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현에서 북쪽으로 20리쯤 나가면 바닷물결이 넘실거리고 크고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곳이 있어 이를 관음포라 일컷거니와 이곳이 곧 삼도수군통제사이며 의정부 영의정 충무 이공께서 순국한 곳이다. 공은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서 왜구를 대파하므로써 바다에서는 왜구들의 그림자 조차 찾아볼수 없게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20여년전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했던 것이다. 아! 임진란은 실로 동방의 양구로 일컬어 짐만큼 큰 재액(災厄)이었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공과 같은 이가 있어 이윽고 사직을 지켜내고 나라의 중흥을 이루었다.
그때 이미 명정(銘旌)이 내려지고 사록(史錄)에도 올랐거니와 슬퍼할지고 그 빛나는 공을 천지가 넓다한들 어찌 모두 이를 채워 내리요. 그 충용의 명성은 널리 명나라까지 떨쳐 마치 우주를 비치는 달과 별처럼 장대하고 혁혁하였다. 이처럼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충무공을 으뜸으로 숭앙하는 것은 공은 쓸모없는 허약한 군사로 백만대군의 적을 물리친 거의(注 賈誼 前漢의 孝文帝 때 武將) 이상으로 바다를 막아 간성(干城)을 지켜낸 어른이었고 또 장수양 처럼 한때 전세가 역전되어 종횡무진 신출귀몰(神出鬼沒)의 작전으로 적을 섬멸함으로써 후환을 남기지 않은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또 주군처럽 극소수의 군사로써 최강적과 대전 승리를 거둠으로써 만방에 국위를 떨쳤고 한몸 내던져 국가의 안위를 구출한 악무목(注-宋나라 忠臣 악비의 시호)이나 역경속에서도 태연히 국난을 이겨낸 곽문양(注 위나라의 郭淮) 이서평 이상의 공훈과 덕을 빛내었던 것이다.
공은 언제나 위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혔고 부하장병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나라를 위해 자신이 앞장서서 죽을 결심임을 천명하여 그를 따르게 하였다. 이런 점에서 흔히 공을 제갈무후와 같은 용장이라고들 비겨 말한다. 그러나 무후는 병사를 한데 반해서 공은 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무후는 죽은 뒤 얼마 못가서 나라가 망하였지만 공은 비록 죽었어도 그 충렬은 더욱 빛나서 나라를 기리 태안케 하였다. 여기에 이르름에 공으로서 무슨 여한이 남겠는가.
공의 충성과 공훈은 위로는 임금께서 포상하고 백성들에게서 추앙을 받아 아름다운 비취 옥돌처럼 빛났으며 기리 새겨진 그 충절과 공덕은 학사나 대부(大夫)들에 의해서 혹은 시가(詩歌)로 혹은 문장으로 찬양되어 더욱 빛났다. 오직 공은 바다위에서 세운 공이 크고 많다. 그러므로 이 무공을 추앙하는 대첩비와 사우(祠宇)들이 영호남 해안지방에 많이 세워져 있다. 즉 좌수영 대첩비가 곧 그것이요, 창 칼이 거두어진 평온속에 경건히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
벽파의 싸움이 있었던 명랑대첩비는 숲속 깊숙히 자리하여 자연 형세가 청나라와 왜국을 막아 편안히 모셔져있고 삼도통제사 본영이 있었던 통영충렬사비하며 순천의 민충사 남해의 충렬사 고금도의 사당들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황송스럽게도 임금께서 내린 사액(賜額)과 조서(詔書)가 간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곳은 곧 정성스런 인(仁)을 이루는 성역(聖域)이라 하겠다. 돌이켜 생각건대 만약 이 공훈이 기록된 문서가 남아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사실들이 공의 위대함을 가르쳐 주리라. 성상(聖上=純祖) 32년 임진년은 충신을 모신 사당의 네번째 환력(還曆)를 맞는 해이다.
임금으로 충신들의 공훈의 크고 적음의 차이에 따라 신위를 모시는 제사에서 공의 영위(靈位)를 수위로 모신바 있었다. 이지음 공의 8세손인 항권이 마침 조상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지라 왕명을 받들어 공이 순국한 자리에 사당을 지어 그 영을 모시고자 하니 많은 인근사람들이 모여들어 나무를 치고 돌을 깎아 입석을 도우면서 이런 어른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졌다.
망망한 큰 바다에 바람은 자고 물결도 잔잔하도다. 광폭한 도롱룡도 바다깊이 숨으니 세상이 평화롭도다. 아녀자들의 얼굴은 화락하고 황소도 부지런히 밭을 갈며 누에도 무럭 무럭 잘 자라도다.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가시고 평안하도다. 누구의 가르침도 아닌데 공의 충성을 숭앙함이여.
