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직대사(嘉直大師)의 삼송(三松)…… 지금 서면 남상리와 중리 노구리에 각각 한 그루씩 수령(樹令) 2~3백 년을 헤아릴 만한 노송(老松) 세 그루가 있다. 전설은 옛날 향토 태생인 가직대사(嘉直大師)에 의해서 심어졌다고 하여 이를 가직대사의 삼송(三松)이라 부르고 있다.
가직대사는 영조 23년(서기 1747년) 운흥(雲興) 지금의 남상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송학당(松鶴堂)이요 법명은 嘉直 또는 가직(可直)이라 하였다. 가직대사는 어릴 적부터 지력(智力)이 비범(非凡)하였다고 한다.
일찌기 불계에 뜻한 바 있어 입산 수도로 전전(轉轉)하면서 포교에 헌신하다가 구순(九旬, 90세)에 입적(入寂)할 때까지 남해 화방사(花芳寺)를 비롯한 삼남 일대를 무대로 삼아 포교(布敎)하여 사찰은 물론 속세에도 공헌한 바 지대하여 곳곳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져 있다.
향토가 낳은 불계의 거승 가직대사의 얼이 깃든 삼송은 군민의 두터운 보호 아래 무성하고 있는데 수고(樹高)는 5미터에서 7미터이며 둘레는 평균 2미터에서 3미터에 이르는 거송들이다. 군민들은 이 삼송을 통해서 그 유덕(遺德)을 추앙(追仰)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가직대사가 전라도 무주지방을 지날 때 때마침 혹심한 가뭄이라 농군들이 평소 고명하다고 알고 있는 대사에게 지하수원을 캐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주위를 한번 살펴본 대사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면서 이 나무를 베내고 그 자리를 파면 반드시 물을 얻으리라 교시(敎示)하였다.
기쁨에 넘친 농군들이 거기를 파보았더니 뜻밖에 깊숙이 반석(盤石)이 깔려 도저히 그 이상 파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실망한 농군들은 입에 못 담을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러나 대연자약 연실색하여 혹시 정신이상이 아닌가 하고 비한 대사는 어서 샘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둘레에다 축담하라고 재촉하였다.
모두들 아 웃으면서도 샘달을 쳤다. 대사는 무엇인가 암송(暗誦)하면서 철장(鐵杖·쇠지팡이)으로 반석을 몇 번 두드리니 그 반석이 뚫어지면서 세찬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농군들은 이 신기(神技)에 놀라 어리둥절하다가 함성을 터트렸다. 이 샘물로 음료수는 물론 농사까지 풍요하게 지어먹게 된 농군들은 스스로 뜻을 모아 세운 것이 지금 무주 용담(龍潭)에 있는 송덕기념비(頌德紀念碑)의 유래라고 한다.
또 한가지 전해지고 있는 일화(逸話)는 술잔의 술방울을 튕겨 먼 곳에서 불타고 있는 화재를 진화시켰다는 도술 이야기이다.
가직대사는 화방사에서 불사(佛事)하였는데 하루는 화방사에서 연회가 베풀어졌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어 갈 때 술을 마시고 있던 대사는 갑자기 안면이 긴장되면서 북쪽을 향해 마시던 술잔의 술방울을 몇 번 숟가락으로 튕겼다.
심상치 않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무슨 사연이냐고 묻자 태연히 남은 술잔을 비우면서 「하동 쌍계사(雙磎寺) 칠불암(七佛菴)에 불이 났으나 이제 불길을 잡았으니 안심들 하고 술이나 마시라」는 대답이었다.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즉시 알아 보았더니 과연 그 시각에 칠불암에 불이 일어났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순식각에 불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이토록 가직대사는 도술에 능하여 풍운조화(風雲造化)를 마음대로 이루었다고 한다. 그 일부는 고사간에 가직대사는 신기하리만큼 도통(道通)한 대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