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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三章 孤愁의 落島流謫地로서의 옛고장 (제3장 고수의 낙도유적지로서의 옛고장) - 悲運(비운)의 流配客(유배객)들 2

내용
悲運(비운)의 流配客(유배객)들 2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兪彦鎬(유언호)…… 본관은 기계(杞溪). 영조 3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교리 등의 벼슬에 있던 중 영조 47년 남해로 유배되어 유의양과 서로 위로해가면서 귀양살이를 보냈다.
 
그 유배동기와 연한은 알 길 이 없으나 그러나 사면된 그는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고 이조참의로 발탁되었고 이어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등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정조 5년에는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그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덕린(趙德隣) 사건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9년 만에 풀려나온 그는 다시 좌의정에 발탁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영돈영부사(嶺敦寧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 정조묘정(正祖廟庭)에 배향되었다.
 
 

 

尹蓍東(윤시동)…… 자는 백상(伯常)이요 호는 방한(方閒),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영조 20년인 1754년에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 정언 지평 등 벼슬을 역임 중 동 32년 당론을 운위하였다는 죄로 7년간 고향에 안치(安置)되었다가 동 38년에 풀려나와 제주목사(濟州牧師)로 등용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 좌승지에서 대사간의 벼슬까지 올랐으나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주장한 죄로 다시 추방되었다가 갑산으로 이배(移配) 동 48년에 사면되었다. 그러나 영조 52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또 당론을 거론하였다는 죄로 남해에 유배되었다.

 

1년 남짓 남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그는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발탁되어 10여 년간 활약하였으나 정조 12년 세 번째로 또 당론을 운위하였다는 죄로 삼화(三和)로 유배되는 등 3, 4차례나 추방 유배를 당하면서도 재삼 재기용되는 억세게 파란많고 관운이 끈질긴 사람이었다.

 

정조 19년에 이조판서 우의정 등 벼슬을 지내다가 1797년 정조 21년에 사거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