굳세 충성앞에 모두들 제사를 모시니 거북이와 두견새도 기상을 펴도다. 큰 용맹으로 일어나 싸웠도다. 옥포에서 싸움을 끝내고 명랑바다에서 갑옷을 싯도다. 많은 고기배들이 만선으로 돌아오매 오리떼는 물가에서 유유히 노는구나. 꽃가마의 방울자락도 조용해지고 먼 산사의 종소리 더욱 한가롭구나. 비록 공은 먼저 떠났어도 공이 남긴 공훈은 만세에 빛나리라. 아늑한 바다 물결처럼 모든 사람들 가슴속엔 슬픔이 가득하니 공의 영백은 기리 살아 남으리라.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오곡백과는 늘어만 가네. 백성들은 영원히 평안할지니 적은 두번 다시 침범해 오지 못하리라. 공의 높고 어진 뜻은 오래 오래 이어져내려 오직 돌처럼 굳은 절개일지어라.
資憲大夫刑曹判書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李翊會等 (자헌대부 형조판서 지경연 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이익회 등)
崇禎紀元後四壬辰 月 日 立 (숭정기원후 사임진 월 일 립)
노량충렬사비
유명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익 충무이공묘비 숭록대부 의정좌찬검 성균관제주 송준길 (지음)
남해 노량에 세칸남짓한 사우가 있어 이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올리고 있다. 선조황제 만력기원년에 왜나라의 괴수 수길이 그 상전인 관백(關白)을 죽이고 나서 거국적으로 침공하여 왔다. 공은 그 이전에는 북쪽변경에서 여러차례 큰 전공을 세웠으나 세상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신묘 2월 전라도 좌수사로 발탁되자 공은 즉시 무기부터 손질시키는 한편 군졸들을 재정비하였다.
이윽고 왜적과의 싸움이 벌어지자 공은 옥포 노량 당포 사랑등지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적장을 목 베었다. 또 당항포에서도 적선 40여척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모두 극소수의 수군으로서 대적을 분쇄한 것으로 임금께서 그 공훈을 높이 치하하는 조서까지 내림과 동시에 그 벼슬도 올려주었다. 또 견내량의 적을 유인격파하여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게 하였고 이어 안골포에서도 왜선 40여척을 불살랐으며 다시 부산으로 나아가 적선 백여척을 격파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좌수영의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고 군량을 비축해가면서 군사들을 재편성하여 다음의 웅장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중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기에 이르자 적은 더욱 전전긍긍하였다. 그런데 이를 질시한 나머지 충무공과 그 휘하 장병들은 비열하고 어리석다고 꾸며 들고나선 원균의 집요하고 간사한 모함으로 조정의 공론이 처음에는 양분되었다가 어이없게도 원균에게로 기울어져 공은 체포되어 고문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직언하는 중신도 있고 또 임금께서도 그의 공훈을 감안하여 그 책임을 물어 벼슬만 삭탈하였다. 바로 그즈음에 모친이 별세하였다.
부고를 받고 바삐 친가로 내려가면서 「내 오직 충과 효를 위해 이 한몸 바쳐왔거늘 어찌하여 이토록 불효막심하게 상(喪)을 당한단 말이냐」 하고 통곡하니 곁에 가던 군민들은 말고삐를 붙잡고 울고 원근간에 모든 사람들이 매우 한스럽고 슬퍼하더라. 한편 통제사를 행세하던 원균이 적의 계략에 걸려 군사는 전멸되고 자신도 비참히 피살됨에 따라 한산도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적은 서해를 거쳐 일조에 남원까지 진격했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였다. 공은 십여명의 부하장정을 이끌고 순천으로 달려가서 흩어졌던 군사들을 다시 모아 드디어는 난도벽파정싸움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였다. 임금께서는 제일 좋은 하사품을 내림과 아울러 공의 벼슬을 더 높여주려하였으나 이미 높은 벼슬에 있는지라 대신 휘하 장병들에게 포상하였다. 명장(明將) 양호는 은비단을 보내면서 격찬하였다. 이렇게하여 공의 공훈은 명나라 조정까지 알려졌으며 그 용맹은 온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즈음 공의 식사나 침소는 너무나 간소하고 조촐하였다.
임금께서 특사를 시켜 보약을 하사하시니 공은 감읍하여 눈물로 더욱 충성할것을 다짐하였다. 임금께서는 공을 염려한 나머지 수군세는 너무 약하니 보강될때까지 수군을 없앰이 어떠냐 하였다. 공은 만약 신이 한번 바다를 떠나면 왜적은 필시 육지로 올라 일시에 이 땅을 휩쓸것이라고 주계(奏啓)를 올려 반대하였다. 마침내 명나라 장수 진린과 유정이 내원하였다. 공은 기꺼이 그들을 응대하였다.
