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감충효 - 모교의 역사, 추억, 학창 주변의 유배문학이야기
상세내용
유배(流配)의 고도(孤島)에서
시혼(詩魂)을 부르다.
▶ 우리는 가끔식 유배객(流配客)의 처지로 다가 설 때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배객들은 그 당시 생과 사의 갈림이 지금 보다 훨씬 더 가팔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 조정에 나아가 임금 앞에서 바른말 한마디 하고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그 추상같은 시대에 그나마 극형은 면했지만 유배생활 도중 언제 사약이 내릴지도 모르는 백천간두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제부터 우리 고장, 그것도 우리 학창의 옛터 울타리 안팎에 살았던 그들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조선 후기 정치가로서, 문신으로서, 효자로서, 소설가로서, 한글애호가로서, 시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의 발자취가 그 고뇌스런 일생과 함께 서려 있는 반도 남단 남해는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유배문학의 산실이다.
● 남해에 유배 문학을 남긴 유배객
2010년도에 발간된 남해군지에는 조선시대 남해로 유배된 인물은 200명 이상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이 들은 유배가 풀린 사람도 있었지만 더러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남해의 유배객 중 남해에서 문학 작품을 남긴이는 6명 정도다. 자암집에 화전별곡 등 수 많은 시를 남긴 자암(自菴) 김구(金絿)를 필두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라는 불후의 명작 소설과 어머니를 위한 시를 남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망운산과 금산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시를 남긴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장인 김만중을 생각하며 매부(梅賦)를 쓴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남해의 풍속을 담은 기행문인 남해문견록을 쓴 후송(後松) 유의양(柳義養), 태소집에 등금산(登錦山)을 비롯한 수많은 시를 남긴 태소(太疎) 김용(金容)이 있다. 여기에서 최근 향토사학자 김창렬씨의 연구에 의해 태소 김용은 남해에 유배된 일이 없다는 것이 발표되었고 남해유배문학관은 이를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남해유배문학관의 유배문학실의 태소 김용 관련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다. 따라서 수변공원에 있던 김용 선생의 문학비는 소재 이이명 선생의 문학비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김용 선생의 문집 태소집에 실려 있는 남해에 대한 주옥같은 시들을 그냥 묻어두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태소집에 실려 있는 남해에 대한 시들은 작자 미상이라고 하니 남해 유배문학의 재조명 내지는 탐색에 초점을 맞추어 그 작자를 찾아내는 일이 더욱 중요하리라 본다. 이렇게 된다면 남해에 유배 와서 글을 쓴 사람이 더 늘어 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남해유배문학관이 서고 나서 또 하나의 희소식이 있어 여기에 그 사연을 전한다.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 기로소에 들겠다는 영조의 뜻에 반대하다가 남해로 유배형을 받아 1744년 8월 30일부터 1745년 1월 6일까지 15개월 정도의 짧은 유배 기간 동안 300편이 넘는 한시를 남겼음이 발견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살고 있는 박성원 선생의 후손인 박성용씨가 남해유배문학관이 문을 연지 2년이 가까워 오던 2012년 가을에 남해유배문학관을 찾아왔는데 박성원 선생의 문집인 '광암집'에 '남해일기'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얼마 후 그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김성철 남해유백문학관장은 남양주를 찾았는데 그것이 일기가 아닌 한시라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방대한 한시를 남해유배문학관에서는 박성원 지음, 임종욱 역주로 한 '남천록(南遷錄)'이라는 책명으로 금년 9월 12일에 발간하였다. 한시를 번역하고 작품에 따라서는 해석을 붙인 임종욱 작가는 책의 말미에 '박성원은 이 책에서 단지 자신의 유배와 관련된 심정이나 주변사만 기록하지 않았다. 그는 남해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여러 사실들을 꼼꼼하게 자신의 시에 옮겼다. (중략) 아울러 남해의 풍속이나 남해 사람들의 생활상을 시에 담았다. 250여 년전 남해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풍물지의 역할도 이 시들은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임종욱 역자는 원천석의 한시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 현재는 남해에 머물면서 남해의 역사를 되새기고 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박성원의 시에 유배생활을 하던 거처의 서편에 망운산이 있고, 바다에 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내용이 있으며 거처의 죽림에서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지은 시가 많은 것을 보면서 그의 적소는 읍성의 동쪽으로 대가 많은 동네가 아니었을까하는 짐작도 조심스레 해보게 된다. 결국 우리의 모교인 남해중학교와 남해제일고등학교의 옛터라는 뜻이다.
