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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第二章 仁義禮智 심어준 賢人들(제2장 인의예지 심어준 현인들) - 李忠武公戰沒遺墟와 忠烈祠(이충무공 전몰유허와 충렬사) 2

내용
李忠武公戰沒遺墟와 忠烈祠(이충무공 전몰유허와 충렬사)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柳成龍 懲毖錄 露梁海戰原文 拔萃
(유성룡 징비록 노량해전 원문 발췌)
 
 
(前略) 十月劉提督 再攻順天賊營 統制使李舜臣以舟師大敗其救兵於海中 舜臣死之 賊將 平行長棄城而遺 釜山蔚山河東沿海賦屯悉退時 行長築城于順天 芮橋緊守 劉綎以大兵 進攻不利 還順天旣而復進攻之 李舜臣與唐將陳璘把海口以遏之 行長求援於泗川賊 沈安頓吾 煩吾從水路來援 舜臣進擊大破之 賊船二百餘艘 殺獲無算 追至南海界 舜臣親犯矢石 力戰有飛丸中其智出背後 左右扶入帳中 舜臣曰 戰方急愼勿言我死言 訖言而設 舜臣兄子莞素有膽量秘其死 以舜臣命旗戰 益急軍中不知也 陳璘所乘舟爲賊所圍莞 望見揮其兵救之 賊散去 璘使人于舜臣謝 救已始聞其死 從椅上自投於地曰 吾意老耶生來救我 何故亡耶 府軍大慟 一軍皆哭聲震海中 行長棄舟師 迫賊過其營 自後逸志 先是七月 倭魯平秀吉已死 故沿 海賊屯悉退 我軍與唐軍聞舜臣死 連營慟哭 私親概行 所至人民處處設祭 挽車而哭曰 公實 生我 今公棄何之 通路擁塞 車不得進行路之人無不 渾涕 贈議政府右議政 邢軍門謂當立祠 淘上以獎大忠魂 畢竟不行 於是 海邊之人 相率爲祠 號曰 愍忠 以時致祭 商賈漁船 往來過其下者 人人祭之云 ...... (以下略)
 
 

 
 
관음포 이충무공 표충비문
유명수군도독 조선국삼도통제사 증
의정부 영의정 시 충무이공 순신유허비 (앞면)
 
 
 
남해현에서 북쪽으로 20리쯤 나가면 바닷물결이 넘실거리고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곳이 있어 이를 관음포라 일컷거니와 이곳이 곧 삼도수군통제사이며 의정부 영의정 충무 이공께서 순국한 곳이다. 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구를 대파하므로써 바다에서는 왜구들의 그림자 조차 찾아볼수 없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20여년전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했던 것이다. 아! 임진란은 실로 동방의 양구로 일컬어 짐만큼 큰 재액(災厄)이었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공과 같은 이가 있어 이윽고 사직을 지켜내고 나라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때 이미 명정(銘旌)이 내려지고 사록(史錄)에도 올랐거니와 슬퍼할지고 그 빛나는 공을 천지가 넓다한들 어찌 모두 이를 채워 내리요. 그 충용의 명성은 널리 명나라까지 떨쳐 마치 우주를 비치는 달과 별처럼 장대하고 혁혁하였다. 이처럼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충무공을 으뜸으로 숭앙하는 것은 공은 쓸모없는 허약한 군사로 백만대군의 적을 물리친 거의(注 賈誼 前漢의 孝文帝 때 武將) 이상으로 바다를 막아 간성(干城)을 지켜낸 어른이었고 또 장수양 처럼 한때 전세가 역전되어 종횡무진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작전으로 적을 섬멸함으로써 후환을 남기지 않은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또 주군처럽 극소수의 군사로써 최강적과 대전 승리를 거둠으로써 만방에 국위를 떨쳤고 한몸 내던져 국가의 안위를 구출한 악무목(注-宋나라 忠臣 악비의 시호)이나 역경속에서도 태연히 국난을 이겨낸 곽문양(注 위나라의 郭淮) 이서평 이상의 공훈과 덕을 빛내었던 것이다.
 
