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정경진 - 동문문원
상세내용
白骨의 함성과 추억에서
대한의 남자라면 군대를 가는 것은 국방의 의무로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 몇이라도 모이면 군대 이야기로 긴 겨울밤을 나는 것도 모자랄 지경이지요, 제가 청년기에 부모형제 곁을 떠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단체 생활을 했던 때가 딱 41년 전입니다. 그 옛날 강원도 산골에서 일어났던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저에게는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고 인내심을 키우게 해주었기에 인생에서 많은 보탬이 되었던 시절이라는 점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글을 쓰고자 합니다.
저는 남해중학교 14회 졸업생이고, 남해농고 17회 졸업생입니다. 그 후 동아대학교 경제학과를 다녔고, 1972년 2월 말에 졸업과 동시에 R.O.T.C 10기로 임관하여 보병 소위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광주 상무대에서 16주간 기초 군사교육을 마치고 처음으로 배치 받았던 곳은 중부 전선에 속한 강원도 철원지역으로 남해에서 올라온 촌놈이 상상하기도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그 중에서도 제가 배치를 받았던 사단은 인터넷 등을 참조하시면 아시겠지만, GOP 부대로 6·25 당시에 최선봉에서 38선을 최초로 돌파하는 등 천하무적의 전투력을 인정받아 훗날 국군의 날을 제정하게 만들었다는 육군 소속 백골 사단이었습니다.
처음 부대에 도착했을 때 부대 주변이 온통 백골(해골)마크로 가득해서 나름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여기저기서 경례를 하느라 '백골', '백골' 소리만 우렁차게 들려서 바로 적응이 되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1972년 그 당시 사병 생활이야 식사 후 식기 등을 냇가에서도 씻었고, 기름기 있는 식기도 흙이나 갯벌에 씻어야 하는 수준이었던 만큼 동두천 전방은 비포장도로로 그 자갈밭 신작로에 훈련용 차량만 지나가면 온통 먼지투성이가 될 정도로 엉망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단 신고를 할 때 보니 제 앞에 월남 정글 8각형 모자에 해골마크를 달고 그 밑에 별 하나를 달고 있었던 박정인 장군 - 윌미도 사건 당시의 -이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경례 때 '백골!' 하시는데 나름 무섭기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곧바로 이동해보니 백골사단 백골연대(18연대) 대대지원 화기인 81밀리 박격포 소대장이 제 보직이라고 했습니다.
철원군에서도 그 곳은 강원도 명동이라고 서울 마장동까지 영종버스가 다니는 종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산골이다 보니, 남해에서는 한 겨울에 썰매나 나무토막 밑에 유리창 철사 같은 것을 끼워서 직진만 가능하게끔 해도 잘 하는 것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두 발에 스케이트 신(세이브1호)을 신고 언 강위에서 큰 원을 곡선으로 그리며 돌아다닐 수도 있어 신기했습니다. 그 때 잘 배운 덕에 지금도 스케이트는 제법 탈 수 있지요. 이런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연대에서 전망 GOP 부대로 이동해가면서 보니 제 뒤로는 우리 남한의 대성산이 있었지만, 눈앞으로는 군번 한 트럭과도 안 바꾼다는 무시무시한 북한 측의 오성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분위기에 지지 않고 '통일촌'이라는 곳이 존재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가끔 인원을 파악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곳이었는데, 군대에서 전역한 장교나 선임 하사관들이 거기서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유명한 무농약 오대산 철원 쌀이 나오는 바로 그 곳입니다.
