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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二章 仁義禮智 심어준 賢人들(제2장 인의예지 심어준 현인들) - 원종이등공신 이희급 (原從二等功臣 李希伋)

내용
원종이등공신 이희급 (原從二等功臣 李希伋)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원종이등공신 이희급 (原從二等功臣 李希伋)

 

 

난곡사 군자정(蘭谷祠 君子亭)… 이동면 난음리 지금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을 뫼시고 있는 난곡사 군자정에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의병을 이끌고 진도 벽파진(珍島 碧波津)까지 나아가서 이충무공을 도와 왜적과 만신창혼으로 싸우다가 순절한 우리 향토의 순국선현 난계 이희급(蘭溪 李希伋) 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선생은 이 전공으로 원종이등훈록(原從二等勳錄)에 오른 유일한 향현이다.
 
공은 장수인(長水人)으로서 자는 중사(仲思)요 명종 8년 계축년(서기 1553년)에 당시의 난양촌에서 태어났다. 세종조(世宗朝)에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서 일본 대마도의 왜구 본거지를 정토(征討)한 바 있는 양후공 이종무 장군(襄厚公 李從武 將軍)의 6대 후손이 된다.
 
난계선생실기(蘭溪先生實記)에 따르면 선생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훌륭할 뿐 아니라 학문을 좋아하여 선조 병자년 23세에 중성균생원(中成均生員)이 되었다. 이어 계미년 서기 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 正字) 저작박사(著作博士)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개녕(開寧 - 경북 김천) 현감을 거쳐 1594년에 함양현감(咸陽縣監)으로 옮겼다. 그 치정(治政)은 간엄(簡嚴)하면서도 치밀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략(軍略)을 익혀 외적에 대비함을 잊지 아니하였다.
 
정유왜란으로 왜적이 서해안 일대에 창궐(猖獗)하여 전세가 더욱 위태로워지자 관직을 떠난 그는 의병을 모았다. 서로 피를 나누어 마시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한 그는 의병을 이끌고 진도 벽파진(碧波津) 싸움에 참전하여 이 충무공을 도와 싸웠다.
 
이 충무공은 잔군(殘軍)을 수습하여 적과 싸웠으나 왜적은 330여척의 대함선단으로 아군을 포위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세가 아군에게 불리해지자 장수들 중에는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자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는 직접 전고(戰鼓)를 치며 독전하였다. 만신창홍(滿身槍痕)으로 신발에까지 피가 흥건히 흘러내린것도 모르고 싸웠으나 적은 무서운 파도처럼 좀처럼 물러설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유년(宣祖 30年 서기 1597년) 9월 16일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비록 수군장(水軍將)은 아니었으나 벽파진 싸움이 전부터 이 충무공과 특별히 친숙하고 긴밀한 군사적 연결이 이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충무공이 그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공의 부친(父 仁忠)의 신상에 대하여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 특기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즉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1일자(1597년)에....
 
「새벽 2시쯤에 비가 뿌리고 폭풍이 크게 불어서 배를 띄울 수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밤 열시경 중군장 김응함(金應諴-당시 남해 미조항 첨사)이 와서 해남에 있는 적들이 퇴각한 헌적이 많다고 전했다. 이희급의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빠져나왔다고 한다.」(李希伋父爲賊所擄而自報來之) 후략
 
동 11일자 전략 이희급의 부친이 찾아와서 사로잡혔던 경위를 이야기하는데 마음 아픔을 견딜 수 없다(李希伋父來論被擄報踏不勝痛) 
 
난중일기에는 주로 군사적인 사항만 기록되어 있다. 7년간의 일기를 통해서 민간인의 신상이나 사건에 언급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의 부친이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지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알길이 없으나 「이희급부」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와의 평소의 친숙한 정으로 그 부친을 심려했던 나머지 이렇게 기록하기에 이르런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이 점 향토 후학들의 깊은 관심과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끝으로 난계선생실기(蘭溪先生實記)를 참고로 첨부해 둔다.
 
 

 
蘭溪先生實記 (난계선생실기)
 
先生 姓 李氏 諱 希伋 字 仲思 號 蘭溪 長水人 麗朝 平章事 長川府院君 諱林幹之八世
孫也皇明嘉靖三十二年 癸丑 先生 生于南海縣蘭陽村 第幼而聰穎不群 以孝行聞於鄕閭
及長學問大進 宣祖丙子 中成均生員 癸未登科 爲承文院正字 著作博士 行司諫院正言 甲
午出宰咸陽 治政簡嚴 且精諳武 略居官 以鍊軍給 餉爲防敵之急 丙申進歸 郡人 不忘遺
愛立碑 時龍蛇之變 荐及丁酉 尤爲猖獗 以本道從事 卽募義赴戰 飮血誓師 以身爲倡北
胃刃轉鬪至珍島碧波津 李統制使舜臣 收拾殘軍 勢方孤危 而賊船三百三十餘隻 匝擁我諸
船諸將自度衆寡不敵 便生回避之計 先生手執桴波方挑戰而不覺滿體受創 流血及履鯉 浪
沸騰敵不歸元 是丁酉九月十六日甲辰也 萬曆三十三年己巳 錄原從二等勳而降給錄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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