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音浦戰沒遺墟... 「공의 넋이 머무는 바다는 검푸르고도 깊구나. 그 죽음 아까워하는 물고기들의 노여움 아직 가시지 않고 산야의 금수 마저 슬픔 못잊어 울고만 있네...」
青春駐節海雲深 (청춘주절해운심)
逝後魚龍猶怒氣 (서후어룡유노기)
化餘猿鳥自悲吟 (화여원조자비음)
관음포 앞바다에 들렀다가 충렬사에 이르던 당시의 경상관찰사 조현명(慶尙觀察使 趙顯命)이 추앙과 비탄 속에서 읊은 시문의 한 귀절이다. 광란(狂亂)하는 파도도 여기 이르면 고개 숙이고 거센 해풍도 숨죽여 지낸다는 고현면 차면리 이낙장선(李落長筅). 이곳이 곧 성웅 이순신(聖雄 李舜臣 將軍)이 서기 1598년 11월 19일 이른 아침 최후로 왜적선단(倭賊船團)을 완전 격파하여 구국제민(救國濟民)하고 순국(殉國)한 성스러운 곳이다. 예로부터 이곳을 이락포(李落浦)라 하고 이 자리에 세워진 비각(忠武公遺墟碑閣)을 이락사(李落祠)라 불렀다. 이 비각 자리가 앞바다에서 격전중 순국한 충무공의 영구(靈柩)를 육지에 제일 먼저 모신 이른바 공의 진충보국의 얼이 깃들어 있는 순국의 성지(聖地)인 것이다.
이 비각은 공이 순국한지 234년 되던 순조(純祖) 32년 서기 1832년에 공의 8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항권(三道 水軍 統制使 李恒權)이 유허비와 더불어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더우기 우리 향토로서 감회 깊고 자랑스러운 것은 이 관음포 앞바다가 노량해전(露梁海戰)의 승첩(勝捷)에 앞서기 215년전 여말의 명장 정지(鄭地) 장군이 왜구들을 대파하여 이를 근절시킨 유서 깊은 승첩의 바다라는 점이다. 또한 관음포에서는 충무공이 임진년 8월 24일 제4차 함대출동시(艦隊出動時) 하루밤을 정박(淀泊)하면서 막료를 거느리고 작전회의를 한 바도 있었다.
본관이 덕수(德水)요 자(字)가 여해(汝諧)인 충무공은 인종원년 서기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乾川洞 現 仁峴洞 一街 附近)에서 고려초엽 중랑장 이돈수(高麗初葉 中郞將 李敦守)의 12대손으로 태어났다. 율곡선생(栗谷先生)보다 9년 후배격이 되고 임진왜란때의 육군도 원수인 권율(權慄) 장군보다 8년 뒤가 되며 정읍현감(井邑縣監)으로부터 그를 발탁하며 일약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의 길을 열어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보다는 3년 후배가 된다.
그는 △1576년 2월 무과급제 동십이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童仇非堡 權管) △1579년 2월 훈련원 봉사(奉事) △1580년 전라도 발포수군만호 — 36세(鉢浦水軍萬戶) △1582년 동 발포만호 파직 △1583년 10월 건원보 권관(乾原堡 權管) △1586년 함경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1587년 녹둔도 둔전관 병사(鹿屯島 屯田官兵使)인 이익(李鎰)의 모함으로 두번째 파직 백의종군(白衣從軍) △1589년 2월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있다가 동십 일월에 선전관 △동십 이월에 정읍현감(45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47세)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함대를 이끌고 제1차로 출동 옥포대승첩(玉浦大勝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름 △6월 2차 출동코 당포대승첩(唐浦大勝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름 △7월의 제3차 출동으로 한산대승첩(閑山大勝捷)을 거두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름 △9월 제4차 출동으로 부산대승첩(釜山大勝捷)을 거두어 이듬해 1593년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름.그러나 원균(元均)의 모함(謀陷)과 서인(西人)들의 부화뇌동(附和雷同)으로 1598년 정유년(丁酉年 2월 26일) 2월에 파직 구금되었다가 동 4월 1일 누명을 벗고 출옥하여 권율 도원수의 막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면중 모친상까지 입고 비통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사필귀정으로 모함한 원균이 처벌을 받고 왜적에게 피살되자 동 8월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받았다. 오직 진충보국과 구국제민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기로 결심한 충무공은 9월에 겨우 남은 십이척의 함선으로 왜적과 싸워 전공도 혁혁한 명량해전대승첩(鳴梁海戰大勝捷)을 거두었다. 본영을 목포 고하도(高下島)에서 고금도(古今島)로 옮겨놓고 함대를 재정비한 충무공은 1598년 7월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水軍提督 陳璘)과 연합함대를 편성 동 11월 19일 새벽 노량앞바다 관음포에서 왜적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왜적을 완전 격파하고 유탄에 맞아 아깝게도 54세를 일기로 순국한 것이다.
