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성(城)은 자위(自衛)와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구축된 군사적 설비임 주로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소수의 군사로서 다수의 적군을 오랫동안 막아내려는 의도아래 산성(山城)의 발전을 보게되었다.
이에 반해 읍성(邑城)은 관할하의 소관(所管) 관아(官衙)와 주민들을 수호하기 위해 평지에 축조(築造) 된 것으로 중국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다.
현재 유적(遺蹟)으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산성은 약 五〇(50)여개인데 그 분포를 보면 영남이 十三(13)개로 가장 많고 다음이 평안도의 九(9)개 경기 황해양도의 各 八(각 8)개 전라도 七(7)개 함경 강원 충청도가 각 一~二개정도로 되어있다. 이처럼 태백산 줄기가 뻗쳐진 고산지대에 산성이 없는 것은 산야의 생명이 평야와 연결되는 감제(瞰制)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남해는 우리나라의 최남단(最南端)에 위치한 도서(島嶼)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요새지(軍事要塞地)가 되어 왔다. 더우기 치열했던 고려중엽기부터의 왜구의 침공과 임진 정유란(壬辰 丁酉亂) 때의 왜적방위등 외적을 방위하기 위한 전초적기지(前哨的基地)였기 때문에 군내에 무려 十三개의 성(城)과 봉수(烽燧)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읍성(邑城) 三개소 진성(鎭城) 三개소 민보성(民堡城) 二개소 산성(山城) 五개소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붕괴(崩壞) 또는 형태조차 없어졌으며 봉수로는 금산에 원산과 미조항의 두 간봉(間烽)을 가진 주봉대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성의 축조연대(築造年代)등이 기록된 성지(城誌)가 없어 어느 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추측해 보기조차 어렵지만 우리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이나 왜국측(倭國側) 의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남해에는 남해읍성(南海邑城) 성고개성(城古介城) 우고개성(牛古介城) 미조항성(彌助項城) 곡포성(曲浦城) 등이 있었다고 한다.
비록 행주산성(幸州山城) 이나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성을 에워싼 이름난 큰 싸움은 없었으나 성안에 남아있던 몽돌이라든가 모래알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중엽의 왜구침공때나 임진, 정유란까지 소규모로나마 왜구를 맞아 산발적인 투석전(投石戰)으로 항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 성지(城誌)가 없고 사료(史料)도 입수되지 못한 탓으로 충분하지는 못하나 각 성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南海邑城(남해읍성) ‥‥‥ 남해 읍안에 있던 성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그 형태를 찾아 보기조차 어려우나 세조오년 서기 一四五五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위(周圍)는 二천八백七十六척 높이 十三척이며 성벽위로 담첩인 여첩(女堞) 이 五백九〇여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井) 한곳과 샘(泉) 이 다섯군데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남북에 양대성문(兩大城門)이 있는 성안의 공관으로는 동헌(東軒) 승화당(承化堂) 청금재(靑衿齋) 향사당(鄕射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등이 있었다. 한편 성내(城內) 동쪽에는 진휼창(賑恤倉)과 관청고(官廳庫)가 서쪽에는 수창(穗倉) 이 남쪽에는 대동고(大同庫)와 군향창(軍餉倉) 이 북쪽에는 육군기고(陸軍器庫) 등 창고건물들이 들어 서 있었다.
남해현지에 따르면 이 읍성은 세조사년 당시의 관찰사인 최유경(崔有慶) 으로 부터 「남해섬은 토지 비옥하고 생물이 번성할 수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왜구들의 침공으로 무인지경(無人之境) 이 되어 있으니 축성(築城) 하여 국토를 지킴이 옳을줄 안다」는 상소를 받고 긴급히 인접고을인 하동 사천 고성등 五개군민(5개 군민)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정이오(鄭以吾)의 기문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즉, 남해는 진도(珍島) 거제(巨濟)와 같이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되는바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위치가 왜국과 아주 가까와서 경인(庚寅)년부터 왜구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여 혹은 붙들려가고 혹은 이사를 떠나서 군(郡)의 속현(屬縣)인 평산(平山) 남포(南浦) 가 쓸쓸하게 사람이 없었다. 八(8)년을 지난 정유(丁酉)년에도 바다에서 육지로 나와 진양의 선천(鐥川)에 야처(野處)하였다. 그리하여 토지가 지켜지지 못하고 공물(貢物)과 세부(稅賦)도 받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판도에 기재된 재물과 세부가 나오는 곳이 모두 풀이 성한 사슴의 놀이터로 화하였고 왜구들의 연수(淵數)로 된지가 四十六(46)년이 되었다. 그러나 모신(謀臣)과 지장(智將)의 계산이 실수가 없어 선함(船艦)을 수리하여 수전에 대비하고 성지(城池)를 설치하여서 수비를 엄하게하니 적세가 나날이 쇠퇴해졌다.