공은 언제나 위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혔고 부하장병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나라를 위해 자신이 앞장서서 죽을 결심임을 천명하여 그를 따르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흔히 공을 제갈무후와 같은 용장이라고들 비겨 말한다. 그러나 무후는 병사를 한데 반해서 공은 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무후는 죽은 뒤 얼마 못가서 나라가 망하였지만 공은 비록 죽었어도 그 충렬은 더욱 빛나서 나라를 기리 태안케 하였다. 여기에 이르름에 공으로서 무슨 여한이 남겠는가.
 
공의 충성과 공훈은 위로는 임금께서 포상하고 백성들에게서 추앙을 받아 아름다운 비취 옥돌처럼 빛났으며 기리 새겨진 그 충절과 공덕은 학사나 대부(大夫)들에 의해서 혹은 시가(詩歌)로 혹은 문장으로 찬양되어 더욱 빛났다. 오직 공은 바다위에서 세운 공이 크고 많다. 그러므로 이 무공을 추앙하는 대첩비와 사우(祠宇)들이 영호남 해안지방에 많이 세워져 있다. 즉 좌수영 대첩비가 곧 그것이요, 창 칼이 거두어진 평온속에 경건히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
 
벽파의 싸움이 있었던 명랑대첩비는 숲속 깊숙히 자리하여 자연 형세가 청나라와 왜국을 막아 편안히 모셔져있고 삼도통제사 본영이 있었던 통영충렬사비하며 순천의 민충사 남해의 충렬사 고금도의 사당들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황송스럽게도 임금께서 내린 사액(賜額)과 조서(詔書)가 간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곳은 곧 정성스런 인(仁)을 이루는 성역(聖域)이라 하겠다. 돌이켜 생각건대 만약 이 공훈이 기록된 문서가 남아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실들이 공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리라. 성상(聖上=純祖) 32년 임진년은 충신을 모신 사당의 네번째 환력(還曆)를 맞는 해이다.
 
임금으로 충신들의 공훈의 크고 적음의 차이에 따라 신위를 모시는 제사에서 공의 영위(靈位)를 수위로 모신바 있었다. 이지음 공의 8세손인 항권이 마침 조상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지라 왕명을 받들어 공이 순국한 자리에 사당을 지어 그 영을 모시고자 하니 많은 인근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무를 치고 돌을 깎아 입석을 도우면서 이런 어른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망망한 큰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도 잔잔하도다. 광폭한 도롱룡도 바다깊이 숨으니 세상이 평화롭도다. 아녀자들의 얼굴은 화락하고 황소도 부지런히 밭을 갈며 누에도 무럭 무럭 잘 자라도다.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가시고 평안하도다. 누구의 가르침도 아닌데 공의 충성을 숭앙함이여.
 
굳세 충성앞에 모두들 제사를 모시니 거북이와 두견새도 기상을 펴도다. 큰 용맹으로 일어나 싸웠도다. 옥포에서 싸움을 끝내고 명랑바다에서 갑옷을 싯도다. 많은 고기배들이 만선으로 돌아오매 오리떼는 물가에서 유유히 노는구나. 꽃가마의 방울자락도 조용해지고 먼 산사의 종소리 더욱 한가롭구나. 비록 공은 먼저 떠났어도 공이 남긴 공훈은 만세에 빛나리라. 아늑한 바다 물결처럼 모든 사람들 가슴속엔 슬픔이 가득하니 공의 영백은 기리 살아 남으리라.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오곡백과는 늘어만 가네. 백성들은 영원히 평안할지니 적은 두번 다시 침범해 오지 못하리라. 공의 높고 어진 뜻은 오래 오래 이어져내려 오직 돌처럼 굳은 절개일지어라.
 

자헌대부 예조판서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 규장각제학 

홍석주 지음

자헌대부 형조판서 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이익회등 (쓰고 새김)
숭정기원후 사임진(注 純祖 三十二年 서기 1832년) 월 일 세움.
 
