 나도 노상 원군과 수륙험난 함과 평탄함을 묻고 살피며 천만호(千萬戶) 앉힌 지형을 살펴보니 남해 한 섬이 경상, 전라두도 사이에 있어 과연 나라의 요충지가 되어 남방의 큰 관방이 되었으되 한 현감(縣監)을 두어 대수롭지 아니한 고을처럼 버려두었으니 이런 일은 소우(疏迂)한 근심이 있더라.
 
금산 서쪽편을 바라보니 용문사(龍門寺)가 있으니 큰 절이더라. 내 보통 때 절구경을 무미히 여기되 용문사 도국이 매우 좋아 뵈기 잠깐 절, 구경하려노라 하고 그리 가 산세와 골짜기의 경치 좋은 곳을 살펴보니 사면으로 바위 벼랑이 높고 험하여 완연한 성첩이 이루어져 한 곳 허한 데가 없고 그 속에 대천(大泉)이 있어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아니한다 하고 골짜기 어구에 십여 칸 너비나 터져 있으니 짐짓 산성을 만들음직한 땅일려라.
 
산성을 만들려 하여도 뫼 위에는 저절로 생긴 성첩이 있고 수구(水口) 십여 간을 잠깐 막아 쌓았으면 옛사람 이른바
 
「한 사람이 문을 막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땅.」
이더라.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완급에 충무공 같은 이를 맡겨 두었으면 뭍에 나가서 싸우고 성에 들어와 지키면 해방(海防) 형편이 과연 좋아 뵈되 근래 사람들이 이런데 염려함이 적으니 이를 보았으나 일컬어 말할 데 없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허술이 넘기는 선비의 말은 뉘 채용하리오.
 
 

 
 
전복장수 포작이와 世情도 나누며 ...... 섬 가운데서 나는 물산은 전복, 홍합, 미역 따위들이 있어 매양 장날이면 벌여 놓은 것이 다 생선지속이요, 또 입는 것들은 무명, 모시, 베, 명주 다 있으되 풍속이 무명과 모시를 별로 더 숭상하고 명주는 드물게 한다 하더라.
 
읍촌 여인들이 치마를 물들이지 아니하고 입으니 물은즉
 
「물들이기 처리하기에 어려워 흰대로 입는다.」 하더라.
 
하루는 주인의 집에, 물 속에 들어가 전복을 따는 포작이 생복을 이고 왔거늘 내 종에게 사라 이르되 「불쌍한 포작이니 값은 달라는 대로 주라.」 하고 포작이더러 묻되
 
「네 어디서 살며 생복을 어디서 잡느냐?」
 
물으니
 
「저희 살기는 읍내에서 수십 리 떨어진 한 갯가에서 살고 생복은 물길로 오륙 십 리 혹 백여 리를 들어가 캐고, 멀리 갈수록 더 굵다.」 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르되
 
「생복 따는 거동을 본즉 포작이들이 겨울이라도 옷을 벗고 불 속에 개구리처럼 뛰어들어 물 속에 거처 없이 빠져 있다가 수식 경이 지난 후에 도로 나와 바닷물 위에 뒤웅박을 대고 엎드려 숨이 북받쳐 숨을 들이지 못하고 겨우 쉬어 즉시 또 들어가 따내어 오니 포작의 거동이 극히 불쌍하고 생복 하나의 값이 여러 냥 싸오니이다. 서울 양반님네 그런 일을 모르는 이가 많으시되 나으리는 불쌍한 줄 아시니 고마우시다.」
 
하더라.
 
원이 나와 보거늘 포작의 불쌍한 말을 일컫고 옛말을 일컬으되
 
「우리 계구 한공이 제주어사(濟州御史)로 갈 때에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니 나라에서 바닷섬 백성의 질고를 염려하시어 생복 따는 불쌍한 말씀을 누누이 일컫자오시어 옛 사람의 시에 이르되 소반 가운데 밥이 쌀낱마다 몹시 애쓴 것이라고 일렀으되 나는 밥상 가운데 생복이 낱낱이 몹시 고생한 것이라고 이르노라 하교하오시니 우리 성상이 구중궁궐에 계오셔 천리 밖 갯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백성들의 질고를 친히 보오시는 듯 이렇듯 하시니 방백(方伯) 수령(守令) 되는 이는 백성에게 가까운지라 더욱 청렴하려 하다.」
 
하니 원의 대답도
 
「그렇다.」
 
하더라.
 
금산에 사슴이 많기 때문에 이전에 본현의 녹용과 사슴의 머리통의 진상이 있어 매양 사냥할 적에 민폐가 자심하더니 칠팔 년 전에 어사 이휘중(李徽中)이 서계하여 녹용 잡는 폐단을 자세히 아뢰니 위에서 녹용을 공물로 바치게 하고 남해 진상을 말게 하시니 백성에게 성은이 미칠 뿐 아니라 은혜가 섬 속 짐승에게도 미쳤으니 중국 은나라 시조인 성탕(成湯)의 덕화 같자오다 이르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