지금 임금이 보위에 오른지 四(4)년만에 우수 임덕수(雨岫 任德秀)를 등용하여 구라량만호(仇羅梁萬戶)로 삼고 겸하여 이 고을의 현령(縣令)이 되게하였다. 새 현령이 와서는 새 계획과 은혜를 베풀어서 이로운 사업을 일으키고 민폐되는 일은 없으니 군무가 정비되고 민사도 거양(擧揚)되었다. 그러나 지역이 좁고 험하여서 백성들이 옛날에 살던곳을 그리워 하였다. 현령이 이 말을 듣고 민중과 협의한 다음 도감찰출척사 최유경공(都監察黜陟 使 崔有慶公)에게 사유를 갖추어서 조정에 알리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이웃고을 하동 사천 명주 고성 진해등 다섯고을 사람을 부려 섬복판에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못을 만들었다. 二(2)월에 일을 시작해서 三월에 준공하였다. 남해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서 밭을 갈고 그 집을 꾸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화락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준공된 성내의 동헌(東軒)에는 종五품(從五品)의 무관출신 현령 통솔아래 좌수(座首) 一인 별감(別監) 二인 군관(軍官) 三〇인 장관(將官) 二〇인 인리(人吏) 四〇인 지인(知印) 二〇인 사령(使令) 二十五인 관노비(官奴婢) 三十一인이 배속되어 각기 그 임무를 맡고 있었다.
平山浦鎭城(평산포진성) ……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왜구들의 침공에 대비해서 고려초엽 또는 중엽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고려조때에는 우수사(右水師)를 설치하였으나 이조 세조七년 대대적으로 수축함과 동시에 만호진(萬戶鎭)으로 대치하였다. 그 주위는 불과 천五백여척의 작은 성이기는하나 임진왜란때에는 거북선(龜船) 一척과 병선 一척이 배치되어 있던 군항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때 평산포만호는 김 축(金軸) 이었고 남해 현감은 기효근(奇孝謹) 이었다. 기효근은 一五九六年, 박대남과 김축은 一五九七년 정옹두와 교체될 때까지 충무공 함대에 예속되어 많은 전적을 남겼다.
彌助鎭城(미조진성) …… 우리 남해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진성(鎭城)의 하나이다. 성종五년 서기 一四七四년에 왜구들에 의해 한때 실함(失陷) 되었다가 동十七년에 중수(重修) 되었다고하니 이 성도 고려조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란때는 전선(戰船) 一병선 一사후선(伺候船) 一장졸 二백三十三명이 배속된 중용군항이었다.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일부 성벽만 옛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나 원래 주위는 약 二천백四十六척 높이 十一척에 이르는 중규모의 성이었다. 임진란 초기에는 김응룡첨사(金應龍僉使)가 이를 통괄지휘(統括指揮) 하고 있었으나 중반기에도 성윤문(成允文) 첨사 후기에는 김응성(金應誠) 첨사가 군사를 이끌고 이충무공 예하에서 왜적 격파에 참전하였다.
曲浦堡城(곡포보성) …… 이동면 화계리 현 성남국민학교 자리에 있었던 곡포보성은 중종十六년 서기 一五二一년에 축조된 주위 九백六〇척의 적은 성으로 처음에는 평산포만호 관할아래에 들어있었으나 을미년 서기 一五九五년 八월 당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인 이 충무공이 작전상 이 곡포를 평산포에 병합시킴으로써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수군만호 一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鎭洞鎭城(진동진성) …… 창선면 진동리에 있었던 진성으로 본래는 적량진성(赤梁鎭城) 이라는 홍성현의 진성이었다. 정확한 축조의 유래나 연대는 알수 없으나 그 주위는 천二백척으로 처음에는 수군만호가 있었으나 숙종 十四년에 승격되어 첨절제사(僉節制使) 휘하에 전선(戰船) 一 병선 一 사후선(伺候船) 二 장졸 二백二十七명이 배속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비교적 컸다고 볼 수 있다.
王辰城(왕진성) …… 일명 자땡이성이라 불러워지고 있는 이성은 남면 상가리에 있다. 현재 거의 원형에 가까울 만큼 잘 보존되어오고 있다. 성곽(城郭)은 타원형으로 내성의 서남부 일부는 붕괴되어 있으나 외성은 구축하였던 성벽 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높이는 본래 六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무너져서 五미터 정도로 남아 있으며 예전에는 이 위에 섭돌(女堞)을 놓아 총구(銃口)를 내고 다시 그 위로 二미터정도 쌓아 올렸었다고 한다.성내도처에 집터가 있고 자기(磁器)와 무늬(紋樣) 있는 기와파편이 산재하고 있으며 화전(火箭)과 패총(貝塚)도 발견되었으며 당시 성안에는 성루(城樓) 감시대(監視台) 탑대(塔台) 등과 서원(書院)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성은 비록 이름이 임진성이라이하여 임진왜란때 축조한것처럼 느끼기 쉬우나 전문가들은 축성기법등으로 미루어 그 원류(源流)를 신라·고려때로 소급하여 추정(推定)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고장에서 제일 오래된 고성(古城)일지도 모를 일이다.
大局山城(대국산성) …… 설천면과 고현면계(面界)의 산정(山頂)에 있는 전형적인 산성이다. 주위가 천미터가 넘고 높이 四미터에 이르는 이성은 그 축성기법이 비길데없이 견고(堅固)한 인상을 느끼게 한다. 성지(城址)가 없고 고사기록에도 찾아볼 수 없어 전혀 그 유래를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배되어 온 중국의 어떤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행해왔던 천(千) 장군이 쌓았느니 혹은 경종때 천 장군과 七 시녀(侍女)간에 얽힌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밖에도 고현성(古縣城-주위 천七백四〇척 높이 十척) 고진성(古鎭城 고려 공민왕 十년 所築) 금오산성(金鰲山城 창선면 당항리 주위 一천二백척 높이 十척 임진왜란 때 重修) 관당성(官堂城-주위 七二〇척) 등 유서 깊은 성지들이 많다. 뜻있는 후학들의 남해성지에 대한 연구를 갈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