 

 
 
觀音浦李忠武公表忠碑 (관음포이충무공표충비)
 
前 面 (전면)
有明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贈
議政府領議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後 面 (후면)
直南海縣北二十里海張舟家衡之所出入 名其地曰觀音浦者 故三道統制使贈議政府領議
政忠武李公殉國之所也 公以師 大破倭寇於海中 海上無後警者 今二百三十有餘年 而公
則爲飛丸所中 以歿 嗚呼 壬辰之難 我東之陽九也 時則有忠 靈勇知之士 若而人 左右我
宣廟以克襄中興烈 旣成銘錘龜錘 被竹素 焯乎其有耀矣 至勳塞天地 聲震華夷 輝赫磊落軒 ,
宇宙而揚月星者 蒼神婦 儒不謀一辭 以忠武公爲稱首 蓋公 以偏陬積 弱之旅 當百萬 賈
勇之敵 幣遮一方 屹然爲干城 如張睢陽 橫波絶流 出奇制勝 便兇渠 摧敗煨燼而無遺 如周
公瑾 用少擊衆 前無勍敵威聲所響 遠邇望風 如岳武穆 再造區宇 斡危奠泰 以一身爲宗
國輕重 如郭汾陽李四平 若其 開誠布公 鞠躬盡瘁 德威交彰 亡卒 感懷而卒之以志伏身蠻
則惟諸葛忠武候是也 武候之歿以疾病 而公之歿也 以戰 然 武候之歿 漢室遂危 公則雖
沒矣而 遺烈之所夏被 式至今社稷是賴 公 於是 亦可以無憾、公、之功之忠 肅于論言 昭
于琬琰紀在太常載在盟府 煥煇乎學士 大夫之歌頌敘述 固無容復贊也 惟公、蹟、意多 在
海上 其 暢武功 由湖南之間 則有左水營 大捷碑 拭濕兇鋒 永靖湖畿 在碧波之戰 則有鳴
梁大捷碑 樹牙建間 左收淸日安、在三道統制營則 有統營忠烈祠碑 至順天之忠愍祠 南
海之忠烈祠 古今島之報廟 咸有願刻、以詔無極 獨慈爲立槿成仁之所 而顧無文以徵其實、
我聖上三十二年壬辰 賓廟圖回之四周甲也 惟聖上、撫感興懷成秩忠勞 功宗之祀 首及于
公 于時 公 八世孫恒權 實踐公舊治 統制三道水軍、承王命 侑公于是地 設壇以隆靈 退
諏于衆、伐大石以表其地 而章之以銘辭 人於是 謂統制克世矣。
其銘曰
維南載日 巨渤茫洋 恬風無浪 蛟鰐深藏 閬井如櫛 婦子熙熙 翠牛箔菩 不識鼓旗 云誰之
賜 懷我忠武 桓桓忠武 實彙東土 寬廓健陽 大舊厥勇 玉浦休鋒 鳴梁洗甲 盈盈萬艘 漕彼
鴨渚鑾興徐返 鍾石在 蘆公勳萬世 公則先逝 洪波渺 瀾萬胱同悌公靈不昧 上有星斗 驅
稷産社 永殺饕首 載彼海補 公仁攸成 維列較永 維石之貞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奎章閣提學洪奭周撰
資憲大夫刑曹判書知經筵事秋館事藝文館提學李翊會等
崇禎紀元後四壬辰 月 日 立
 
 
資憲大夫刑曹判書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李翊會等
(자헌대부 형조판서 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이익회 등)
崇禎紀元後四壬辰 月 日 立
(숭정기원후 사임진 월 일 립)
 
 

 
 
노량충렬사비
유명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익 충무이공묘비
숭록대부 의정좌찬검 성균관제주 송준길 (지음)
 
