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면 양아리 두모에서 금산 부소암(錦山 扶蘇岩) 쪽으로 오르는 계곡의 큰 화강암에 새겨진 글자 모양의 각석(刻石)을 두고 오래전부터 남해각자(南海刻字) 또는 서시과차(徐市過此)라 불러오고 있다. 전설에는 중국 진시황(秦始皇) 때 삼신산 불로초를 캐기 위해 시종장(侍從長)인 서시(徐市)이 동남동여(童男童女) 오백 명을 거느리고 영악(靈岳)으로 알려진 이곳 금산을 찾아들어 한동안 사냥까지 즐기다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겨놓기 위해 이 각자를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이 전설에 의거(依據)해서 이 각석을 서시과차(徐市過此)라고 해독하는가 하면 어느 학자는 서시기배일출(徐市起拜日出)이라고 해석하고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인보(鄭寅普) 선생 같은 이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로 보고 「사냥을 하러 이곳에 물을 건너와 기(旗)를 (꽂다)」라고 해독하고 있다. 이 해 독법은 일본 북해도(北海道)의 어느 동굴속에 이와 비슷한 고문자가 있어 그것을 이렇게 풀이한 백조(白鳥庫吉) 박사의 견해에 따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년에 들어 S대(大)의 모교수(某敎授-學說未定正으로 匿名으로 함)는 글안족(契丹族)의 문자 같다는 견해를 표시한 바 있었고 인도의 데세판데 박사는 이는 고문자가 아닌 선각(線刻) 즉 「이곳은 이어른의 사냥터 임」이라는 표적인 그림이라는 것이다. 가로 七미터 세로 四미터의 큰 바위 한족 모서리에 가로 一미터 세로 五십센치 폭에 1센치 깊이로 새겨져 있는 이 남해각자는 내용 해독커녕 고문자냐 선각이냐의 판별조차 되지 못한 채 오늘도 신비(神秘)의 베일 속에 싸여진채로 있다. 그러나 미구(未久)에 완전 해독되어 그 진가(眞價)가 내외에 과시될 날이 있을 것으로 믿는 바로 여기에 이 고문자에 대한 견해 몇 가지를 제시해 두고자 한다.
徐市過此說(서시파차설) :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시과차」라는 고문자는 진시왕의 시종(侍從) 서시(徐市)가 왕명을 받고 삼신산 불로초를 캐기 위해 금산에 들렸다가 새겨둔 글자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고문자를 「서시과차」로 해독한 것은 무슨 고문자 내지 화상문자의 구성원칙에 따라 판독(判讀)된 것이 아니라 그림 (一)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그 글자의 형상에 맞추어 유사(類似)한 한문자를 끼워 맞춘 것 같은 불안감을 배제(排除)치 못해주고 있다. 즉 그림 (一)의 ⑧의 부분 인도의 데세판데 박사가 창(槍)이 꽂쳐 있고 일격을 가하려는 사냥꾼 그림으로 풀이한 그림 부분을 합치면 徐字 비슷한 감을 준다. 그래서 徐字로 읽었고 둘째 市字는 ④ 즉 사냥꾼 앞에서 최후 발악을 하는 사냥감 그림의 모양에서 市字자를 따르며 ①의 귀인(貴人·主人公)이 앉아있는 의자 등 그림 분위기에서 過字를, ②의 귀인의 애견(愛犬)을 此字로 풀어 「徐市過此」로 해독해 내려온 것 같다.
狩獵線刻說(수렵선각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중앙박물관장(中央博物館長) 데세판데 박사는 이를 각자(刻字)가 아닌 선각(線刻)이라 해독함으로써 내외 고대사 및 고고학계(內外 古代史 考古學界)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였다.
즉 데세판데 박사는 이 선각은 一천二, 三백년 전 것으로써 그림의 주제는 「이곳은 이 어른의 사냥터 임」이라는 이른바 어느 귀인(貴人)의 사냥 기념 내지 사냥터의 표지(標識)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앞에 제시한 그림(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① 부분은 주인공인 왕 또는 귀인이 가마 모양의 의자에 앉아 사냥을 구경하고 있는 그림이며 ②는 발랄한 그의 애견 ③은 주인공에게 무엇인가 진상(進上)하고 있는 시종(그 너무나 왜소하게 그려진 모양은 당시 주인공과 시종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음) ④는 사냥감 동물로서 지쳐는 있으나 최후 발악을 하는 형상이고 ⑤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사냥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 흥미 있는 것은 이 데세판데 박사의 주장대로 분석된 그림 부분 하나 하나가 예로부터 한문 글자 한자 한자로 풀이되어 「徐市過此」로 해독되어 왔다는 점에서 비록 대차적이긴 하나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이라 하겠다.
즉 이 그림의 ⑤ 부분은 한자의 「徐」, ④ 부분은 「市」, ③ 부분은 「過」, ② 부분은 「此」로 읽혀져 「徐市過此」라 해독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특히 선각설과 더불어 주목이 되는 것은 이 그림 속 주인공의 머리에 씌여진 관(冠)의 모양이 현재 김해(金海)에 있는 수로왕비(首露王碑)의 태양상징(太陽象徵) 그림과 비슷하다는 설이다. 만약 그것이 확실하다면 이 그림 속의 주인공은 바로 수로왕 자신이거나 또는 二, 三세의 왕 또는 수로왕가의 왕족으로 쉽게 추정(推定)할 수 있다.