殺身殉節 古有此言 (살신순절 고유차언) 몸을 죽여 절개를 지켰다는 말은 옛날에도 있었으나
身亡國活 始見斯人 (신망국활 시견사인) 제 몸 죽여 나라를 살린 사람은 이분에게서 처음 보았노라
— 절개에 죽은 충신 이 얘기는 옛부터 많지만 제 몸 죽여 나라 살려낸 이 얘기 이 사람에게서 처음 보겠네.
충무공의 죽음을 애통한 숙종대왕이 현충사 제문(顯忠祠 祭文)에서 읊은 추앙과 통탄의 한 귀절이다.
또 숙종조의 목사(牧使) 임홍양(任弘亮)은 현충사 상량문(上梁文)에서
龍亡大澤 天地爲之凝愁 (용망대택 천지위지응수) 용이 큰 못에서 사라지니, 온 세상이 그를 위해 깊은 슬픔에 잠기고
虎逝深山 風雲爲之變色 (호서심산 풍운위지변색)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떠나가니, 바람과 구름이 그를 위해 빛깔을 바꾸는구나
— 큰 못에서 용이 숨지니 하늘과 땅이 수심에 잠기고 심산에서 범이 죽으니 풍운의 빛이 변하는구나.
하고 님가신 산천의 슬픔과 허전함을 통탄하였다.
끝으로 이 성스러운 이 충무공의 순국유허를 보전(保全)하고 그 숭고한 호국충렬의 얼을 길이 이어 나가게 하고자 본회에서는 문화재관리당국에 대하여 국가문화재
지정과 그 명칭 개정을 신청하였던바 1973년 4월 사적(史蹟) 232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그 명칭도 건의한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觀音浦 李忠武公 戰沒遺墟)」로 정식 개정되었다. 이와 함께 동시에 신청했던 충렬사도 사적 233호 문화재로 지정받았음을 덧붙여 두는 바이다.
忠烈祠... 此讎若除死卽無憾— 이 원수의 무리들을 완전히 무찔러 버린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는 노량의 최후결전을 앞두고 삼경(三更)에 충무공이 하늘에 맺은 맹서(盟誓)이며 축원(祝願)이었다. 진두에 나서서 싸우던 공의 싸움은 용감무쌍하였고 그 죽음은 장렬(壯烈)하였다.
당시 영의정을 지냈던 유성룡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에 이렇게 남기고 있다.
「......패주하는 적을 남해 지계(地界)에까지 추격해 갔다. 순신은 친히 적의 화살과 탄환을 무릅쓰고 역전하다가 적탄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를 뚫었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순신은 전방급 신물언아사(戰方急 愼勿言我死)라 한마디 남기고 운명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 발설치 말라는 것이다. 순신의 조카인 완(莞)은 본래 담력과 기량이 있었다. 그는 숙부의 전사를 비밀에 붙이고 순신의 영기(令旗)로 더욱 긴박(緊迫)하게 독전을 했다......」
그는 스스로 몸을 죽여 나라를 살렸다. 하찮은 말단직에 있으면서도 두번씩이나 파직되고 좌천 당하며 온갖 수모와 굴욕(屈辱)으로 점철(點綴)된 그의 생애는 유성룡의 말대로 유재무명(有才無命) 즉 재주는 특출하면서도 운수가 따르지 못한 불행한 형극의 길이었다. 더우기 연전연승(連戰連勝)으로 겨레의 수호신(守護神) 불사조(不死鳥)의 영웅으로 받들어 오던 그가 원균(元均)과 서인들의 모함으로 체포 투옥되어 참형(斬刑)으로까지 논란되었으니 그의 절통한 심정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리하여 충무공의 장렬한 전사를 적탄을 빌은 자살이라는 설까지 나오게 되었다.
