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의 관액(關把) 중의 하나로 전함(戰艦) 一척과 병선 一척 사후선(伺候船) 二척에 대장(代將) 한 사람과 감관(監官) 두 명을 두고 지켜내려 오던 남해면 선소리에는 그 모습 사라지고 지금은 허물어진 왜성지(倭城址)와 명장 장량상(明將 張良相)의 고고(孤高) 한 동정시비(東征詩碑)만 남아 패자인 왜적의 잔영(殘影)과 승자인 명나라 군사의 환상(幻像)만 느끼게 할 뿐이다.
왜칭남해성-왜성(倭稱南海城-倭城) : 선소리 부두에서 바로 눈앞에 쳐다보이는 낮으막한 산언덕에 서 있던 왜성. 지금은 외곽 성벽은 허물어져 간곳없고 중앙 사령부 짜리 북쪽 성벽 二, 三〇미터만 악마의 잔해(殘骸)처럼 남아 있다. 옛날 왜적들은 이 성을 쌓고 남해성(南海城)이라 불렀다. 이 왜성은 一五九七년에 왜장 협판(脇板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에 의해 축소되고 종(宗義智:소 요시토시)이 초대 성주(城主)로 一천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一년 남짓 주둔하면서 약탈과 살상 방화 등 온갖 만행을 다하던 마(魔)의 소굴인 것이다. 이들은 온갖 악행을 다한 끝에 자멸의 노량해전에 참전하기 위해 一五九八년 十一월 二일 성을 비우고 강진바다를 건너 창선도 앞바다에 다른 함선들과 집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잠깐 남해에 이 왜성이 들어서기까지의 경위를 살펴 보는게 좋을 것 같다. 즉 一五九二년 임진 二十五년 四월 十三일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 당시는 平임)을 제일진(第一陣)으로 하여 제二진 가등청정(加藤淸正) 등 육병(陸兵)이 침공한 뒤를 이어서 협판(脇板安治軍 千五백명) 등당(藤堂高虎軍 二천명) 구귀(九鬼嘉隆軍천오백명) 가등(加藤嘉明軍 七百五〇명) 내도(來島康 親兄弟軍 七〇〇명) 관야(管野正影軍 二百五十명) 유산(桑山重勝軍 千명) 굴내(堀內氏善八百五〇명) 삼약(杉若傳三郞軍 六五〇명) 등 총세 九천 二백명에 이르는 왜수군(倭水軍)이 침공하여 왔다.
왜장들은 자기 함선을 이끌고 전공(戰功)을 앞다투면서 의기도 양양하게 남해안 일대를 한숨에 삼키려고 덤볐다. 그러나 급거 출동한 우리 충무공함대(忠武公艦隊)에 의해 왜적은 제一차 옥포전(玉浦戰)에서 四十二척의 함선을 일조(一朝)에 잃었다. 제二차 당포전(唐浦戰)에서도 처녀 출전한 우리 거북선(龜船)의 활약으로 대장선을 비롯하여 三, 四〇척의 함선을 잃었고 제三차 한산해전(閑山海戰)에서도 협판 구귀 가등등 함선 백여 척과 수천 명의 왜병을 잃고 왜 수군은 괴멸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남해안에서 제해권(制海權)을 우리 충무공에게 완전히 빼앗긴 왜수군은 애당초 남해안 해로(海路)를 통하여 수륙병진(水陸倂進)으로 평양에 이르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구귀 등당등 왜장은 남해안 거제도와 여러 요충해구(要衝海口)에 성벽(城壁)을 쌓고 방위할 뿐 충무공 함대와의 접전 금지령(接戰禁止令)까지 내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러던 중에 부산포(釜山浦)에 잔적 함선들이 준동(蠢動)한다는 첩보를 받고 출동한 충무공 함대의 제四차전인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에서는 잔여 함선 중 백여 척을 격파당하여 왜수군은 완전 괴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一五九八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이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를 삭탈(剝奪)당하고 왕명 거역(王命拒逆)이라는 대죄(大罪)로 나포(拿捕)되어 투옥됨에 이르자 남해안 일대의 전세는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반전(反轉)하였다. 집요하고 계략적인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빼앗은 원균이 몇 달도 채 되기 전에 왜적에게 참패 끝에 무참히 살해(殺害)되고부터 왜군의 기세는 충천(沖天)되어 그 조량 역공(躁梁逆攻)은 격심해졌다.
부산에 모인 왜장 소조천수추(小早川秀秋)와 모리수원(毛利秀元) 등은 회의를 열고 각기 침공 담당 지역을 책임분담 하였다. 그중 우리 남해는 종(宗 義智)과 협판(脇板安治)의 책임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그 밖의 지역 즉 창원 지방은 세천충흥(細川忠興), 이 해남으로 부터 진주(晉州) 고성(固城)까지는 도진(島津義弘), 순천은 송포(松浦鎭信·小西行長) 봉암(鳳岩)은 고교(高橋統增 高橋元禮) 울산은 과도(鍋島直茂) 등이 각각 책임지기로 하였다.