선각 ⑥ 부분을 확대한 것이 그림 (二)로서 그 측면 그림이 그림 (三)인 김해 수로왕비의 태양상징 그림과 흡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과연 고문자인지 선각인지 또 그 주인공이 쓰고 있는 관 모양이 수로왕가의 태양의 상징 마크와 동일한 것인지 여부는 앞으로 두고 석학(碩學)들에 의해 밝혀 지겠거니와 여기에서는 인도의 데세판데의 판독을 얻게 된 경위와 주인공의 관 모양설에 대한 경휘를 밝혀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십여 년 전부터 이 신비한 각자의 베일을 벗겨서 희귀(稀貴)한 문화재로써의 위치를 확보케 하고자 많은 내외 학자들에게 그 해독을 의뢰해 왔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1974년 마침 아동문학가(兒童文學家)이며 고대사 연구가(古代史 硏究家)인 이종기(李鍾琦) 씨가 인도 정부의 초청으로 떠난다기에 간청하여 고고학계(古考學界) 최고권위자인 중안박물관장을 찾아 단번에 선각이라는 판정을 내려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종기 씨는 이 선각을 부분적으로 분석하면서 연구를 하다가 주인공의 머리에 씌워진 관 모양이 김해 수로왕비에 있는 태양상징 마크와 같은 것을 발견하고 이 주인공이 수로왕이거나 그 직계 왕손 또는 왕족일 것이라는 추적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동년 9월 5일 저자가 주재하는 남해향토문화연구회(南海鄕土文化硏究會) 주제로 서울 태평로 신문회관에서 연세대학교 박물관장 손보기(孫寶基) 박사 배석 아래 전국 일간 통신사 담당 기자(記者)들을 초치코 「남해선각에 대한 연구 발표회」를 개최하여 지상을 통해서 내외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그러나 상금(尙今) 관계당국이나 고고학계에서 「각자냐? 선각이냐? 그 내용은?」 등에 대한 최종적인 판정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사적인 견해(見解)이기는 하나 국내 최대급 사설 미술관(最大級 私設美術館)인 에밀레 미술관장 조자룡(趙子庸) 선생 같은 이는 탁본을 통해 「천 년, 이천 년이 아닌 적어도 오천 년 전의 고문자」라고 그 보존(保存)을 당부하고 있으며, S대의 모 교수는 글 안족(契丹族)의 글자 비슷하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契丹族文字說(거란족문자설): 모 교수의 글 안족의 글자 비슷하다는 견해는 필자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것은 비록 그 규모나 글자들의 형상이 「서시과차」와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적은 하나의 간단한 표지 같은 인상(印象)의 글자가 양아리 해안벽연부락(海岸·碧 端部落)에서부터 「서시과차」에 이르는 이 위치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섯 군데나 길목 바윗돌에 뜸뜸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직각적인 연상(聯想)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지만 처음 금산을 찾아든 이민족(異民族)들이 그들의 상륙지점(上陸地點)과 배로 돌아갈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군데군데 표시를 하면서 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당시는 깊은 수목이 묶어져서 이 도표(道標) 없이는 배를 찾아 돌아가기 어려웠을 것으로 그들이 문제의 「남해각자」가 새겨진 평평한 큰 바위에서 휴식하면서 기념으로 고문자를 파놓고 내려온 것이 아닌가.
각설(卸說)하고 그들이 글안족(契丹族)이라면 그것이 과연 어느 시대인가 파문의 탓이겠으나 글안족의 남해안 침공이란 들은적도 없었고 더우기 낙도(落島)인 남해를 탐승(探勝)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를 면밀히 추구(追突)한 끝에 글안족의 남해 금산 탐승 가능성의 기회는 있을 수 있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1218년경 글안족의 포로를 집단 수용했던 글안장(契丹場)이 당시의 산남도(山南道-지금의 경남도)와 해양도(海陽道-지금의 전남도)에 있어 지역적으로 금산을 찾아들기 쉬웠던 까닭이다. 특히 그들에게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었던 것 같다.
契丹場(글안장): …… 원래 이 글안족은 고려 성종 12년 서기 993년경부터 네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폭악한 종족들이었다. 네 번째 침공은 현종 9년에 감행되었으나 여장 강감찬(姜邯贊)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고 말았다. 이 네 차례의 싸움에서 잡은 글안 포로는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약 200년간 잔잔했던 글안군은 고종 5년 서기 1218년 재침공을 감행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조충(趙沖)을 원수(元帥)로 하고 김취만(金就礪)를 병마사(兵馬使)로 삼아 이를 섬멸하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징기스칸(成吉思汗)의 휘하 원수인 합진(哈眞)과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으로 강동 지역(江東地域)을 포위 공격하여 대압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몽장합진(蒙將哈眞)은 답례조로 글안인 남녀 포로 700구(口)와 본국의 포로 200구를 고려 측에 전리품격(戰利品格)으로 주었다. 조충 원수는 이 포로들을 송경(開城)으로 데리고 돌아와 그중에서 기예 소유자(技藝所有者)는 송경에서 공예 분야에 종사시키고 나머지는 각 도의 인구가 희소한 곳에 분산 수용케 하여 농경사역(農耕使役)에 종사케 하였던 것이다.
이 포로의 집단 수용소를 글안장(契丹場)이라 불렀다. 이 포로들에게는 농경에 종사하는 외에는 생활과 행동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었다고 하니 당시 행정적으로 속해졌던 산남도 글안장의 포로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산남도 소재 글안장 포로들이 명승으로 이름난 금산을 탐승하려 한번쯤 찾아둘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이지만 이렇게 연상해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당국이나 고고학계에 의해서 이 신비의 베일이 하루빨리 벗겨지기를 희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