문학작품을 남긴 유배객 중에서 문학작품에 있어서는 단연 서포 김만중이 어느 유배객보다 위상이 높으나 다양한 계층과 접촉하면서 습감재(習坎齋)라는 서당을 지어 학문을 가르칠 정도로 인문학적 큰 족적을 남긴 이는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이다. 습감재(習坎齋)가 자리 잡았던 곳에 우리 모교의 모태인 남해 공립 농업 실수학교가 1932년에 개교하였다. 그 후 학제의 개편이나 교명의 변경이 있었고 2년제에서 1년, 또는 4년제로 되고 나중엔 또 6년제가 되었다가 다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분리되는 일이 있었으며 실업계의 남녀 공학에서 여고가 따로 생겨 남해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32회 졸업생을 배출시킨 후에 다시 남해종합고등학교와 통합하여 남해제일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지금은 도립 남해대학이 들어선 모교의 옛터 또는 주변에 습감재(習坎齋)라는 서당 겸 적소가 존재하여 소재 이이명 선생이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가르침을 시작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이 적소에서 키우던 매화나무 두 그루는 서포 선생이 생을 마감하자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사위인 소재 선생이 습감재(習坎齋)에 옮겨와 심으니 매화나무가 다시 살아나 꽃피고 열매 맺음을 보며 그 감회를 읊은 것이 바로 매부(梅賦)이다.
소재 이이명 선생의 큰 사상과 가르침을 적은 봉천사 묘정비가 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 2011년 12월 봉강산 자락에서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에 옮겨졌다. 봉천사묘정비의 이전을 시작으로 선생의 유배작품인 새로운 매부(梅賦)가 발견되었으나 지면 관계상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바야흐로 소재 선생의 또 다른 진면목이 유배문학에 더욱 빛난다. 이 글에서는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약천 남구만 선생의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거진다'에 대한 새로운 학설과 소재 이이명 선생의 매부(梅賦)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요새는 교과서가 개편되어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의 시조가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약천의 시조뿐만 아니라 정철, 양사언, 길재 등의 옛시조와 김상옥, 이호우 등 현대시조 6편의 시조를 달달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서 옛 선인들의 충절과 선비정신, 경로효친을 배웠었고 현대감각으로 지은 시조를 통하여 아름다운 정서와 고운 심성을 키워주는 시심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중 · 고등학교에 올라갔어도 시조는 국어 교과서에 꼭 실렸었고 그 정형성, 내밀성 또는 간결성, 응축력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남구만의 이 유명한 시조는 창작 년대의 기록이 없다.
경기도 용인의 향토사학자들은 이 시조를 약천이 관직에서 물러나 노후를 보낸 곳이 사래 긴 밭을 뜻하는 長田(장전)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하여 용인에서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홍성에서도 약천이 머문 적이 있다하여 그곳에서도 약천초당을 지어놓았으며 시조비를 세우는 등 시조 하나를 놓고 향토사학자와 지자체가 똘똘 뭉쳐서 쟁탈전을 벌이는 양성이다.
