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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第三章 孤愁의 落島流謫地로서의 옛고장 (제3장 고수의 낙도유적지로서의 옛고장) - 바다는 푸르러 말이 없건만

내용
바다는 푸르러 말이 없건만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바다는 푸르러 말이 없건만
 
 
 
 
자암 김구(自庵 金絿) 선생이 화전별곡(花田別曲)에서 읊은 한 귀절처럼 우리 남해는 예로부터 비길 데 없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강산이 아름다운 일점선도(一點仙島)였다. 그러나 여조(麗朝)의 송경이나 이조의 한양 서울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하나의 낙도(落島)에 지나지 않았기에 오랜 세월을 두고 적지 않은 유배객(流配客)들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름난 배소(配所)이기도 하다.
 
오늘도 바다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이 고요하고 푸르러 말은 없건만 오랜 실로 오랜 성상(星霜)을 두고 뿌려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객(謫客)들의 단장(斷腸)의 피눈물을 머금어 왔었고 초목은 울창하여 산야는 평화로운 선경(仙境)이건만 인생의 무상(無常)과 기구(崎軀)한 운명을 슬퍼하는 그 얼마나 세찬 탄식의 여울 속에서 젖어 왔던가.
 
더우기 그들 대부분의 유배객들이 간악(奸惡)한 모함으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천리 먼 길 이곳 낙도까지 정배(定配)되어 온갖 신난만고을 치러야만 했고 망향(望鄕)의 노래를 부르다 못해 원한(怨恨)의 불귀객된 이 없지 아니하였으니 교향곡(交響曲)처럼 아름다운 저 송뢰(松籟)도 그들에겐 단장의 장송곡(葬送曲)처럼 구슬프기만 하였고 물새들의 노래 소리도 한스럽게 숨져간 원귀들의 넋의 호곡(號哭)처럼 애달프고 애통스럽게 들리기만 했던…… 우리의 옛고장은 그러한 고수(孤愁)와 비탄(悲嘆)의 귀양살이 섬이기도 하다.
 
유배지로서의 옛고장을 찾아들기에 앞서 유배형과 이조 12대사화(李朝 12大士禍)를 살펴보는게 이해에 도움될 것 같다.
 
 

 
 
流配刑의 由來……원래 유배형이란 죄인을 멀리 변경(邊境)이나 낙도 같은 곳에 보내어 일정한 형기 동안 그 배소에서 귀향살이를 시켰던 옛 형벌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가락국(駕洛國) 때부터 이미 이러한 제도가 있었던 것 같다. 즉 가락제 6대 좌지왕(坐知王)(407~421년)은 용녀(傭女)를 왕비로 삼고 있었는데 이 간사한 왕비의 제락으로 그녀의 친척무리들이 궁중과 조정에 많이 등용되어 드디어는 파당(派黨)을 일으키고 세력다툼으로 국정(國政)까지 위태롭게 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드디어 박원도(朴元道)의 간언(諫言)을 받아 들여 왕비 일파를 멀리 한산섬으로 귀양보내고 국정을 바로 잡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화(制度化) 된 것은 고려조부터이며 이조 오백 년에 걸쳐 전송(傳承) 되었다.
 
대저 고려조의 형벌은 태(笞)·장(杖, 곤장)·도(徒, 징역)·유(流, 귀양)·사(死, 사형)의 다섯 종류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유형은 배도(配島)라고도 하여 모반대역죄(謀反大逆罪), 악역불효(惡逆不孝), 근친살해(近親殺害) 등 중죄를 제외한 죄인들에게 적용 되었다.
 
그러나 이조에 이르러서는 비록 여조와 같이 사·유·도·장·태의 오종의 형벌이 있었으나 유형에 있어서는 그 형량(刑量)에 따라 상당히 세분되어 집행 되었다. 즉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귀양 보내는 장 1백 유 2천 리(杖 一百 流 二千里), 장 1백 유 2천 5백 리, 장 1백 유 3천 리, 장 1백 변원충군(杖 一百 邊遠充軍 - 변경의 군무에 복역케 함), 장 1백 정배(定配), 장 1백 원지정배(遠地定配), 변원정배(邊遠定配), 극 변정배(極邊定配 - 가장 먼 변경에 정배), 장 1백 절도정배(絶島定配 - 落島에 定配), 멸사정배(滅死定配 終身 無期定配) 등이 있다. 여기에서 유 3천 리라 함은 가장 먼 경상, 전라, 함길(咸吉 - 현 함경도), 평안 등 각 도 중에서도 가장 원거리 변경 낙도의 위치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렇듯 죄의 경중(輕重)은 형량(刑量 刑期)에도 있지만 그보다 지리상의 거리로 책정되었다.
 