 
남해 노량에 세칸남짓한 사우가 있어 이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올리고 있다. 선조황제 만력기원년에 왜나라의 괴수 수길이 그 상전인 관백(關白)을 죽이고 나서 거국적으로 침공하여 왔다. 공은 그 이전에는 북쪽변경에서 여러차례 큰 전공을 세웠으나 세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신묘 2월 전라도 좌수사로 발탁되자 공은 즉시 무기부터 손질시키는 한편 군졸들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왜적과의 싸움이 벌어지자 공은 옥포 노량 당포 사랑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목 베었다. 또 당항포에서도 적선 40여척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모두 극소수의 수군으로서 대적을 분쇄한 것으로 임금께서 그 공훈을 높이 치하하는 조서까지 내림과 동시에 그 벼슬도 올려주었다. 또 견내량의 적을 유인격파하여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게 하였고 이어 안골포에서도 왜선 40여척을 불살랐으며 다시 부산으로 나아가 적선 백여척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좌수영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고 군량을 비축해가면서 군사들을 재편성하여 다음의 웅장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중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기에 이르자 적은 더욱 전전긍긍하였다. 그런데 이를 질시한 나머지 충무공과 그 휘하 장병들은 비열하고 어리석다고 꾸며 들고나선 원균의 집요하고 간사한 모함으로 조정의 공론이 처음에는 양분되었다가 어이없게도 원균에게로 기울어져 공은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직언하는 중신도 있고 또 임금께서도 그의 공훈을 감안하여 그 책임을 물어 벼슬만 삭탈하였다. 바로 그즈음에 모친이 별세하였다.
 
부고를 받고 바삐 친가로 내려가면서 「내 오직 충과 효를 위해 이 한몸 바쳐왔거늘 어찌하여 이토록 불효막심하게 상(喪)을 당한단 말이냐」 하고 통곡하니 곁에 가던 군민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고 원근간에 모든 사람들이 매우 한스럽고 슬퍼하더라. 한편 통제사를 행세하던 원균이 적의 계략에 걸려 군사는 전멸되고 자신도 비참히 피살됨에 따라 한산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적은 서해를 거쳐 일조에 남원까지 진격했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였다. 공은 십여명의 부하장정을 이끌고 순천으로 달려가서 흩어졌던 군사들을 다시 모아 드디어는 난도벽파정싸움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임금께서는 제일 좋은 하사품을 내림과 아울러 공의 벼슬을 더 높여주려하였으나 이미 높은 벼슬에 있는지라 대신 휘하 장병들에게 포상하였다. 명장(明將) 양호는 은비단을 보내면서 격찬하였다. 이렇게하여 공의 공훈은 명나라 조정까지 알려졌으며 그 용맹은 온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 공의 식사나 침소는 너무나 간소하고 조촐하였다.
 
임금께서 특사를 시켜 보약을 하사하시니 공은 감읍하여 눈물로 더욱 충성할것을 다짐하였다. 임금께서는 공을 염려한 나머지 수군세는 너무 약하니 보강될때까지 수군을 없앰이 어떠냐 하였다. 공은 만약 신이 한번 바다를 떠나면 왜적은 필시 육지로 올라 일시에 이 땅을 휩쓸것이라고 주계(奏啓)를 올려 반대하였다. 마침내 명나라 장수 진린과 유정이 내원하였다. 공은 기꺼이 그들을 응대하였다.
 
공은 통제사본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하였다. 공과 사를 공정하게 다루었으므로 남쪽백성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왜장행장(行長)은 오직 탈출로를 열기 위해 명나라 두장수들에게 뇌물공세로 나왔다.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은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행장은 밀사를 시켜 총포와 칼을 뇌물로 진상해왔다. 공은 두번다시 오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어 이를 물리쳤다. 진중 장병들은 용기백배되었다. 행장은 궁여지책으로 사천의 적들로하여금 그를 구출토록 계략을 꾸몄다. 어느날 밤 큰 유성이 바다에 떨어졌다. 군사들은 몹시 이를 두렵게 생각하였다.
 