「곽재우 수해병벽곡피화 이순신 방전면주 자중환이사(郭再祐 遂解兵 避穀避禍 李舜臣 方戰免冑 自中丸以死)」 곽재우는 의병을 해산하고 세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서 생식하면서 화를 면했지만 이순신은 갑옷을 벗고 선두에서 싸우다가 스스로 적탄에 맞아 죽었다.」
서하 이민서(西河 李敏叙)가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 卷三)》에 남긴 말이다. 해석에 따라 깊이 음미(吟味)할만한 말이다. 전사한 충무공의 유해(遺骸)는 먼저 지금의 관음포 이충무공 유허비각 자리에 안치(安置)되었다. 그 곳에서의 안치기간은 알길이 없으나 얼마후에 지금의 충렬사자리로 옮겨 가매장한것 같다. 이듬해 3월 11일 아산금성산록(牙山錦城山麓)에 안장되었고 16년 후인 갑인년(甲寅年)에 어라산(於羅山)으로 이장(移葬) 하였으니 남해 관음포와 노량 충렬사 자리에서 2개월반 정도 안치되어 있었던것 같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영(軍營)에서군영으로 통곡이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자기의 아버지를 여윈듯 통곡을 했다. 순신의 영구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곳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중로(中路) 해변의 백성들끼리 뜻을 모아 사당을 세우고 「민충사(愍忠祠)」라 부르며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드렸다. 그사당 아래를 지나다니는 상고(商賈)와 어선들도 누구나 할것 없이 모여 제사를 드렸다.」
南海忠烈祠의 創建과 變遷 …… 여기 민충사가 곧 남해충렬사의 전신(前身)이다. 충무공에게 의정부 우의정이 추증(追贈)은 되었으나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그의 충혼을 포장(褒獎)해야 한다는 제언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인조십년 서기 1632년에 공의 영구가 떠난 바로 그자리에 향사 김여부 고승후(鄕士 金汝富 高承厚)등이 중심이 되어 초사(草舍)를 짓고 현령 이정건(縣令 李正健)이 민충비(愍忠碑)를 세워 향사를 모셔온것이 오늘날의 충렬사의 효시(嚆矢)인 것이다. 이것이 곧 충무공의 영구가 떠난지 34년만의 일이다. 여기에 간단히 그 유래를 살펴보면 1659년 효종10년 조정에서 어사 민승중(御使 閔昇重)으로 하여금 통제사 정일(統制使 鄭榏)에게 명하여 그 초사를 철거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며 비(碑)도 이충민비(李忠愍碑)로 개건(改建) 하였으며 1662년 2월 현종3년 현종 어필(顯宗 御筆)의 사액 충렬사 (顯額 忠烈祠)를 내렸다.
1733년 영조 9년 5대손인 태상(泰祥)이 통제사로서 내남하여 출입문에 청해루(淸海樓)를 세웠으며 1734년 5대손 진주병사 관상(觀祥)이 내남하여 사답(祠沓)을 마련하였다.
1742년 영조 18년 6대손 한응(漢膺)이 비각을 세움과 동시에 인근 산야와 전답을 사들여 식수(植樹)로 조경(造景)하였고 또 5대손 명상(命祥)이 호남절도사(湖南節度使)로 재임하면서 내남하여 이 충민공비를 매장하고 시호(諡號)인 이 충무공비로 개건(改建)하였다.
그러나 고종원년 서기 1864년에 내려진 대원군(大院君)의 서당 향사 등 철폐령에 따라 위패(位牌)를 현재 분묘(噴墓)가 있는 뒷뜰에 묻고 향사만 모셔 나왔으며, 1875년 고종 8년에는 청해루를 철거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1899년 광무(光武) 3년 11대손 민승(敏承)이 통영주둔 육군참영으로 내남 어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도도하게 흐르는 검푸른 노량바다 굽이쳐 흐르는 물결이 한눈에 띄는 언덕바지 울창한 수목속에 자리잡고 있는 충렬사는 조상때부터 연연 304년·오십동안이나 충무공의 넋을 봉안하고 추앙하고 흠모하면서 그 청사에 빛나는 공을 기리는 우리 향토의 슬기로운 성역이며 자랑인 것이다.
개략적으로나마 성웅 이순신장군의 발자취와 아울러 충렬사의 유래(由來)를 살펴 봤다. 그러면 거성(巨星) 이 바다에 떨어진 충무공 순국의 날과 그 뒤의 패잔왜적들에 대한 처리는 어떠하였을까.
