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배평모 - 향우 글과 고향에서 온 글
상세내용
숭어와 난초
내게 있어 고향은 은하계처럼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고향을 떠나온 지 60년이라는 세월이 아득한 거리감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나와 고향을 이어줄 윗대 어른들의 산소는 물론 대소사에 찾아갈 만한 친척마다 없기 때문이다.
북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만나야 할 사람들이 그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태어나서 자란 고향산천은 한 인간의 기억의 밑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책상 한 쪽에 붉은 빛을 띤 자두만한 돌과 메추리 알 보다 큰 흰색과 검정색 돌이 놓여있다. 세 개 다 모난 데가 없이 동글동글한 돌이다. 이 돌들은 끊임없이 내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있다. 지난봄에 희곡작가 박정기 선배, 서예가 안동해 선배와 함께 읍에 있는 '탈박물관'에서 하루를 묵고 오는 길에 내유년의 바닷가에 들러서 주워온 돌들이다.
나는 글을 쓰다 말고 자주 그 돌들을 보며 기억이라는 길을 따라서 먼 과거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 길에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 누구를 만나기도 하고 행복했던 어느 시점에 머물기도 한다. 힘들고 불행했던 어느 고개에 이르면 지금의 나를 키워준 힘이 거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아득한 유년의 벌판에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미조이지만 아련한 기억과 더불어 자란 곳은 목섬, 항도이다. 몇 살 때 목섬으로 갔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는 노구국민학교에 입학한지 한 달 남 짓 만에 부산으로 떠나왔다. 고향에 대한 나의 기억은 목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다 문우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고향 얘기를 할 때면 모두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감탄을 한다.
남해 사람이면 누구나 목섬 바닷가에서 자잘한 몽돌(자갈)이 깔려있다는 걸 알고 있으리라.
밝은 달밤, 잔파도가 밀려왔다가 몽돌들을 굴리며 쓸려가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처럼 내 정신의 깊은 골짜기에서 지금도 들려온다. 하지만 이 얘기는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달밤과 몽돌이 깔린 해변, 그리고 잔파도는 상상이 되어도 파도가 몽돌을 쓸고 가는 소리는 쉽게 상상을 못한다. 그저 막연한 아름다움을 그려볼 뿐이다. 그러나 실증적인 두 가지 추억담을 얘기하면 전설 같은 사실을 유추하면서 누구라도 감탄을 하곤 한다.
목섬에는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작은 개천이 되어 마을을 끼고 바다로 흘러간다. 내가 살던 그 시절, 몽돌이 깔린 해변에 다다른 개천이 움푹 패어서 작은 웅덩이가 되었다. 웅덩이라고 해야 어린 우리들 정강이 정도의 깊이였다.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그 웅덩이를 벙벙하게 뒤덮으며 밀려왔다. 밀물과 함께 숭어 떼가 와서 썰물이 빠져나가는 줄도 모르고 둥글게 회유를 하며 놀다가 웅덩이에 갇혀버리곤 했다. 숭어들이 작은 웅덩이를 가득 매우고 퍼덕거렸다.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조무래기들인 우리는 두손으로 숭어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겨우 숭어를 한 마리 끌어안고 웅덩이 밖으로 나와서 저만치 놓아두고 다시 가서 안고 나왔다. 어린 우리 조무래기들에게 숭어는 곧 바다였다. 바다가 어린 우리 조무래기들 품 안에 있었다. 팔팔 살아서 힘차게 생동하는 바다를 우리들은 품에 안고 있었다. 은 빛 비늘은 바다의 물결이었고 싱싱한 비린내는 바다 냄새였다.
그 때, 우리들은 이중섭 그림 속의 고기를 안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먹을 것이, 입을 것이, 모든 것이 부족했던 그 때, 숭어를 안고 있었던 우리들은 그림 속의 아이들이었고 동화속의 아이들이었다.
남해는 춘란이 가장 많이 자생하는 곳으로 꼽힌다. 요즘 난을 키우는 취미는 그 사람의 격을 돋보이게 하는 고상함으로 누구나 다 인정을 해준다. 난이 지닌 기품을 선비들이 귀히 여겨서 대, 매화, 국화와 더불어 사군자로 대접을 받았던 탓이리라. 허지만 그 시절 춘란은 그냥 풀이었다. 봄에 꽃대가 올라오면 기품 있는 난초의 꽃이 아니라 꼰밥으로 불리는 풀꽃이었다.
봄이 되면 목섬을 말발굽처럼 감싸고 있는 산자락에 불타오르듯이 진달래가 피었다. 겨우내 허기진 우리 조무래기들은 진달래가 피어 있는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마치 모래 속에 알에서 부화한 거북 새끼들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바다로 기어가듯이.
붉은 진달래의 연한 꽃잎은 배속의 허기 보다 우선해서 정신의 허기를 채워주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이 자아로 인식하기 이전의 자연이 전해주는 신비이자 섭리였다.
우리들은 진달래와 함께 꼰밥도 꺾었다. 다복 솔 밑에 있는 춘란 포기에서 솟아오른 꼰밥은 진달래와 함께 봄의 정기를 우리들에게 전해주었다. 꼰밥 마디에 있는 얇은 갈색 껍질을 벗겨내면 꽃대와 연두색 봉오리는 상큼한 수분이 배인 연한 섬유질 먹이였다.
진달래와 춘란 꽃대를 잔뜩 꺽어서 숭어를 안듯이 품에 끌어안고 양지에 앉아서 아작아작 씹어 먹는 우리들은 봄을 먹고 있었다. 그 때, 우리들은 궁핍한 어촌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바다를 품에 안고 봄을 먹고 있는 동화 속의 아이들이었다.
내 기억 속의 고향은 그렇게 살아있다. 몽돌을 쓸고 가는 파도와 달빛, 포구 앞에 떠 있는 두 개의 작은 섬, 산에서 흘러내려온 실개천, 실개천에 살던 민물장어와 참게, 철 따라 잡히던 온갖 고기들, 갱번에 넣어놓은 멸치, 배를 갈라서 말리던 갈치, 이런 그림들이 바다를 안고 봄을 먹고 있는 우리들의 주위에 깔려있다.
한 인간의 생에서 60년은 너무나도 긴 세월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퇴색 시킨다. 그리고 실제거나 혹은 기억속의 것 모두의 선명함을 지운다. 그래서 인간은 출발점에서 서서히 멀어지다 마침내 사라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향에서 참으로 멀리 떠나왔다. 60년이라는 세월은 가늠이 안 된느 먼 거리이다. 대양으로 나간 연어가 모천으로 귀환하여 알을 낳고 생의 여정을 끝내듯이 나 또한 그리하고 싶다. 작은 방 한 칸에 앉아서 내삶의 긴 여정을 글이라는 알을 낳아 부화 시키고 싶다.
고향 바다의 바람과 물빛, 철 따라 피는 꽃과 새들의 울음소리, 멀어져 간 내 유년의 전설과 모습을 바라보면서 글을 쓰고 싶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도 행복한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