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장군 승첩석탑(鄭地將軍 勝捷石塔)... 이곳 옛 고을 사람들이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정지 장군의 은공을 기리 추앙(追仰)하고자 손수 돌을 갈고 다듬어서 세운 정지장군 승첩탑이 5백 년을 두고 고스란히 간직되고 있다. 보은(報恩)의 구름다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승첩비는 고현면 대사리 탑동에 있다.
이 탑은 우왕 9년 서기 1383년 5월 이곳 앞바다인 관음포(觀音浦)에서 수백 년을 두고 온갖 만행(蛮行)으로 향토를 괴롭혀 내려오던 왜구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고 향토를 구제해 준 지 장군의 승전과 은공을 기리 축송(祝頌)코자 이 고을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하여 이 석탑은 예술적(藝術的)인 면으로 볼 때 우아(優雅)한 미(美)는 찾을 수 없으나 그러나 향인들의 정성과 고마움에서 손수 만들어 세운 것으로 조상들의 얼과 입김이 풍기는 소박(素朴)하고 정감(情感) 어린 우리 고장의 하나이다.
정지 장군은 본관(本貫)이 나주(羅州)로서 충목왕 3년 서기 1347년에 탄생했다. 이무렵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는 1350년에 는 남해안의 고성(固城), 거제(巨濟) 등지에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했으며 1315년 11월에는 우리 향토도 유린했다. 고려사(高麗史) 권 57 적기(摘記)에 「현종 9년 남해는 현령에 의해 설치되었으나 공민왕 7년 왜구에 의해 실토(因倭失土) 되었으며 난포현(蘭浦縣—二, 三東面 一帶)도 왜구의 침략으로 망하고 말았다. (後因倭寇 人物俱亡) 평산현(平山縣) 또한 왜구 때문에 주민하며 모든 생물까지 전멸하고 말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을 두고 우리 조상들이 왜구들에게 처참한 고통(苦痛)과 시달림을 받아왔던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중랑상(中郞將)에 오른 정지 장군은 공민왕 23년 서기 1374년 왜구평정책(倭寇平定策)을 상주함으로써 전라도 안무사(全羅道按撫使)가 되어 왜구 격파에 나섰다. 그 전공으로 다음 해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 1380년에 원수(元帥), 1381년에 밀직 해도원수(海道元帥)에 오른 정지 장군은 1383년 5월 우리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우리 향토의 위기는 물론 국난(國難)을 극복평정(克服平定)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貢獻)을 하였던 것이다.
정지 원수는 해전에서는 처음으로 화약(火藥)를 사용하여서 전함(戰艦)을 구사하여 왜구를 격파 모조리 수장함으로써 두 번 다시 서·남해안을 넘어다 보지도 못하게 했던 것이다.
더우기 정지 원수가 왜구를 격파하고 승리했던 관음포 앞바다 바로 여기가 215년 후인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무찔러 나라를 건지고 순국하신 곳이라는 데 감개 더욱 무량한 바 있다. 우리 고장이 이토록 슬기로운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승첩(勝捷)의 성역(聖域)을 간직하고 있음에 다시 한번 긍지를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
관음포에서 대전공을 세운 정지 장군은 그 논공(論功)으로 해도원수 양광 전라 경상 강릉도지휘처치사(海道元帥 楊廣 全羅 慶尙 江陵道指揮處置使)에 올랐다. 왜구들이 서남해안을 피해서 산발적으로 동해안에 출몰한다는 보고를 받은 정지 장군은 수동적(受動的)인 대응책(對應策)보다 그 뿌리를 뽑아버리기 위해서 창왕 원년 서기 1389년 경상도 원수 박위(慶尙道元帥 朴葳)로 하여금 전함 백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의 왜구 본거지를 정벌케 하여 큰 전과를 거두게 하였다.
서기 1388년 우군도통사인 이성계가 공요(攻遼) 길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죽이는 등 풍운이 긴박한 고려조 붕괴 전야(高麗朝 崩壞前夜)에 김여옥사(金佇獄事)에 관련되어 한때 유배되었다가 개성부사(開城府事)로 임했으나 1391년에 애석하게도 병사하였다.
(현북 20리 관당 길목에 높이 10여 척에 이르는 탑이 있다. 이는 고현 때 처음 축조된 것이다. 탑에서 1리쯤 떨어진 관음포 바다는 여말 원수 정지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곳이며 이곳은 또한 선조조에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을 대격파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간혹 사철이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