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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二章 仁義禮智 심어준 賢人들(제2장 인의예지 심어준 현인들) - 三南의 巨儒 鄭希輔 先生 (삼남의 거유(큰 선비) 정희보 선생)

내용
三南의 巨儒 鄭希輔 先生 (삼남의 거유(큰 선비) 정희보 선생)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三南의 巨儒 鄭希輔 先生

(삼남의 거유(큰 선비) 정희보 선생)

 

 

 

雲谷祠……서면 중현리에 있는 운곡사는 三南의 거유(巨儒)인 당곡 정희보 선생을 봉안하고 있는 사우이다. 그 출생년도는 미상이나 선생이 이동면 초양리에서 출생하여17세때 함양군 수동리 당곡으로 이거(移居)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당곡 선생은 주정학(朱程學)을 깊이 연구하여 이를 널리 개척한 삼남의 대선각자(大先覺者)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를 누차 종용(慫慂)하며 초빙하였으나 완강히 이를 거부하고 후학지도에만 생애를 바쳤다.

 
그리하여 후일 거유로 이름을 떨친 노옥계 소양곡 이청련 양구졸 강개암 오덕계 같은 학자들을 그 문헌에서 배출하였다.
 
노옥계는 후일 당곡선생의 묘지명(墓誌銘)에서 — 湖嶺之眞 半是門人 功存啓後 萬古不朽 — 라 하였다. 즉 영호남 지방의 공경받을만한 학자들의 태반이 선생의 문하생이므로 그 어른이 남긴 공적은 만고(萬古)에 빛날 것이라는 것이며 운곡정사기를 쓴 조극섭은 문헌(文獻)은 곧 선생의 향리(鄕里)이며 그 높고 깊은 학문과 덕(德)으로 문헌의 새 세대를 열어주었다고 추앙하였다.
 
이어 그는 선생이야 말로 황무지를 일구어낸 선비중의 선비로서 그 어른과 같은 분은 아마도 백년을 두고도 다시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경탄했다.
 
이 운곡정사는 원래 순조(純祖) 2, 3년경(서기 1802, 3년) 그의 덕을 추앙하는 남해 유림들에 의해 세워져서 당곡선생을 봉안해 내려왔으나 약 50년이 지난 철종계축년(서기 1853년)경에는 너무 낡고 크게 허물어졌으므로 정양기 이기준 등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 합심해서 그 자리에 새 사우를 신축하였던 것으로 운곡 정사기에 밝혀져 있듯이 이 사당에서 당곡선생의 도(道)가 널리 강(講)해져 왔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雲谷精舍記 …… 극섭이 함양에서 듣기로 정당곡선생은 덕이 깊으시고 학문이 높으신 당대의 사표(師表)였다. 저 노옥계하며 양구졸 강개암 등 이른바 거유(巨儒)들도 모두 선생의문하에서 배워 말하건대 이름난 유학자로 대성하였다. 그러므로 문헌(文獻)은 곧 선생의 향리(鄕里)이며 그 높은 학문으로 황무지를 일구어 문헌의 새 세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 문헌의 새 세대로부터 과히 오래지 않기 때문에 그 유품이 아직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받들어져 있다. 근래에 남해 유림인 정양이 이기중 등 선비들이 서책과 문서들을 가지고 연이어 집으로 찾아와서 우리 남해는 선생이 탄생하신 곳이라 사당까지 세워 모셔오고 있으나 그 연조가 오십년이나 되니 사우가 낡고 무너졌기에 모두들 서로 합심하여서 그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운곡정사라 하여 거기에서 장차 당곡선생의 도(道)를 강(講)하고자 한다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미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그 전말(顚末)을 잘 기록해 두고 있는 지라 소청을 받아 글을 쓰려 하니 더 이상 쓸 것이 없어 심히 난처할 지경이므로 여기 몇 마디 소회를 적는 바이다.
 
마음 아프도다. 남해군은 멀고도 황량한 곳이라, 비록 중흥의 좋은 때를 만나 그 문물의 혜택을 입고 머지않아 서 밝고 평화로운 때가 오려니 그때면 어찌 선생을 두고 호걸다운 선비라 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오늘날 대륙은 이미 침체되어 있으나 다행히 중부 이북지방은 예로부터 문명의 고장이라 일컬어지고 있으니 옛 선비들이 공자님을 쫓아 먼 노(魯) 나라까지 넘나들 듯 남해 유림들도 시경을 넘어 선생의 학문을 되쫓을 것인가. 모름지기 선비들은 서로 배워 형동하고 또 선현(先賢)들의 높은 덕을 배워야 할지니 매우 황폐한 곳이라 이러한 도(道)를 닦기란 마치 요란스런 소음속에서 참 소리를 들으려는거와도 같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선현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쫓아 그 학문과 덕의 진수(眞髓)를 배워야 할지니라.
 
살피건대 장차 백년을 두고도 선생과 같은 분이 또다시 나타날 수 있으랴. 만약 이 사당에서 선생의 학문을 추려 강(講) 한다면 누구나 그 높은 학문앞에 고개 숙일 것이요 또 거슬러 올라가 일찍기 선생의 거소를 찾아보지 못했던 군자들의 가슴 깊이 사무쳤던 소망일 것이다.
 
정사년 추계 (正祖二十一年 서기 一七九七년) 가을
창산 조극섭 씀.
 
 

 
 
雲谷精舍記 (운곡정사기) 원문
 
競慶 少聞咸陽 有鄭唐谷先生心潛德輿學 爲一時師表 諸嘗學於先生者 如 盧玉溪梁九拙
姜介庵諸賢 皆以名儒 稱焉 竊以爲成 故文獻先生鄕也 自文獻之世 至鄭先生未久 遺風 尙
不斬 宜其所斯設 日 南海士人鄭君睗驥 李君基俊 以其鄕中諸章甫書 北走四百里踵門而告
曰 吾鄕舊有鄭先生祠 以先生之生 實在茲土也 祠毀而鞠 且五十年矣 某等 相與合力 以築
一舍 于其地 胃祠之故號而顔之曰雲谷精舍 將以時念于時而講先生之道焉 幸子之無惜一 言
以爲記兢變 發書而難曰 嗟乎 南海之爲邑 褊遠荒 阻雖當隆化之時 聲明文物之被 常後
于中土而先生 乃奮起於是 其不可謂豪傑之士也哉 然 今大陸已沈 中州北方古所謂文明支區
日趨於椎魯而玆邑四境 絃誦相達 又能知慕前賢 不忍荒廢其地如此則因響求聲 循名責之
之 將於是乎百 世之下 安知不有如先生者 相輩而岀乎 是可以記也 若夫所講之道則有先生
之緒言可抽而降 又能溯而上之 以尋先生之所未盡得者 是則區區所望於諸君子者也已
歲丁巳季秋朔昌山曹兢燮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