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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남해군향우회

사향록(思鄕錄) - 先人들의 遺址와 生活 (선인들의 유지와 생활)

내용
先人들의 遺址와 生活 (선인들의 유지와 생활)
출처
사향록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先人들의 遺址와 生活 (선인들의 유지와 생활)

 

 

西都馬(서도마)의 金海期貝塚(김해기패총)…… 고현면 도마리 서도마에서 도서지방(島嶼地方)으로서는 처음으로 패총유적(貝塚遺跡)이 나타나 사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은 바 있었다. 원래 남해안 지방에서는 김해패총(金海貝塚)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서울대학교 조사연구팀에 의해 발견된 이 패총은 서도마에서 삼봉산(三峰山) 줄기로 이어진 표고(標高) 50미터 안팎의 야산 동쪽과 북쪽 두 단안부(斷岸部)에 광범하게 노출되었던 것이다. 현지표(現地表) 아래 1·2미터 깊이로 약 천삼백 평 되는 언덕바지에 패총적층(貝塚積層)이 두 군데 있었는데 여기에서 출토(出土)된 토기(土器)를 김해기패총(金海期貝塚)이라 부르고 있다.
 
즉 패총단안부(斷岸部)에서 채집한 토기편(土器片) 49점에서 그 기형(器形)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는데 입술이 닿는 가장자리(口緣, 구연) 부분에는 목(頸, 경)이 없이 밖으로 쏠려 있는 것도 있고 3센티 안팎의 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었다. 기복부(器腹部)에는 승석문(繩蓆文) 격문(格文) 등이 보여 김해패총토기의 문양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원래 패총이라는 것은 석기인(石器人) — 석기시대(石器時代)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금석병용시대(金石倂用時代)의 초기 —들이 어로생활(漁撈生活)을 하면서 가장 맛있고 풍족한 식료품인 조개를 까먹고 그 껍질을 버렸던 곳이다. 그곳은 주거지(住居地)의 인접지이기도 하고 그곳이 곧 주거지일 경우도 많다. 그것은 양산(梁山)의 경우처럼 해안선의 변동에 따라 해안선에서 4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기도 하지만 이는 예외이며 주로 해안지대와 하천유역(河川流域)에 많다. 북으로는 두만강구의 서수라(西水羅)에서 평안도 황해도 연안 서해의 여러 도서(島嶼) 중에서도 간혹 발견되었다. 패총은 전부가 순신석기시대(純新石器時代)의 것은 아니며 금석병용시대에 속되는 것도 있다. 김해 회현리의 패총은 적어도 일부는 상당히 후에 된 것으로 보인다.
 
각 시대를 구분하는 상한(上限) 하한(下限) 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異論)도 없지 않으나 최근 일본에서 신석기시대의 승문토기관계(繩文土器關係) 유물을 연대별로 책정한 결과 서력 기원전 수천 년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랜 신석기시대의 토기도 역시 최소한 기원전 2천 년 정도의 것으로 추정(推定) 된다고 김원룡(金元龍) 박사는 그의 저 『남해도서고고학(南海島嶼考古學)』에서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도마리 앞바다의 해안선이 많이 변동되어 큰 마을이 들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해안선이 이 서도마 패총 앞까지 출렁대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선사인(先史人)들이 이 패총에서 집단생활을 영위하면서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먹고 살았음을 상도(想到) 할 때 감개무량한 바 없지 않다.
 
 

 
支石墓(지석묘) ······ 선사인들이 남기고 간 유물 중에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즉 기원전 천내지 2천 년 전 어로나 산양으로 살다가간 선사인들의 묘(墓)를 말한다. 현재까지 우리 군내에서 밝혀진 바로는 남해면 평현리의 4기(四基) 동 양촌부락의 3기 삼천리의 2기 창선면 당항리의 12기 고현면 대곡리의 1기 등 22기가 남아 있다.
 