유배형에도 또 여러 가지 차등이 있었다. 즉 부처(付處)는 3등 이하의 제목일 경우 조정에서 가장 가까운 도(道)로 유배를 시키면 그 지방의 장이 배소를 결정지어 주었다. 귀향(歸鄕)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가족과의 동거는 용납되었다.
 
보통 유배의 경우 배소에서 생활의 제한을 받지 아니함에 비해 안치(安置)의 경우는 일정한 장소에서의 거주 제한을 받는다. 특히 왕족 중신들의 정사범(政事犯)에 대해서는 일정한 위리(圍籬 -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유거(幽居)케 하는 위리안치(圍籬安置)와 탱자 같은 가시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만 기거케하는 가극안치(加棘安置)가 있으며, 또 본인의 향리에서 유거케 하는 본향안치(本鄕安置)와 멀리 떨어진 낙도에 보내는 절도안치(絶島安置), 먼 변경에 보내는 극변안치(極邊安置) 등이 있다. 또 변경충군이라 하여 멀리 국경 근처에 보내어 군무에 복역케 하는 유형도 있었다.
 
 

 
 
十二大士禍……유배형은 특히 이조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사색당쟁(四色黨爭)의 계략과 보복 수단으로 상대방을 모함하여 강자가 약자를 악덕자가 선자(善者)를 멀리로 내몰아 쫓는 일종의 정치 방편(政治方便)이 되고 말았다. 가장 처열(凄烈)하고 규모가 컸던 1498년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1504년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 1519년 중종 14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 명종 원년의 기사사화(己巳士禍)를 들어 이조의 사대사화(四大士禍)라 일컷거니와 이 밖에도 단종 원년의 계유사화(癸酉士禍), 세조 2년의 병자사화(丙子士禍), 연산군 12년의 병인사화(丙寅士禍), 중종 16년의 신사사화(辛巳士禍), 명종 2년 정미사화(丁未士禍), 광해군 5년 계축사화(癸丑士禍), 숙종 15년 기사사화(己巳士禍), 경종 1·2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등 8개 사화를 포함해서 이조 12대 사화라 일컬어 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색당쟁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여 무고(無辜)한 충신들도 헤아릴 수 없이 연루(連累)되어 혹은 사약을 받거나 능지처참(陵遲處斬) 아니면 변경이나 낙도에 멀리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무도(殘忍無道)하고 또한 어처구니없는 보복 또는 모함으로 이루어졌던가를 말해 주는 들어 보기로 하자.
 
본관이 옥천(玉川)이고 선조 1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에 올라 지방을 순찰하던 남인 조대중은 도중 정이 깊이 들었던 관기와 부안(扶安)에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어 석별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때는 선조 22년(1589년) 때마침 정여립(鄭汝立)의 모역 사건(謀逆事件)으로 죽도에서 자진(自盡)한 그의 시체를 서울로 끌어 올려 능지처참하는 등 민심이 매우 어수선하고 흉흉한 때였다. 서인들로부터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대중이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는 모함으로 조대중은 정여립 일파로 몰려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오비이락격(烏飛梨落格)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허무한 일이었다.
 
또 두 번째로 우리 남해에 유배되어 온 숙종 노론 사대신(老論 四大臣) 중의 한 사람인 서인(西人) 소재 이이명(疏齋 李頤命)은 서당을 차려놓고 높은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높은 학문과 덕을 사숙(私淑)한 향토 일류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들 두고 남인 측 목호룡(南人側 睦虎龍) 등이 이 이명이 남해 배소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하여 사약(賜藥)을 받았다. 후에 그것이 부질없는 모함임이 밝혀져 목호룡은 장살(杖殺)되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이처럼 당쟁은 무법이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政敵) 제거에만 광분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이조때의 유배지로서는 제주, 거제, 남해, 진도, 강화, 흑산도, 백령도, 추자도 등 주로 서·남해의 낙도가 많이 이용 되었고 극변 배소로는 영월, 박천, 영해, 하동, 거창 등 비교적 원변벽지(遠邊僻地)가 지정되고 있었다.
 
