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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사향록(思鄕錄) - 多樣한 古遺蹟 (다양한 고유적)

내용
多樣한 古遺蹟 (다양한 고유적)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多樣한 古遺蹟 (다양한 고유적) 
 
 
 
錦山烽燧(금산봉수) ······ 봉수는 봉화를 올려 변경(邊境)의 긴박한 상황을 중앙 또는 접경의 군사기지에 알리는 군사상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써 금산봉수는 금산 산상봉의 망대(望台)에 있다.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중엽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개 수십 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조망조건이 좋은 산봉에 설치하여 평시에는 일거(一炬 — 一煙)라 하여 한번 봉화불을 피워 올리지만 적이 나타나면 이거(二炬) 가까워지면 삼거(三炬) 침공해 들어오면 사거(四炬) 접전되었을 경우에는 오거(五炬)로 긴급히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연일접전이면 낭분(狼糞)을 사용하여 봉화불을 피워 올려 서울 목멱산(木覓山-南山)까지 단시간에 정보가 이르게 하고 만약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가 몹시 흐리거나 강풍으로 연기나 횃불이 불통할 때에는 봉수꾼이 릴레이식으로 뛰어 가서 연결된 봉수꾼에 연결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봉수의 경로를 보면 경흥 서수라(慶興西水羅)에서 서울 남산에 이르는 제1거선(第一炬線)과 동래 다대포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2거선 강계에서 내륙지방으로 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3거선의 의주에서 해안을 타고 서울에 이르는 제4거선 순천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제5거선으로 되어 있다. 우리 금산 봉수는 이 중 제2거선에 속하며 최남단의 촉각적(觸覺的)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원산(猿山)과 미조항에 두 개의 간봉(間烽)을 가진 비교적 규모가 큰 봉수였으며 그 봉화는 사천, 진주, 각산(角山), 단성(丹城), 합천, 거창, 추풍령, 청주, 죽산, 용인, 광주 등을 거쳐 한성 목멱산에 전달되었다.
 
 


 
 
南海陶窯趾(남해도요지) ······ 고현면 대곡리 대계재를 올라서면 화방사(花芳寺)로 접어드는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가 바로 남해 유일의 도요지가 아직 매몰되어 있는 곳이다. 여기에 도요지가 있음은 파기퇴적장(破器堆積場)이 이 부근에서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는데 출토된 파기편(破器片)들을 감정한 결과 이 도자기들은 고려자기(高麗磁器)의 영향을 받은 이조초기의 백자라고 감정되었다. 지금 노출되어 있는 파기퇴적장을 중심으로 오미터 내외 땅 밑 어딘가에 본도요굴이 묻혀져 있는 것으로 이의 발굴은 이조 초기 남해 도요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체로 이조시대의 도자기(陶瓷器)의 발전 과정을 연대별로 구분한 학설에 따르면
 

● 태조 성종간의 약 십 년간 서기 1392년-1400년대는 고려청자 백자의 계통에 따르는 도옹기가 만들어진 한편 분청사기(粉靑沙器)가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 태종 연산군 간의 약 백 년-서기 1401년-1506년은 분청사기의 전성시대로 계룡산(鷄龍山) 고령 상주 진주 등이 대표적인 산지였으며 광주(廣州)에서는 백자와 청화진사(靑華辰砂) 등이 생산되었다.

 

● 연산군 효종의 약 백 오십 년간 서기 1506년-1659년에는 분청사기가 점차 쇠퇴되고 백자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는데 주로 청화진사와 철사(鐵砂)로 만들어졌으며 광주분원(廣州分院)의 관요(官窯)가 그 중심을 이루었다.

 

● 효종 청종간의 약 이백 년간-서기 1659년-1863년에는 청화백자의 전성시대로 백자진사(辰砂)도 제작은 되었으나 과거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삼남지방의 자요(各窯)는 거의 모두가 조잡한 도자기를 만드는 민요로 전낙(轉落)하고 말았다.

 

● 철종 고종간의 약 사십 오 년간 서기 1863년-1905년에는 청화진사도 쇠잔(衰殘)할뿐 관요인 광주분원도 공방(貢坊)이라는 민요(民窯)가 되어 그 작품(作品)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과연 우리 남해도요지가 어느 때의 것이며 어떠한 제품을 만들었던가에 대한 문제는 본요가 발굴됨에 따라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개요(開窯)를 여말내지 이조초기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퇴적장에서 출토된 도요의 파편에 대한 감정결과에 의거한 것이며 또 임진왜란 전 이미 영남일때는 백자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느니만큼 우리 남해에서도 그 영향 아래 요업(窯業)이 이루어졌으리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여하간 비록 본요(本窯)는 비록 발굴되지 않고 있어도 퇴적장에서 출토된 파편들은 매우 우아(優雅)하여 차원 높은 도요기술에 의해 제작된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추측은 남해도요의 존속 기간이 몹시 짧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해현지(南海縣誌)에 전혀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추측이 된다. 이렇게 보면 남해도요는 여말이나 이조 초에 개요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폐요(廢窯)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임진왜란 때 왜적들은 영남일대의 유명한 요인(窯人)은 모조리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날의 일본도요의 원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 남해의 요인(窯人)도 왜적에게 잡혀감으로써 자연 폐요(廢窯)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연상(聯想)에서 이다.
 
