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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김동규 - 항우 글과 고향에서 온 글

내용
김동규 - 남쪽바다 내 고향의 그 때와 지금
출처
재경남해군향우회

상세내용

남쪽바다 내 고향의 그 때와 지금

 

 

 

객지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때 자랐던 시골 농촌의 고향산천이 아련한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지난날의 온갖 추억과 함께 더욱이 선명해 질 것이다.

지금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가능해진 교통기관의 발달, 거미줄 같은 통신망으로 서울이나 남해나 옛날의 이웃마을처럼 변하고 말았지만 50여 년 전만해도 남해서 서울 가려면 노량이나 서상에서 여수까지 배를 타고 가서 다시 여수역에서 오후에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12시간 정도 달리면 뒷날 이른 새벽에 서울역에 닿았다. 전라선은 터널도 많아 굴속을 지날 때 창틈으로 스며든 석탄연기와 가루로 코와 눈이 새까맣게 되었다. 갑자기 내린 서울역 광장은 한겨울에도 따스한 남쪽고향의 시골소년에게는 너무나 춥고 떨려서 지금도 서울역이라고 하면 춥고 황량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골형편은 어느 곳이나 늘 배가 고프고 어둡고 추운 환경조건이었다. 한겨울임에도 양말도 없이 검정고무신 신고 학교 다니기, 밀 겨울 개떡 별미로 먹기, 이른 봄 소나무껍질 벗겨먹기, 껌 대신으로 송진 씹기, 떨어진 풋감 우려먹기, 소털 뽑아 축구공 만들어 차기, 날마다 산으로 땔감 하러가기, 아침저녁 마을 뒷산에 가서 소 풀 먹이며 소 꼴베기, 논밭에 똥장군 지고가기, 어른들 심부름하기.... 등등 문자 그대로 1인 3역 4역이었으므로 공부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목 구멍가게의 동그란 유리항아리 안에 있던 울긋불긋한 눈깔사탕의 유혹은 꼬마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지금 노년세대가 지닌 유억(幼億)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당시 어른들은 자주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그때 집안형편이 조금 여유가 있거나 아니면 부모가 조금 개명(開明)된 자녀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부터 진주나 부산 더러는 서울까지 가서 출세가 빨랐다. 그러나 부모나 자신이 조금 애매하다 보면 범부(凡夫)로 지내게 되었지만 더러는 용기가 비범(非凡)한 친구들은 고(故) 정주영(鄭柱永) 회장처럼 논이나 소 판돈을 훔쳐 야반도주하는 용기와 도전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인물도 있다.

그런데 남해에는 기업가로서의 그런 정도의 인물은 없지만 맨손으로 고향을 떠나 남의 밑에서 온갖 고생을 이기고 참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중견 CEO로 또는 정계와 중앙행정 부처의 고위관료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들이 많으며 교육-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타 지역 출신들과는 달리 뛰어난 분들이 많은 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기도 하다는 뜻과 연결되는 'Money makes the world go around' 라는 속담처럼, 출향 인사들이 애초부터 서울서 구멍가게라도 시작했으면 아마 지금쯤은 많은 향우들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해사람들에게는 부모로부터 무형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악스런 근명성과 배고픔까지 이겨낸 인내심이라는 커다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객지의 자녀들이 장사꾼이 되기보다는 돈과는 거리가 멀수록 좋은 직종인 법관이나 학자, 행정관료가 되기를 선호했기에 오늘날 학계나 정계 그리고 중앙부처의 고급공무원 중에는 남해출신이 여타 어느 군보다도 인구비율로 따지면 국내최고일 것이다. 아마 이것은 남해라는 섬이 100여명에 달하는 유배객들이 거쳐간 역사적인 유전인자 때문에 생겨난 올곧은 선비정신과 상인(商人)을 천시하는 가치관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도 토박이 남해 주민들에게서는 소위 사업적 기질인 Business mind란 전혀 찾기가 힘든데, 그것은 남해의 전통시장 상인들의 대부분이 남해 토박이보다는 부모세대가 남해로 이주해 온 경우가 많고 또 한 해마다 개최되는 군민축제 마당에서 좌판을 벌려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외지에서 들어온 상인들이라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농공상(農工商)이라는 유교적 전통직업관이 머릿속에 박혀있어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넓은 들판이라고는 거의 없는 척박한 농업 환경조건임에도 어업이나 장사를 외면하고 대다수가 농업에 매달려 온 남해의 산업사(産業史)가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남해 주민들의 기본적인 의식세계에 또 다른 하나의 특성이라면 섬주민들이 쉽게 보여주는 배타적인 집단성이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높은 단결력과 협동심이지만 한편으로는 배타적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폐쇄성으로 발전되므로 현대세계의 개방성과 국제성과는 맞지 않은 가치관인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동물들의 본능적인 생활영역확보 감각으로 성숙사회에서는 이다. 그래서 남해군민들의 끼리끼리의 단결력과 생명력으로 말하면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는다는 바퀴벌레와 새앙 쥐 그리고 단체(호남향우회-해병대전우회-고려대교우회)에 못지않다. 이것은 서울과 부산 중심의 남해향우회가 다른 시군의 향우모임과는 달리 매우 활발한 조직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남해의 자연조건과 특이한 역사의식 속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을 보낸 제1세대 향우들이라면 부모가 묻혀있는 고향산천에 대한 그리움이 나이와 비례하여 점점 더해갈 것이다. 다들 막연한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긴 세월동안 쌓인 남모르는 눈물나는 이갸기는 한권의 소설책이 될지도 모른다. 비록 나에게 해준 것은 없지만 타향에서 어렵고 힘들 때는 그래도 어머니의 품속처럼 훈훈한 마음의 고향 남해가 있었기에 설움을 이겨내면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고향을 위해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의 자리로 옮겨 앉고 있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으로 기술을 가진 사람은 기술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지식으로 자기분수에 맞게 고향발전을 위하여 정성을 모으는 마음가짐이 요구된다. 지난해 남해출신 대학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보물섬남해포럼>도 이런 취지였다. 이미 개인적으로 그동안 많은 정성을 고향에 쏟은 분들도 있으나 향우들 전체가 참여하는 어떤 기념사업을 구상하는 것이 더 뜻 깊을 것이다. 잠자는 남해를 일깨우는 하나의 종소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가령, 향우회가 주관하여 기업인 중심의 모임을 만들어 남해출신 자녀들의 취업을 돕는다든지, 몇 년 후에는 개통퇼 제2의 남해대교 입구에 재경남해 향우회 공원(쉼터)을 조성하는 것도 하나의 아이디어라고 본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격언이 있듯이 재경향우회 1세대가 남긴 족적을 몇 10년 후 어느날 제2세대 3세대가 부모님들의 고향을 찾을 때 이러한 흔적이 그들에게는 마음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