明將張良相의 敗殘兵 掃蕩戰 …… 왜적 함대는 모조리 격파되고 노했던 물결도 조용해져 갈 무렵 왜적에게 포위되었던 그를 구조해준 충무공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부하를 보냈다가 뜻밖에도 충무공이 순국했다는 소식을 먼저 알게된 진린 제독(陳璘提督)은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며 「나는 노야(老爺)가 살아있는 몸으로 와서 나를 구해준 줄 알았더니 어찌하여 돌아가셨단 말이요」 외치고 가슴치며 대성통곡 하였다고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징비록(懲毖錄)에서 기술하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충무공의 전사 소식을 듣고 군영(軍營)에서 군영으로 통곡이 이어졌다.
통곡의 바다가 된 이 틈을 타서 육지로 기어올라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은 왜적의 무리는 500여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왜장 화산(樺山)의 인솔로 강진바다 해안선(海岸線)을 따라 선소의 왜성까지 숨어 들었다. 그리하여 바다건너로 도망칠 선박을 마련하기 위해 약탈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노량진해전에서 간신히 격침을 모면했던 패잔선들은 서·남면 앞바다를 거쳐 2,3동방면으로 해상도주를 꾀하였다. 충무공을 잃고 비탄에 젖은 우리 수군을 대신 해서 명장장량상유격장군(明將 張良相遊擊隊長)이 이들을 추격했다. 절박해진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소흘산(所屹山) 원산(猿山) 금산등지로 숨어들어 완강히 반항(反抗)했다.
명군과 왜적들 사이에 맹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소탕전(掃蕩戰)에서 용문사(龍門寺)가 불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하여 왜적을 완전 소탕한 명군은 선소의 왜성으로 왜적을 치기 위해 입성(入城)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왜적들이 이틀밤을 지새우고 강진바다를 건너 창선(昌善) 앞바다에 집결해 있다가 일본으로 도주한 뒤였다. 그러니 금산 등지에서의 소탕전은 3·4일 걸렸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왜성에 입성한 명군은 얼마 동안 주둔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들이 남긴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가 황명만력(皇明萬曆) 27년 즉 노량해전이 끝난 이듬해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 5·6개월 내지 1년이내가 아닐까 추측이 될 뿐이다.
東西洋 英雄과의 비교…… 이 충무공을 논함에 있어 흔히 중국의 제갈량(諸葛亮)과 영국의 넬슨제독을 예를 들어 비교해서 말함에 대해 오랫동안 이 충무공 연구에 많은 공헌과 저서(著書)를 남긴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은 그의 저 성웅 이순신에서 다음과 같이 대비 분석하며 논평하고 있다.
「비록 충무공과 제갈양은 서로 54세로써 세상을 마친 것이 같고 또 시호가 「충무」인 것도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 한것도 같다. 그러나 가치를 논한다면 결코 저울로 달 수는 없다고 본다. 제갈양은 27세때 소열황제(昭烈皇帝)가 세번씩이나 그를 방문하여 총애를 입기 시작했지만 충무공은 유성룡(柳成龍)이 말한 바와 같이 과거에 오르고도 10년이 되도록 등용되지 못한 몹시 불운한 사람이었다. 또 제갈양은 소영황제에게 기용되고부터 모략 한 번 받은일 없이 밖에 나가선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군사와 정치를 손아귀에 쥐고 득의한 일생을 보냈으나 충무공은 모략과 박해속에서 지냈으며 마침내는 감옥살이까지 지낸 일도 있었다. 제갈양은 마지막 전쟁때에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30여년에 그의 조국 촉한(蜀漢)도 망했지만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조국은 영원히 살아났던 만큼 그 죽음의 형태와 가치도 서로 다른 것이다.」
또 영국 해군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 넬슨(1758~1804)과는 그가 25세때 지중해(地中海) 함대의 함대장이 된 것과 충무공이 전라좌수사가 된 것을 억지로 비교 말할수도 있고 그가 40세때 「아브키로」만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하여 남작위(男爵位)를 받은 것과 3년후 「빨트」해전에서 적군을 격파한 공으로 자작위(子爵位)로 승진된 것이 충무공이 1차 옥포해전에서 승첩함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로 2차해전인 당포싸움에서 이겨 자헌대부(資憲大夫)로 3차의 한산해전에서 승리한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까지 올랐던 것을 비교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넬슨이 마지막 무렵 프랑스와의 전쟁이 다시 일어나자 지중해함대의 사령장관이 된 것과 충무공이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것도 비교 말할 수 있다. 또 넬슨이 「트라팔가」해상에서 프랑스함대를 격파함으로써 나폴레옹의 영국본토 상륙작전을 완전 봉쇄하고 자신은 빅토리아기함(旗艦)에서 장렬히 전사했던 것과 우리 충무공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왜적을 무찔러 그들의 침략을 완전히 꺾고서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한 것을 비교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넬슨은 당시 프랑스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한 거국적인 협력이 뒷받침되었음에 반해 충무공은 너무도 어려운 역경(逆境)속에서 싸우다가 순국했던 것으로 여기에서 그 서로의 객관적 정세와 주관적 가치에 판이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충무공의 위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흔히들 제갈양과 넬슨을 인용 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아니하나 만약 제갈양이나 넬슨이 이 충무공과 같은 역경속에 놓여졌던들 과연 충무공과 같은 충절과 대의를 다 했을까하는 의문을 떨어 버릴수만은 없다.