 
지석묘(支石墓)는 사전시대(史前時代)의 묘의 한 양식이다. 원래 사전시대의 묘에는 토시(土砂) 속에다가 그대로 눕혀 매장하는 토장(土掌)과 토사 대신에 돌로 덮는 적석장(積石掌) 판석(板石)을 사용해서 장방형(長方形)의 관(棺)을 만들어 넣는 석관장(石棺掌) 유해를 직접 땅속에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 속에 넣어 파묻는 옹관장(甕棺葬) 그리고 일명 고인돌이라 하며 납작하고 넓직한 돌을 양편에 똑같이 세우고 그 위에다가 평편한 큰 돌 한 장을 덮어놓는 지석묘(支石墓) 등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지석묘에도 남, 북간에 그 형태가 좀 다르다. 고인돌 식이 북방식임에 비해 남방식은 지하에 냇돌 또는 판석으로 모실(母室)을 짜서 그위에 직접 탱석(撐石, 탱석)을 얹기 때문에 일견 큰 바윗돌이 땅에 놓여져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 남해의 지석묘들이 모두 이 남방식으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이 지석묘들이 모두 신석기시대 것으로 알았으나 묘에서 출토된 마제석촉(磨製石鏃), 마제석검(磨製石劍) 등 출토품과 부장품(副掌品) 등으로 미루어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이 지석묘들은 금석병용기 이전부터 우리 남해에 선사인들이 살아왔다는 발자취의 하나이다. 서도마의 김해기패총과 더불어 귀중한 유물 유적들이라 하겠다.
 
 

 
 
原始生活考(원시생활고) ······ 우리 남해에 언제부터 선사인들이 이주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대는 알길이 없다. 다만 앞에서 살펴 나온 바와 같이 허다한 지석묘와 서도마의 김해기패총 같은 선사인들의 유물 유지에 따라 적어도 기원전 2, 3천 년 전부터 살아온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들은 과연 어떤 원시생활을 영위하였을까? 물론 남해 특유한 원시생활을 추출(抽出)할 수는 없으나 사학자(史學者)들은 석기시대의 생활양상을 대개 이렇게 기록 추측하고 있다.
 
즉 석기인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껍질로 몸을 가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신석기 시대로 옮겨질 무렵에는 직조술(織造術)과 바느질도 상당히 발달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유적에서 발견된 방수차(紡錘車)와 재봉용 골침(裁縫用骨針) 등에서 추정되었으며 이 무렵은 제법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와 옥(玉)으로 만든 장신구들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치된 의견이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순전한 채집생활 즉 아무런 도구도 사용할 줄 모르고 실과를 따 먹거나 적은 동물들을 잡아먹는 원시생활이었으나 점차로 석기인들의 생활양식은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고 본다.
 
즉 하나는 해안 또는 강변의 평지대에 정착하면서 조개를 잡아 주식으로 하는 한편 점차 골각(骨角) 등으로 바늘 또는 창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아온 어로위주(漁撈爲主)의 절문토기인(櫛文土器人)들이 하나이며 산기슭이나 산봉우리 또는 산맥의 대장지(台狀地)에 자리를 잡고 주로 농경(農耕)을 위주로 한 무문토기인(無文土器人)이 그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패총을 남겼으며 후자는 반달모양(半月形)의 석도(石刀)라든가 석부(石斧) 등 농경용구를 남겼다.
 
그러나 금석기병용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오늘날의 벼의 경작이 널리 행해졌으며 이는 김해패총 경주월성성벽 밑의 당대의 유적에서 벼 껍질이 많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농경 이건 어로생활 이건 필연적으로 집단부락을 이루어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며 농경은 주로 여자들이 위영하고 남자들은 사냥에 종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식물의 조리방법에 있어서는 주거움막의 중앙부에 화로를 설치하고 그 위에 토제 용기를 걸어 음식물을 삶아 먹거나 구어 먹었던 것이며 석기중에는 맷돌의 역할까지 하는 도구도 발견됨으로써 능히 분식(粉食)을 해먹은 것도 분명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 금석병용기에 접어 들어서부터는 떡 시루같은 토기도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조리방법이 상당히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거(住居)는 대개 우로(雨露)를 피하고 냉기(冷氣)를 막는 정도의 수헐식(竪穴式) 주거양식 즉 땅을 파고 지면에서 지붕을 덮은 오늘날의 움막집과 비슷한 구조로 알려져 있다.
 
이 움막집은 수혈내부에 가느다란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사용해서 직접 석가레를 기대놓은 것이 그들의 주거지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보통 五, 六명 정도가 거처할 수 있는 넓이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것이 기원전 五백년이건 천년 이상이건 까마득한 그 옛날 산마루에서는 짐승을 쫓고 바닷가에서는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창으로 찌르고 뛰는 선사인들의 덥수룩한 얼굴들이 오늘도 선하게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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