사실 오늘날 유명한 일본 축전(筑前)의 다까도리야끼(高取燒)의 원조는 임진왜란 때 왜장 흑전장정(黑田長政)에게 끌려간 영남의 위등요인(韋登窯人) 팔산(八山) 그 사람이며 그 지류(支流)라 할 수 있는 원주 따까도리야끼(遠州高取燒)의 원조도 바로 그 팔산이다. 또 풍전의 우에노야끼(上野燒)의 원조는 적장 세천충흥(細川忠興)에게 끌려간 부산의 존계(尊階)이며 비전(備前)의 아라다야끼와 그 지류인 이마리야끼의 원조는 적장 과도직무(鍋島直茂)에게 끌려간 영남 금강요인 이참평(李參平)이었다. 이 밖에도 운천인 거판(巨關-平戶燒-名 中野曉)을 비롯한 수백 명의 요인들이 왜적들에게 끌려 들어가 일본도요들의 제작을 강요 당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름난 일본도요의 원조가 되었던 것이다.
 
고사간에 남해도요에서도 임진왜란 때 요인이 포로되었거나 또는 피신하는 등 일대 수난을 겪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며 이로 인해 과연 폐요가 되었는지 어떤 제품들이 만들졌는지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발굴에 기대되는 바 지대하다 하겠다.
 
 

 
 
德新驛院(덕신역원) …… 고려조에서부터 이조 오백 년에 이르기까지 육상교통으로는 기마(騎馬)와 교자(轎子)가 사용되었고 화물은 인력 우마 이외에 관에서는 대차(大車-두 사람이 상이 끌고 밈) 편차(便車) 곡차(曲車) 강우(杠輈) 등이 있었는데 그 송달과 중계가 이루어지던 곳이 바로 역원(驛院)이다. 역원은 가장 중요한 교통 통신수단으로써 주요도로에는 대략 30리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공문서 등을 전달하는 이외에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馬匹)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 숙식을 알선해주는 한편 진상 헌상(進·獻上)되는 관물의 수송까지도 담당하였다. 역원에는 역장 역리 역졸을 두고 역무를 운영 담당케 하였으며 수십 개의 역을 도(道) 단위로 묶어 찰방(察訪-從六品) 또는 역승(驛丞-從九品)으로 하여금 이를 관장케 하는 동시 중요한 정보도 수집하여 보고케 하였다. 이 역원은 고려 때부터 비교적 잘 정비되어 이 무렵에는 그 수가 54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남해의 역선역원은 노량나루터에서 재를 넘어 들어선 덕신마을 어귀에 있었던 것 같으며 비록 소로(小路-寒驛)였기는 하나 고려조부터 내려온 것으로 역원에는 역장이 하역리 14명이 있었고 중마(中馬) 4필에 복마(卜馬) 5필이 배속되어 있었다. 대체로 우리 남해에는 이 덕신역원을 비롯하여 노량원(露梁院)과 지족진원(只族津院) 등 세 개의 역원이 있었는데 노량원과 지족진원은 당시의 관액(關阨-所渡處) 즉 항구의 조창기점(漕倉基占) 구실을 겸하고 있었음에 비해 덕신역은 이른바 육상역원으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조에 들어 역원을 중심으로 한 전국 도로망은 서울을 기점(起點)으로 한 서울-의주간의 제1선 서울-경흥(慶興) 서수라(西水羅)까지의 제2선 서울-평해(平海) 간의 제3선 서울-유곡(幽谷) 동래 부산간의 제4선 서울-고성 통영(현 충무)간의 제5선 서울-소사(素沙) 참례(參禮)간의 제6선 서울-해남 제주까지의 제7선 서울-충청 수영까지의 제8선으로 엮어져 있었는데 남해덕신역은 제6선인 고성 통영역원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처음에는 역승의 관할 아래 있었으나 중종 30년에 찰방의 관장으로 들어갔다.
 
한편 참고로 당시의 관액인 해운항(海運港)으로는 곤양방면(昆陽方面 渡船場)인 노량진과 진주관 창선방면 도선장인 지족진 그리고 군항(軍港)을 겸한 선소(船所) 전라도 순천방면으로 연결되는 호포진(湖浦津) 등 4개항이 있었다. 노량진과 지족진 호포진에는 각각 진선(津船) 1척씩이 배치되어 해상교통을 맡고 있었으나 선소에는 전함(戰艦) 1척 병선(兵船) 1척 대사후선(代司候船) 2척이 배치되어 대장(代將) 1명과 감관(監官) 2명의 통할 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