원균의 삼도수군이 무너지자 남·서해안은 하루 아침에 왜수군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즉 一五九七년 七월경에 침공해 온 종(宗義智) 군에 의해 우리 남토도 유린되었다. 왜장 협판(脇板安治)에 의해 급속도로 왜성이 축조되고 종이 왜병 一천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면서 부터 고려조에 왜구들에 의해서 몇 번씩이나 생물구망(生物俱亡)의 참화를 입었던 우리 향토는 다시금 왜적의 약탈과 살상 그리고 무자비한 만행으로 초토화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남긴 왜성은 무려 二十六개나 되는데 일부 재래성을 징강보수하여 사용한 외에는 거의 신축한 성들이다.
대저 일본의 성은 산성을 비롯하여 평산성(平山城) 평성등 형식이 있거니와 왜적들은 성들을 직접 해로(海路)와 연결하게 한 다음 아군 수사와 직충(直衝)하면 육상에서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왜국 측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남해에는 남해읍성(一四六一년 축조) 미조항성(一五〇六년 築城) 평산포성성고개성(城古介城 - 壬辰城으로 推測) 곡포성(曲浦城) 우고개성(牛古介城)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는 용문(龍門) 화방(花芳) 당시 靈藏寺(영장사) 양사찰의 승려(僧侶)들까지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는 하나 왜국 측이나 우리 측 기록에 왜적과 격전이 있었다는 뚜렷한 기록은 아직 입수치 못하고 있다.
이 왜성을 소굴로 하여 一년여의 기나긴 동안 온갖 만행을 자행해 오던 왜군들은 당시 순천에 있던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탈출시키기 위해 고성의 입화통호(立花統虎) 사천의 도진의홍(島津義弘) 등과 더불어 노량에서의 최후의 일전을 은밀히 획책하면서 一五九八년 十一월 二일 즉 노량해전 十八일이나 앞서 이 왜성을 비우고 창선 앞바다로 철수 다른 왜함들과 총집결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함선의 자멸의 항진(航進)이며 그들에겐 황천행 길이었다. 충무공과 진 린의 연합함대에 의해 철저히 분쇄된 왜군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육지로 기어 오른 패잔병(敗殘兵)들 五백명은 왜장 화산(倭將 樺山)의 인솔로 강진바다 해안길을 교묘하게 탈출, 구사일생으로 이 왜성에 숨어들어 잠복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약탈과 온갖 만행으로 고기배를 탈취하고 뗏목선을 만들면서 이틀밤을 이 성에서 지새운 다음 강진바다를 건너 창선도앞바다의 패잔병 집결처에 합류하여 왜국으로 탈출하였던 것이다.
한편 패잔 함선으로 二, 三동면 방면으로 탈출하던 일부 왜적들은 명장 장량상(張良相)의 맹렬한 추격에 못견디어 배를 버리고 야흘산(耶屹山) 원산(猿山) 금산(錦山) 등지로 숨어들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끝내 소탕 되고 말았다.
선소 왜성에 패잔병들이 잠복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군사들을 몰아 장량상은 급히 왜성으로 회군 입성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왜병들은 창선을 거쳐 일본으로 도망친 뒤였다. 그러니 원산 야흘산등지에서의 패잔 왜적 소탕에는 二, 三일이상 걸렸던 셈이다. 일설에는 이 소탕전에 용문사의 의승병(義僧兵)들이 참전하였고 당시의 용문사가 불탄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 : 왜적을 섬멸하기 위해 황급히 왜성으로 회군 입성한 명나라군사는 총지휘관격인 독공정왜유격장군 장량상(督工征倭遊擊將軍 張良相) 지휘 아래 그대로 왜성에서 주둔한것 같다. 얼마간 머물면서 무엇을 하였는지 알길은 없다. 이미 초토화(焦土化) 되어버린 마을이며 농토(農土)를 재건하고 일구는 대민 구제사업(對民救濟事業)을 폈는지 그렇지 않으면 왜군이 무색할 지경으로 백성의 고혈을 빨고 재물과 양도를 약탈하기에 급급하였는지······ 그러나 불쌍한 백성들에게 큰 은덕을 입혀주지 않은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그것은 한개의 명나라 군사 송덕비도 세워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쉽게 짐작 할수 있다.
주둔했던 명나라 군사가 남겨 놓은것은 오직 자기나라 황제(皇帝)의 위엄(威嚴)과 은덕(恩德)을 높이고 군사들의 용감무쌍함을 내외에 과장(誇張)하기 위해 바닷가의 자연암(自然岩)을 깎아 시문(詩文)을 엮은 이른바 동정시비(東征詩碑) 뿐이다. 이 시비(詩碑)는 진주(進駐)한 이듬해인 一五九九년에 완성하였다. 이는 명나라 연호인 황명만역(皇明萬曆) 二十七년이다. 이 시비는 왜성 바로 아랫 쪽 바닷가의 七·八미터가 넘는 큰 화강암(花崗岩)을 내려 깎아 가로 二五三센치 넓이에다 시문(詩文)을 새겼으므로 이를 불러 동정마애비(東征磨崖碑)라는 한다.
이렇게 웅대한 규모의 마애시비는 동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임진 정유란의 유물의 하나로 보존되고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별항에서 설명하려니와 전문(前文)과 一, 二장의 시가 읊혀져 있다. 전문에서도 명나라의 황제 폐하가 왜국이 조선나라를 침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진노(大震怒) 하여 문무장신(文武將臣)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왜적을 쳐부셨다는 과장이고 시 전 후장은 한결같이 명나라 군사들의 용맹을 읊은 것이다. 그것은 당시 천하를 제패했다고 자부하는 명나라의 도도한 입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