무술년 십일월십구일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다. 공의 조카 완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을 내지않고 공처럼 독전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동안 행장은 근근히 도망쳐버렸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에서 터져나오는 곡성은 우뢰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는 길에도 끊일줄 몰랐다. 또 스스로 삼년상(喪)을 모시는 사람도 많았고 승도(僧徒)들은 곳곳에 제단을 모셔놓고 불공을 드렸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숨을 살려주셨던 장군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셨단 말이요 하고 울먹였다.
 
공은 그 품성이 돈독하고 스스로 정절을 지켜 비록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으나 항상 의(義)를 숭상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조금의 잘못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또 한번 용단을 내리면 어떤 강자이건 이에 순종케 하였다. 군정(軍政)을 펴나감에 있어서는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무고한 백성을 한사람이라도 희생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
리하여 삼군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대의를 이루는 데 마당에 왜적의 밀사를 가까이하여 뇌물을 받은 안 쇠나 휴전을 주장하는 주화자(主和者) 인상비칙 장중헌 악무목 등보다 월등하게 훌륭했으므로 허약한 군졸을 통솔하여, 천하에서 제일 강하다는 적과 대소 수십전을 싸워 이겨낸 공인지라 동남쪽을 굳게 막아 이 나라 중흥의 위업을 성취하였으며 거기에 임금의 총애를 입고 인부(錫以印符)까지 하사 받았으니 이 나라 백성임에야 가가호호에서 신주(神主)처럼 모심도 과할 것이 있겠는가? 항차 이 노량은 큰 명정이 내린 곳(暗啞之所被)이오, 비록 유명은 달리하여 말은 없으나 공의 영(靈)의 혜덕을 입은 곳이며 그 충성의 정신이 두려운 곳이라 공의 위명(威名)은 억만년을 두고도 잊혀지지 않으리라.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듯 바람이 노하여 구름을 휘몰아(江戶之氣) 치는듯한 조마도와 같이 거창한 패기에 넘치는 공의 넋을 엄숙하게 제일 먼저 모신 곳이다.
 
옛 사당은 너무나 용탑하고 너무 좁아서 공의 영위를 모시기에 부적하므로 고 통제사 정일 은보선생의 이손이 공의 충절을 높이 선양코자 옛 사우를 허물고 새로 충무공의 공적과 사당 신축의 사연들을 짓기로 하였던바 마침내 학사 민정중이 유익한 글을 짓기로 하였다. 그 초본이 홍명하판서에게 우연히 알려져 드디어는 효종대왕께서도 이 초본을 올람케 되었으니 그 기쁨 어디에 비하랴. 지금 천상에 계시며 능백처럼 푸르른 공의 영혼도 필시 구원에서 감읍하고 있으리라. 여기에 전말을 병기해두는 것은 오직 옛날부터 지금까지 엎드려 우러러 보건대 이문체는 우리를 편달하고 매질하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공의 휘는 순신이요 자는 여해 덕수인이다. 때는 숭정신축십월. 순조 계묘년 사액을 내리셨는데 충렬이라는 어필이었다. 여기에 이르름에야 광영 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입석은 전후임자인 통제사 박경지와 김시성이 맡았다.
 
동년(顯宗二年 서기 一六六一年) 七월 세움.
 
 

 
 
露梁忠烈祠碑 (노량충렬사비)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유명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이공묘비)
崇錄大夫議政左贊成均館祭酒宋凌吉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성균관 제주 송능길)
 
 
碑 銘 (비 명)
 
