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박성재 - 향우 글과 고향에서 온 글
상세내용
약천(藥泉) 남구만의 '시조' 성립과 창작 배경
21세기는 '문화경재력시대'라고 한다. 지자치제의 신성장동력원의 일환으로, <시조> 창작지 배경지로 약천문화마을이 지정되면서 지방에서 출발한 남구만의 문학연구는 점차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서의 남구만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에 남해유배문학관 개관 후 첫 학술 심포지엄으로 약천 남구만 선생의 인물과 작품을 연구한 전문연구자의 발표와 토론자의 질의응답시간에 필자가 남해 유배지에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를 창작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고 주장한바 있었다.
이제는 남해유배지가 가지는 역사적 · 지정학적 배경이 유배문학작품들에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지 제대로 살펴보고 새롭게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남해가 가지는 지정학적 · 시대적 배경에서 권농가인 영유시(詠柚詩)가 창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쟁을 일삼는 조정대신들의 질책내용으로 고도의 은유적으로 농축된 상징적 의미와 지명(地名)의 심상에서 창작되어진 영유시는 그 당시 서포 김만중과 주고받은 시와 서찰 등이 근거가 되기 때문에 남해적소에서 창작되어졌다는 확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시조>의 창작배경지를 전개함에 있어 현지 조사를 병행하여 유배지의 적소와 연계한 지명과 <시조>의 주제가 권농가인가, 아니면 정치풍자인가 등에 대한 근거로 지속적으로 문화유적을 복원하고 있는 지자체도 있다. 이와 같이 각 지자체에서는 <시조>의 창작배경지를 유리한 쪽으로 그 내용을 정리?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추다보니, 정작 <시조> 속에 나타난 지명의 심상 분석, 작가 약천의 시대인식과 삶의 지향점, 어지러운 시대적 상황과 백성들의 어려운 삶의 모습에서 창작하게 된 권농가 영유시(詠柚詩) 등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는 논의를 펴지 못하였으며, 주장하고 있는 자료들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였다.
이상에서 기존에 이루어진 <시조> 창작배경지에 대한 연구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러한 연구됨에 있어 그 연결고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거나, 이어지더라도 어느 한 국면만이 연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근거 자료보다 더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지명과 역사적 배경을 위주로 한 남해 적소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해 유배지에서 그가 남긴 유자에 관한 시(詠柚詩)와 서포 김만중과 주고받은 편지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약천 남구만 <시조> 선행연구 검토
노규호는 「남구만의 선양사업을 위한 문헌적 연구」에서 국문학적 관점으로, ① 남구만은 어떤 인물인가. ② 남구만이 약천마을에 귀양 온 것이 사실인가. ③ 남구만이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를 지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④ "동창이 밝았느냐"를 남구만이 약천마을에서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⑤ 남구만이 지었다는 시조의 주제는 권농인가, 아니면 정치적 풍자인가 등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배재홍은 「약천 남구만의 정치현실 인식과 역사지리 인식」에서 역사학적인 관점으로 남구만이 동해시 약천마을에 유배온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면서 남구만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가 별로 없는 현실에서 그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박도식은「약천 남구만과 동해시의 관계」에서 남구만이 동해시 약천마을로 유배 온 동기를 정치적인 상황과 문헌을 근거로 밝혔으며, 또한 남구만의 <시조>의 창작지가 동해시가 아니라, 용인군 모현면 갈담리에서 왕산리로 넘어가는 '장사래 고개'라는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면서 동해시 약천마을에서 이 <시조>를 지었다는 타당성의 근거를 역사 · 민속학적으로 제시하였다.
양언석은 「약천 문화세계 연구」에서 조선조는 성리학을 정치적 이념에 대한 회의로 민중의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대적인 변화를 조선조 후기의 사회가 요구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약천 남구만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남구만이 활동하던 17세기는 주자학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더욱 주장하는 세력과 주자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수용하려는 두 축의 대립과 갈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남구만은 기존의 주자학을 비판하였고 새로운 문화와 사상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론과 창작으로 새로운 시풍을 형성하였다고 한문학적인 입장에서 주장하였다.