GOP 생활은 철책선 감시를 주 임무로 하기에, 철책선 순찰을 돌면서 벙커와 진지 중간 중간에 위치한 초소에서 병사들이 근무를 잘 서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제 일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감시 임무는 밤에 많이 하기 때문에 보통 오전에는 밀린 취침을 하고, 오후에는 작업을 하지만, 겨울에는 하도 눈이 와서 치우고 돌아서면 눈이 쌓여있고 그래서 또 치우고 하는 생활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소대 막사 안에서 갈탄을 태워서 내무반을 데워야 했기에 갈탄 당번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8개월 정도 한 후에 원래 있던 와수리에서 근방 토성리로 부대가 이동을 하더군요. 그 곳으로 이동을 하고서는 주로 군사 훈련으로 시간을 보내고, 가끔씩 싸리나무를 이용해서 빗자루를 만들어 위문품으로 위문 공연 후에 전달하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힘들었던 군사 훈련 중 기억나는 것이 정월에 있었던 훅한기 훈련입니다. 그 때 완전 군장을 한 후에 배낭 주위에 하얀 천을 가닥가닥 내어 옆에다 달아야 하는 등 준비가 꽤 까다로웠지만 군대니까 다 가능하던군요. 이런 훅한기 훈련은 쉽게 말해 하얀 눈밭에서 에스키모인 같이 털모자에 방한 장갑에 방한 복장을 다 갖추어야 해서 이동 자체가 거북할 정도로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해야 합니다. 그래도 겨울에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해 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초저녁에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최종 진지까지 가다보면 중간 중간 휴식시간이 있다 해도, 동이 터 오는 여명까지 계속 가야 해서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훈련에서 복귀하고 인원과 장비를 체크하는 데 관측병의 목에 있어야 할 쌍안경이 보이지 않아서 야단이 났었습니다.
일단 '이상무'로 보고를 하고 전 소대원의 정신무장을 위해 연병장에 집합 시키고 연병장 주위를 세 바퀴 돌게 한 후 바로 냇가로 데려갔습니다. 땀이 채 식기도 전에 '앞으로!'를 외쳐 그 차가운 물에 모두를 포복으로 입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어서!' '앉아!'를 천천히 반복하는데 영하 15도에 육박하는 추운 날씨였는데도 어째 소대원들이 일어서기는 싫어하면서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 듯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물속이 물 밖보다 그나마 따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기합이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장비 보충이 문제였지요. 그래서 다음날 오전에 훈련 장소로 다시 찾아가서 장비를 찾아보고, 오후에 소대장인 제가 서울로 출장을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오전 9시 경에 희소식이 들렸습니다. 인근에 있던 포병부대에서 진지 보수 작업을 위해 우리가 훈련했었던 장소로 갔다가 그 쌍안경을 발견하고, 밤중에 훈련 부대가 분실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해서 연락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침 포병부대의 선임하사가 직접 그 장비를 가져왔기에 당시 최고로 쳤던 청자담배(금색 포장)3보루를 사서 감사의 표시로 대신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좀 힘들다 싶을 때면 그 당시에 받았던 유격 훈련 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상무대에서 교육을 받던 중에 유격 훈련이 있어서 완전 군장 상태로 낮 12시에 상무대에서 출발해 장성군에 위치한 동북 유격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훈련을 쉬지 않고 계속하다 보니 광주시에 위치한 무등산을 종주하면서 그 무거운 워커를 신은 채 물가도 지나가야 했기에 16시간이 지난 후 새벽 4시경에 장성 유격장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어보니 발바닥이 전부 하얗게 일어나고 퉁퉁 부어서 엉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병사들의 애로 사항을 알아야 소대 지위를 할 수 있는 소대장이 된다면서 계급장에 상관없이 바로 강하게 전투력 기합 등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도르래를 타고 저수지 물에 빠지는 훈련까지 했는데, 이것만은 더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하더군요, 유격훈련을 받을 그 때가 4월이었지만 산 속이라 꽤 추웠는데, 모든 훈련을 마치고 마셨던 그 막걸리 한 사발,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밖에도 그 때 했던 담력훈련, 참호 진지훈련, 바위 타기 훈련 등 여러 가지 훈련이 군대 제대 후 사회생활에서의 여러 힘든 일들을 이겨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28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저는 1974년 6월 30일에 예비역 중위로 전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 생활도 오래 하고, 지금은 10여년 넘게 의약품 원료 도매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평범한 사람의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남해중학교 졸업생들, 제일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모두들 어디에서든 으뜸가는 사회인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