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사(武愍祠)... 삼동면 미조리 유서 깊은 미조성지(彌助城址)에 자리 잡고 있는 무민사(武愍祠)는 우리 남해 선인들이 경모와 추앙의 일념에서 기리 모셔 내려온 여말의 용장 최영(勇將 崔瑩) 장군을 봉안하고 있다.
옛부터 전해온 설화(說話)에 의하면 4, 5백 년 전에 미조 앞바다에 떠내려온 상자(箱子) 속에 최영 장군의 영정(影幀)이 들어 있어 처음에는 초당을 짓고 영정을 모셔왔는데 당시의 미조첨사(彌助僉使)가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새 당사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이 설화를 전연 근거 없는 이야기로 단정할 만한 사료도 없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처지거니와 최영 장군의 전적(戰迹)으로 미루어 보아 필시 남해 근해에서 왜구를 쳐부수고 누란의 위기를 모면(謀免)케 하여 준 높은 은덕을 흠모하고 그 충국정신을 숭앙한 나머지 장군을 여기에 뫼시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해도원수 정지장군(海道元帥 鄭地將軍)과 같이 향토의 은인(恩人)으로서 보은의 일념에서 뫼셔 내려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고려 중엽부터 우리 서·남해안 지방을 침공하여 온갖 약탈과 방화와 살상 등 만행을 자행하는 왜구들의 세력은 해가 거듭됨에 따라 그 규모가 확장되고 침공의 횟수도 격증(激增)되었다. 그 중에서도 1358년의 전라도 해안지방, 1361년의 남해안지방, 1380년의 남해안에 침입하여 육로로 상주(尙州) 선산(善山) 지방까지 침범(侵犯)하였고 1381년에도 남해안 일대에 재차 침입하여 온갖 구략(寇掠)질을 다 했다. 이어 1383년 5월 대규모로 우리 남해에 침공한 왜구를 당시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관음포에서 이들을 대격파하여 왜구를 멸종(滅種)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때 최영 장군은 양광전라왜구체복사(楊廣全羅倭寇體覆使)를 거쳐 해수도통(海水都統)에 임하여 정지 함대를 지휘하여 남해의 위기를 구제하는 데 참여하였던지라 향토민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장군은 고려명신(高麗名臣)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으로 충숙왕 4년 서기 1317년에 태어났다. 정지 장군에게는 약 30년 선배가 되고 이성계(李成桂)와는 18년 거유(巨儒) 백이정(白頤正)과는 4, 50년 후배격이다. 일찍이 원나라로 건너갔다가 공민왕 4년 서기 1355년에 권겸(權謙), 인당(印璫)들과 함께 귀국한 장군은 4년 후인 공민왕 8년에 병력 4만을 이끌고 침공해온 모거경(毛居敬)의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켜 첫 수훈(殊勳)을 세웠고 동안 양광 전라도 왜구체복사가 되어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를 넘나드는 왜구들을 격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공민왕 10년 서기 1361년 적군(賊軍)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한 반성(潘誠), 사유(沙劉) 등 제2차 홍건적을 격파한 장군은 서기 1364년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역적 최유(逆賊 崔濡)의 반군(返軍)을 정주(定州)에서 대파한 공으로 1370년에 육도 도순찰사(六道 都巡察使)가 되었다.
이무렵 등경광(藤經光)을 괴수로 하는 왜구들의 약탈이 격심해져서 서·남해안 일대가 진토화(塵土化)됨에 이르자 장군은 다시 해수도통에 올라 삼남지방을 순찰하면서 독전지휘(督戰指揮)로 왜구격멸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장군이 해수도통이 된 1380년 9월 이성계는 운봉(雲峰) 등지에서 상륙했던 왜구들을 대파하는 등 여말에 창궐(猖獗)하던 왜구는 결국 최영, 정지, 이성계 등 삼용장(三勇將)에 의해 괴멸(壞滅)된 것이다.
우왕 14년 서기 1388년에 이루어진 대개각(大改閣)으로 최영 장군은 문하시중(門下侍中—首相格)에 오르고 이성계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副首格)이 되었다. 친원파(親元派)인 최영은 왕과 밀의하여 원(元)을 도와 요동(遼東)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이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그 밑에 이성계를 우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좌우군 3만으로 원정(遠征)을 떠났는데 천명과(親明派)인 이성계의 돌연한 모반회군(謀反回軍)으로 공료계(攻遼計)는 와해되어 드디어 왕은 폐위(廢位)되고 최영 또한 12월에 이성계에 의해서 피살되는 비참한 종막(終幕)이 내려지고 말았다.
예로부터 흥망은 유수(有數)라 일컬어졌거니와 최영 장군처럼 홍망의 물결에 밀려 그 용장다운 회포를 끝내 못다 풀고서 아깝게도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장군은 형장에서 처형(處刑)을 당하면서도 태연자약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남겼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내가 죽고 난 뒤 내가 평생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탐욕이나 어떤 불의의 마음을 먹은 일이 있었다면 나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자신 있게 자기를 밝혀낸 말인가. 과연 그의 무덤에는 봄이 와도 풀이 돋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무덤을 붉은 흙으로 덮여진 무덤이라 하여 적분(赤墳)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경기도망 벽제(碧蹄)를 지나 문산(汶山)으로 가는 길목 허술한 산기슭에 있는 장군의 유택(幽宅)은 그의 결백을 말해주듯 말없이 붉은 흙으로 덮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