끝으로 일개 정읍현감(井邑縣監)자리에서 이충무공을 일약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자리로 발탁의 길을 열어준 유성룡은 후일 그가 남긴 저서 징비록(懲毖錄)에서 노량해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앞에서 인용한바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더욱 상세히 이해하는 동시에 말미에 언급된 민충사(愍忠祠) 처치(致祭) 운운은 노량에 세워졌던 충렬사의 전신(前身)임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는 마음에서 원문을 발췌(拔萃) 재수록해 둠을 밝혀 둔다.
징비록 노량해전 조
(전략) 10월 유제독(劉綎提督)은 두차례에 걸쳐 순천의 적진을 공격하고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으로 적의 구원부대를 바다에서 대파시켰으나 이 싸움(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적장 평행장(平行長=小西)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부산, 울산, 하동 등 연해(沿海)의 적들도 모두 저들 땅으로 도망쳤다.
당시 행장은 순천의 예교(芮橋)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고 있었다. 유제독은 대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순천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얼마후 유제독은 육로로 다시 진격하고 충무공은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과 함께 그 지역 해구(海口)를 막아 바짝 위협하자 행장은 사천(泗川)에 주둔하고 있는 적장 심안돈오(沈安頓吾)에게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돈오가 수로로 구원차 오는 것을 순신이 요격하여 이를 대파시켰다. 적선 이백여척을 불태우고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패주하는 적을 남해지계(南海地界)에까지 추격해 갔다.
순신은 친히 적의 화살과 총탄을 무릅쓰고 역전(力戰)하다가 적탄(敵彈)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로 관통했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帳幕)안으로 옮겼다. 순신은 「싸움이 지금 한창 급박하니 부디 나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하고 운명했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조카 완(莞)은 본래 담력과 기량이 있었다. 그는 숙부 순신의 전사를 비밀에 붙이고 순신의 영기(令旗)를 흔들며 더욱 긴박하게 독전(督戰)을 했다. 그래서 수군들은 일체 순신의 전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진린제독의 함선(艦船)이 적
군에게 포위당한 것을 발견하고 수군들을 지휘하여 그를 구원해 주었다.
적이 흩어져 간 뒤에 진린제독은 자기를 구원해준 순신에게 감사코자 사람을 보냈다가 비로소 순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는 의자에 앉았다가 땅바닥으로 몸을 내던지며 「나는 노야(老爺)가 살아있는 몸으로 나를 구원해준 줄 알았더니 어찌하여 돌아가셨단 말이요」 라고 소리내어 외치며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온 군중(軍中)이 모두 통곡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시켰다.
행장은 우리 수군이 적선을 추격하여 그의 진영(陣營)을 지나간 틈을 타서 뒤로 도망쳐 버렸다. 이에 앞서 7월에 왜(倭)의 괴수(魁首) 풍수길(平秀吉 = 豊臣)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연해의 적들은 모두 물러갔다.
우리나라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군영(軍營)에서 군영으로 통곡이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의 친아버지를 여읜 듯 통곡을 하였다. 순신의 영구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곳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영구를 실은 수레를 붙잡고서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려왔는데 이제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면서 쓰러져 통곡을 하였다. 이렇게 몰려드는 군중들로 운구(運柩) 길이 막혀 수레가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으며 길 가는 행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追贈) 하였다. 형군문(邢軍門 = 玠)은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그의 충혼(忠魂)을 포장(褒獎)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이 제언은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되자 해변의 백성들은 서로 뜻을 모아 사당을 세우고 민충사(愍忠祠)라 부르며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드렸다. 이때면 그 사당 아래를 지나다니는 상고(商賈)와 어부들도 누구나 할것없이 이 향사에 참례하여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