공은 통제사본영을 고금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하였다. 공과 사를 공정하게 다루었으므로 남쪽백성들이 물밀듯이 모여들었다. 왜장행장(行長)은 오직 탈출로를 열기 위해 명나라 두장수들에게 뇌물공세로 나왔다. 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공은 엄격하고 단호하였다. 행장은 밀사를 시켜 총포와 칼을 뇌물로 진상해왔다. 공은 두번다시 오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어 이를 물리쳤다. 진중 장병들은 용기백배되었다. 행장은 궁여지책으로 사천의 적들로하여금 그를 구출토록 계략을 꾸몄다. 어느날 밤 큰 유성이 바다에 떨어졌다. 군사들은 몹시 이를 두렵게 생각하였다.
무술년 십일월십구일 공은 진린과 더불어 노량에서 왜적을 맞았다. 적을 모조리 꺾어 부셔놓고 공은 뜻하지 않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진린이 적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다. 공의 조카 완은 본래 담력이 있는지라 곡성을 내지않고 공처럼 독전하여 간신히 진린을 적의 포위에서 구해냈다. 이러는 동안 행장은 근근히 도망쳐버렸다. 공의 죽음이 알려지자 우리는 물론 명나라의 두 진영에서 터져나오는 곡성은 우뢰소리처럼 바다를 뒤덮었고 이 곡성은 남해에서 아산에 이르는 천리 운구(運柩)는 길에도 끊일줄 몰랐다. 또 스스로 삼년상(喪)을 모시는 사람도 많았고 승도(僧徒)들은 곳곳에 제단을 모셔놓고 불공을 드렸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우리 목숨을 살려주셨던 장군께서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셨단 말이요 하고 울먹였다.
공은 그 품성이 돈독하고 스스로 정절을 지켜 비록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으나 항상 의(義)를 숭상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조금의 잘못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또 한번 용단을 내리면 어떤 강자이건 이에 순종케 하였다. 군정(軍政)을 펴나감에 있어서는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무고한 백성을 한사람이라도 희생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
리하여 삼군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다.
대의를 이루는 데 마당에 왜적의 밀사를 가까이하여 뇌물을 받은 안 쇠나 휴전을 주장하는 주화자(主和者) 인상비칙 장중헌 악무목 등보다 월등하게 훌륭했으므로 허약한 군졸을 통솔하여, 천하에서 제일 강하다는 적과 대소 수십전을 싸워 이겨낸 공인지라 동남쪽을 굳게 막아 이 나라 중흥의 위업을 성취하였으며 거기에 임금의 총애를 입고 인부(錫以印符)까지 하사 받았으니 이 나라 백성임에야 가가호호에서 신주(神主)처럼 모심도 과할 것이 있겠는가? 항차 이 노량은 큰 명정이 내린 곳(暗啞之所被)이오, 비록 유명은 달리하여 말은 없으나 공의 영(靈)의 혜덕을 입은 곳이며 그 충성의 정신이 두려운 곳이라 공의 위명(威名)은 억만년을 두고도 잊혀지지 않으리라. 산을 박차고 바닷물을 내뿜듯 바람이 노하여 구름을 휘몰아(江戶之氣) 치는듯한 조마도와 같이 거창한 패기에 넘치는 공의 넋을 엄숙하게 제일 먼저 모신 곳이다.
옛 사당은 너무나 용탑하고 너무 좁아서 공의 영위를 모시기에 부적하므로 고 통제사 정일 은보선생의 이손이 공의 충절을 높이 선양코자 옛 사우를 허물고 새로 충무공의 공적과 사당 신축의 사연들을 짓기로 하였던바 마침내 학사 민정중이 유익한 글을 짓기로 하였다. 그 초본이 홍명하판서에게 우연히 알려져 드디어는 효종대왕께서도 이 초본을 올람케 되었으니 그 기쁨 어디에 비하랴. 지금 천상에 계시며 능백처럼 푸르른 공의 영혼도 필시 구원에서 감읍하고 있으리라. 여기에 전말을 병기해두는 것은 오직 옛날부터 지금까지 엎드려 우러러 보건대 이문체는 우리를 편달하고 매질하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공의 휘는 순신이요 자는 여해 덕수인이다. 때는 숭정신축십월. 순조 계묘년 사액을 내리셨는데 충렬이라는 어필이었다. 여기에 이르름에야 광영 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입석은 전후임자인 통제사 박경지와 김시성이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