2006년 이승철은 그의 논문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남구만의 <시조> "東窓이 밝갓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창작배경지를 현장답사를 통한 민속학적 연구를 뒷받침하여 약천마을에서 남구만이 이 <시조>를 지었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약천 남구만 <시조> 문학과 약천 마을에 관련된 국문학, 민속학, 역사학, 등의 다방면에서 접근한 선행연구를 검토해 보았다. 남구만의 <시조>는 "東窓이 밝갓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작품이 한 점만 전승되는 관계로 지금까지 학자들의 관심 밖에서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화 시대가 도래되면서 약천마을이 1997년 문화마을로 지정되고 지역의 대학과 학자 · 향토사학자들에 의하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약천 남구만 <시조> 탄생지 남해일 가능성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연구 결과물인 <시조> "東窓이 밝갓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창작배경지를 남해유배지가 가지는 유배문학과 관련 지명의 동일성과 권농가인 영유시(詠柚詩) · 서포 김만중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정치하게 분석하여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추가하려는 이유는 <시조>가 어느 유배지에서 썼다고 하는 정확하고 명확하게 창작 배경지를 밝힌 역사적인 자료는 없다는 것이다.
<시조>의 성립과 창작 배경을 분석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사항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창작 연대의 분석 : 유배지에서 창작된 대부분의 시조는 작가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왜 그 시조를 쓰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됨으로써 시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결국 남구만의 <시조>는 조선조 숙종 때 창작되었으며, 시대배경은 당쟁으로 어지러웠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남해유배지에서 약천 남구만과 서포 김만중과의 호형호제했던 막역한 사이로 용문사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풀만 제거하고 뿌리까지 미치지 못하여/ 들판 불이 탔지만 이내 봄이면 무성했네/ 그 공은 높아 우왕이 치수(治水)함과 같고/ 그 힘은 맹자가 양주(楊朱)를 물리침과 같네/ 남긴 문장은 해와 별처럼 드러나서/ 어리석은 선비도 가려잡을 줄 아는데/ (생략) 『서포만필』하권)에서 '풀과 뿌리' · '해와 달' · 치수(治水)를 비유해서 권농가인 영유시를 노래했다는 대목은 남해 유배지에서 <시조>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찰(그대가 한번 사방 벽에 창문이 있는 방에다가 높은 병풍을 둘러치고 그 가운데 누웠다가 동방이 처음 밝아올 때에 밝은 빛이 병풍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을 묵묵히 관찰한다면 하늘과 땅이 비록 멀지만 문을 나가지 않고도 그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등잔 밑에서 대강 초하느라 일일이 다 말하지 못하니, 어이하면 그대와 서로 대면하여 여러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겠습니까. [각주: 藥泉集 第三十(약천집 제삼십)])에서 비록 당쟁에 패배하고 한양에서 천리 길 먼 곳 남해에서 귀양살이를 할지라도 유학자로서 숙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주제로 남해 특산물 유자(농산물)를 소재로 선택하여 그들의 충성심과 농민들의 애환을 표현한 것은 권농가와 정치적 풍자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시조의 상징적 분석: 작품 속에 나타난 고도의 은유와 상징성을 종합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해야 한다. 약천은 남해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 유자시 20수를 지었다. 그러나 단순히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지은 것만은 아니었다. 유자라는 미물을 통해 부모와 농민과 임금에 대한 정을 표출하고자 한 의도로 볼 수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서포 김만중과의 주고받은 시를 통해 농사와 관련지어 남해 농민들의 어려움의 일면과 또 다른 생업에 성실한 남해 농촌사람의 정황을 생생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 <시조>의 영원한 생명력은 남해 농민들의 검소하고 성실한 생활력을 소재로 밝고 성실한 모습에서 "들판 불이 탔지만 이 내 봄이면 무성했네"라고 희망가를 불렀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해와 별처럼 드러나서"등 치수(治水)와 천문 역법에 대해 형님인 약천에게 동생인 서포가 "그저 내 잘못을 기록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희작하여 조심스럽게 서로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호형호제했던 막역한 사이로 불교에의 친화적 사색의 폭이 넓어졌음을 남해적소에서 썼다고 하는 그의 산문집 『서포만필』하권에서도 풍부하게 확인되어지고 있다. 