南海之露梁有廟三間中設位牌以祀故忠武李公者也 神宗皇帝萬曆紀元 倭酋秀吉 弑其君
舉國來寇、公、先在北邊 屢立奇功 而人不甚知 辛卯二月 擢授全羅道 左水使 公 至則日
職具 撫循士卒 遂與賊戰 敗之於玉浦 敗之於露梁及唐浦 敗之於蛇梁 斬其貴將 又敗之修
於唐項浦摧破其四十餘船 皆以少擊衆 上、下書獎之 陞其資給 至永登浦敗之 之見乃梁
誘敗敗之 腥血漲海 又戰於安骨浦、燒其船四十餘 遂進戰於釜산 又破其船百餘艘 遂置陣
閑山島 積粟整餉 爲迎 駕龍鴻之計 朝廷、爲置三道統制使 以處之 賊 畏其 行間 以愚我
諸將、元均 又嫉構之 朝廷 兩信之 公 遂被追拷、有大臣言 上 亦念公功 只削職將軍 以
責效、時、母夫人卒 公 便道奔哭 即行曰 吾一心忠孝 到此俱喪矣 軍民 摧馬號泣 遠近
嗟 惋元均 代爲統制使 爲賊所誘 軍敗走死 而閑山遂陷、賊、遂由西海 進陷南原 朝廷
遂以公 復爲統制使、公、以十 騎馳入順天府 稍收亡卒 遂戰於蘭島 碧波亭 皆大破之 捷
至上欲陞公崇品 有言公、爵秩已高 遂止 只賞將士 天將楊公鎬 亦送銀緞 以慰賞 而奏聞
天朝 公之名遂得聞天、時、公、猶食素寢苦 上特使諭旨 且送草木之滋、公、悌泣勉從、上、念公舟師
單弱 欲令前却 以觀勢、公、馳啓曰、臣、一去港則 賊 必登岸長驅矣、時、天將陳璘劉鋌
水陸來會 公 援應有方 俱得歡心、公、進據古今島 募民耕作 以使公私、南民 驤屬歸之賊
將行長 函謀撒歸 求道甚恭 兩天將、中其 賄皆許詳之 公 諷刺甚至 行長 又遣使于公、遺
以銃斂公以警賊 不可通使 嚴辭却之 將士勇氣百倍 行長 計窮 遂引泗川屯賊 以自援、一
夕、大星 隕海中 軍中畏之 戊戌十一月十九日 公 與陳公 迎賊于 露梁 賊大 挫候公 忽中
丸而絶 陳公 被圍、急公、從子莞 宥膽 略不發哭 督戰自如 遂鮮陳公圍 而行長値得逃去
旣發喪 我師及天將兩陣皆號哭聲海中自南海至牙山迎柩哭奠 千里不絶 亦有喪之三年者
僧徒處處嬈設齋 皆曰活我命 復我讐者 公也 公 內有篤行 貞介自守 意有下可 難達官要
人 必據義娩屈之 發謀制事 舉無遺策 舊勇決機 前無勁賊 軍政 簡而有法 不妄殺一人 而三
軍一志 莫敢違令 至其大義 近倭使 使中賄者 顔駾主和者 碩此則 張忠獻 岳武穆 蔑此加
矣 以故 當積衰諱兵之餘 遇天下莫強敵 大小數十戰 俱以全取勝 蔽遮東南 此基中興之偉
烈 至崇 皇上寵命 錫以印符則 一國之人 雖家戶 而戶侑 不爲過矣 况此露梁者旋纛 之所臨
暗啞之所被 其精爽 之可畏者 因將億萬年不泯 蹴山噴海 風慼雲屯 常有跳馬島 擠江戶之
氣 則儼奉之舉 尤在所先也 舊有廟 緬隘下害 不足以安公之靈 故統制使鄭溢圖隱先生之耳
孫 盛、公之忠節 則改而新之 又伐木石 以爲性繫 而因閔學士鼎重 俾余書其事 文旣祖成
判書洪公命夏 以事聞 孝宗大王 函徵草本 特賜 乙覽 亦豈拊髀顧牧之意 歟只今 仙馭上
賓 凌栢蕭森 公之毅魄 重亦飮泣於九原矣 因倂記此 以備始末 俯仰疇昔 爲文杖血也 公
諱舜臣 字汝諧 德水人 時 崇禎辛丑十月日也 今上癸卯 賜額曰 忠烈 至是 崇報無憾矣 碑
役前後相之者 統制使 朴公敬祉 金公是聲 也
 
是年 七月 日 進刻
(시년 칠월 일 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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