 

 
 
南海島의 謫客들……우리 남해의 경우 고려조로부터 이조 5백 년 동안에 걸쳐 적지 않은 유배객들이 정배된 것으로 추측되지마는 사료(史料)를 얻지 못하여 명확한 숫자나 개항을 엮을 수 없음이 유감이라 하겠다. 그러나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충 파악된 근 30명의 유배객들을 살펴보건대 2명의 왕손을 비롯하여 여조상당군(麗朝上黨君) 이조영의정(李朝領議政) 이조판서(吏曺判書) 직제학(直提學), 대사헌(大司憲) 등 왕족 귀인 고관대작들이 귀양살이로 우리고장을 거쳐갔고 그중에서도 성종의 4대손인 이성란(李誠蘭)을 비롯하여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의 작자인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이조판서 유명현(吏曹判書 柳命賢) 등은 끝내 풀려나지 못한채 불귀객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유배의 동기 즉 정치적 배경(政治的背景)을 살펴보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은 인목대비를 폐하려는 대북파(大北派)의 주장에 반대한 폐모론반대와 기사환국으로 유배된 사람이 각각 4명씩으로 가장 많고 그 밖에 기묘사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갑무옥사(甲戊獄事) 등으로 되어 있다.
 
폐모론은 선조 35년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대북파(大北派)의 제창으로 써 이는 광해군 4년에 일단 마무리 지어진것 같았으나 이듬해의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영창대군이
서인(庶人)으로 격하(格下) 되어 그 이듬해 살해되자 대북파인 이이첨, 정인홍(李爾瞻 鄭仁弘) 등은 이항복(李恒福) 등의 반대를 일축하고 다시 폐모론을 주청(奏請) 마침내 대비는 서인(庶人)이 되어 서궁에 유폐되고 이 폐모론에 반대하던 왕손  이성란을 비롯한 김덕성, 정택뢰, 조직(金德誠 鄭澤雷 趙 稷) 등이 남해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기묘사화는 1519년 중종 14년에 집권한 조광조(趙光祖) 일파가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는 등 반대파인 정국공신(靖國功臣) 심정 남곤(沁貞 南袞) 등 76명의 훈구파(勳舊派)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자 분격한 훈구파는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교란한다」 「공신의 삭훈(削勳)으로 왕실의 날개를 꺾어놓고 장차 모역(謀逆)을 꾀하고 있다」는 등 탄핵으로 일대 역습으로 나섰다.
 
그리고 궁정안의 나무잎에 벌레들이 좋아하는 벌꿀 물같은 것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한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해 두었다가 벌레가 파먹은 그 잎사귀를 따모아서 왕에게 바쳐 조광조가 장차 왕되기를 모역하고 있다고 모함함으로써 결국에는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는 한편 그 일당을 각처에 유배시켰다. 이 기묘사화로 자암 김구(自庵 金絿)가 남해에 유배되었던 것이다.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은 명종 2년 소윤파 부제학 정언의(小尹派 副提學 鄭彦懿) 선전관 이로(宣傳官 李櫓) 등이 대윤파의 잔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층인 자파를 비방하는 불온 벽서를 스스로 써서 이를 양재역에다 붙여놓고 송인수, 이약수(宋麟壽 李若水) 등 대윤파의 소행이라 탄핵하여 그 잔재 정적들을 거세한 조작극이다. 이 사건으로 봉성군 완(院)과 송인수 등 대윤파의 중진들은 사사(賜死) 되고 그 중 김만상(金萬祥)이 남해로 유배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1689년 숙종 15년 소의(昭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뜻을 서인인 송시렬(宋時烈) 등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고 나서자 남인들은 ‘호기일실(好機逸失)’이라 이 기회를 포착하여 일제히 숙종의 뜻을 업고 서인을 탄핵하기 시작하여 일어난 옥사이다. 이로써 서인측의 김수항, 송시렬(金壽恒  宋時烈) 등은 사사되었고 김만중, 이휘명, 심권(金萬重, 李徽明, 沈權) 등이 연누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2년 후인 숙종 18년에는 이이명(李頤命)도 천배(遷配) 되었다. 또 갑무옥사는 1694년 숙종 20년, 실각되었던 서인(老論派)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 복위를 꾀하자 남인들이 이를 계기로 서인들의 뿌리를 뽑고자 노론파를 탄핵하기 시작함으로써 일어났다. 그러나 내심 인현왕후의 폐비를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오히려 남인들의 처사에 진노(震怒)하여 그들을 사사 또는 유배로 제지해 버렸다.
 
이 갑무옥사로 남해에서는 기사환국으로 귀양살이하던 이이명, 심권 등이 풀려나가고 남인인 권대운(權大運)이 유배되어 오는 등 희비극이 연출되었다. 더우기 이이명은 김만중의 애서(愛婿)-사위로서 병부와 사위가 같은 옥사로 연차는 있으나 같은 고장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고려조부터 이조에 이르는 사이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던 비운의 유배자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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