서로의 사상과 철학의 깊이를 재는 바로메타를 남해적소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서로가 남해 용문사를 왕래하면서 선승과의 만남으로 남해 특산물인 유자(柚子)를 권농가로 노래했으며, 유자를 유자(儒者)로 파악하고 불교에 천착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지명(地名)의 분석: 남구만이 남해 유배되어 유람하면서 썼던 '영유시 20수' 중에서 용문사 대웅전 소반위에 놓여있던 유자를 노래했던 시 등에서 볼 때, 용문사에서 동쪽으로는 앵강고개(鶯江谷)(재)를 넘어서면, 성현(作介)을 지나면, 장전리 (긴사래 밭)가 있다는 점은 <시조>가 남해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작개'라는 말은 노비보유자층이 노비에게 전담을 분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하에 경작케 하는 영농방법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작개제'는 노비보유자가 노비에게 '작개' 와 '사경'을 짝지어 나눠주고, 노비는 이것을 가족 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토지경영방법이다. 여기서 '작개(作介)'는 앵강만 고개 넘어 성현리(작개)를 지금도 '작개'라고 칭하고 있으며, '작개'를 지나 '장전(長田)'이란 사래긴 밭이 있다는 점에 대하여 재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장전리'는 뒷쪽 산 등성이의 형국이 마치 「언치」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언치」란 마소의 등에 깔아 사람이 편안히 앉을 수 있게 만든 물건이다. 안장(鞍裝)과 비슷한 물건이라고 하면 틀림이 없다. 순 우리말 이름은 「다래밭 널」로 「말 언치처럼 기다란 밭들」이란 뜻이다. 지금도 「다래밭 널」로 부르는 古老들은 간혹 만날 수 있다. 「다래밭 널」의 한자 표기가 「장전」임을 알 수 있다.
약천 역시 유자로 인해 남해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알리고 싶은 심정에서 남해군 이동면 성현(作介) · 장전(長田) · 앵강고개(재)를 지명의 심상을 <시조>로 표출한 것이라 하겠다.
당시 지주들은 일 년 농사가 끝난 후에는 임의대로 병작지를 회수할 수 있었으며, 지주와 작인 간에 맺어진 병작계약의 효력은 대체로 농사철 동안만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사철에 병작지를 회수할 경우 그때까지 들어간 비용을 변상해주어야만 했다는 것은 작개가 많이 적용된 데서도 입증된다 하겠다.
또한 작개 경작에 동원된 노비들은 태업이나 수확물의 은익을 일삼았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을철 유자가 익을 때에 아전을 보내어 나무마다 숫자를 세어 두었다가 바람으로 인해 낙과되면 그 주인이 다른 곳에서 사다가 더 보태어서 그 숫자를 채웠다고 하는 것은, 관청에서 무리한 세금부과로 인해 핍박했던 당시의 농촌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신상구는 논문에서 "약천의 이러한 생각은 남해에 머물면서 유자(柚子)를 통하여 유자(儒者)의 삶을 경계하기 위한 시인 영유시 속에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하면서, "그것은 주역의 박괘를 시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점과 유자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의 삶을 형상화하는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조> "東窓이 밝갓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성립과 창작배경지가 남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일부 지자체에서 주장하고 있는 자료보다 더 논리적이고 이치와 사리에 맞는 근거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남해유배지가 가지는 유배문학과 관련 지명의 동일성과 권농가인 영유시(詠柚詩) · 서포 김만중과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정치하게 분석한 결과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추가하려는 합당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 <시조>는 유자농사를 짓는 남해 농민들에게 과도한 조세부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현지사정을 직시하고 목민관과 농민들에게 내린 엄정한 훈계라고 할 수 있겠다. 남해가 가지는 지정학적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되어진 권농가 · 독농가가 바로 영유시(詠柚詩)다. 그 주제인 유자 시 에서 권농(勸農)가 · 독농가 그리고 고도의 은유적으로 농축된 상징적 의미와 작가의 이념적 세계, 정치적 풍자, 당시의 사회상을 폭넓게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시조>의 창작지를 밝힐 수 있는 바로메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시기와 동기는 남해작으로 귀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