약천은 남해에서도 9개월여 유배생활을 하며 영유시(詠柚詩) 20수를 비롯하여 '금산에 올라' 등 주옥같은 詩文(시문)을 남겼는데 남해역사연구회 이사이며 한국유배문화연구소 소장인 박성재씨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시조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영유시와 비교분석하고 두 시와 시조의 관련성을 입증하고 서포 김만중과의 오고간 서찰과 시문을 검토하여 남해 창작설을 주장함과 동시에 <시조>의 성립과 창작 배경을 분석함에 있어 창작연대의 분석, 고도의 은유와 상징성이 분석, 작품에 나타난 지명에 대한 분석이라고 했다. 이지명에 대한 분석이 제일 흥미롭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연구자는 남구만이 남해에 유배되어 유람하면서 썼던 '영유시 20수' 중에서 용문사 대웅전 소반위에 놓여있던 유자를 노래했던 시 등에서 볼 때, 용문사에서 동쪽으로는 앵강고개(鶯江谷) (재)를 넘어서, 성현을 지나면, 장전리(긴사래 밭)가 있다는 점은 '시조'가 남해 지명의 심상에서 창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작개'라는 말은 노비보유자층이 노비에게 전답을 분급하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아래 경작케 하는 영농방법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작개제'는 노비보유자가 노비에게 '작개'와 '사경'을 짝지어 나눠주고, 노비는 이것을 가족 노동력에 의거하여 경작하는 형태로 운영하는 토지경영방법이며 여기서 '작개(作介)'는 앵강만 고개 넘어 성현리를 지금도 '작개'라고 별칭하고 있는 점, '작개'를 지나 '장전(長田)'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사래긴 밭'이니 이 점도 재조명되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필자 역시 지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책을 보다가 이동면 평지 마을과 장전(긴사래밭) 마을 사이의 들을 사창(社倉: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들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래긴 밭 마을의 사창들을 지나다니면서 한 나라의 당상관 벼슬을 지낸 분이 농사짓는 곳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민의 애환을 몰랐을 리 없다. 더구나 조정에서 내쳐진 유배객의 서글픈 심정으로 핍박 받는 농민의 심정을 그의 지성과 감성으로 '동창이 밝았느냐'를 창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짧은 남해유배기간 동안 약천은 총6제 28수를 남긴다. 남해의 모든 것을 무척이나 사랑했음이리라. 영유시20수는 남해특산물인 유자를 선비에 비유하면서, 누구보다도 농심을 이해했으며, 농업인과 백성을 사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자를 노래했으나 유자로 인한 농민들의 과도한 조세부담에 힘들어 하고 있음을 고도의 상징성과 온유의 기법으로 나타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이념적 세계, 정치적 풍자, 당시의 사회상, 남해의 특산물 유자에 얽힌 농민들의 조세부담에 대한 애환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 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를 음미해 보면 지금까지 이 시조를 단순히 전원 풍경을 노래한목가적인 시조라거나 독농 · 권농의 시조로만 평가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하리라고 보며 그렇게 되면 약천 남구만의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조는 남해 창작설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조를 단순히 전원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목가적인 시조라거나 독농 · 권농의 시조로만 평가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 소재(疎齊) 이이명(李頤命)
조선 성리학의 중추를 이루는 분들로, 정치일선에서도 훌륭한 업적과 충절의 모범을 보이시며, 가장 먼저 실사구시의 정신을 존중하신 분으로는 아마도 서포 김만중 선생과 소재 이이명 선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이이명 선생의 문집인 '소재집'에 서포 김만중 선생과의 애틋하고 도타운 인연이 닿아있는 ' 매부(梅賦)'를 남김으로써 유배문학관을 보유하고 있는 남해인들은 무엇보다도 인문학적인 면과 국문학적인 면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정신의 발현으로 서포 김만중 선생은 우리나라 국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고 소재 이이명 선생은 기독교(천주교)를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 하는 등 서양의 앞선 문물을 들여와 우리나라의 선진화를 위한 노력에 많은 힘을 쏟았다. 특히 소재 이이명 선생은 남해에 두 번씩이나 유배되어온 인물로서 이곳 사람들과는 크나큰 인연을 맺고 호흡을 같이 하면서 많은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서포 선생과 소재 선생은 사사로이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 당쟁의 역사에서 항상 정의의 편에서 선비정신을 죽음으로 지켰던 충절의 인물이기도 한, 두 분은 우리 고장 남해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이 남해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그해, 소재 이이명 선생이 남해로 유배 왔다. 그러나 이미 서포 김만중 선생의 널은 북으로 떠난 뒤였고 적소에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심어 가꾸었던 매화 두 그루만 주인을 잃고 쓸쓸히 죽어가고 있었다. 이 매화나무 두 그루를 거두어 옮겨와 살려 키우면서 ' 매부(梅賦)'를 지어 소재집에 남긴다.
봉천사 묘정비에 새겨져있는 소재 이이명 선생의 빛나는 업적은 정녕 보국안민의 거울이 되어 오늘에 더욱 빛나고 있다. 더구나 남해읍 죽산 마을 주변에 마련된 그의 적소에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처음 편액 할 때 '지감재(止坎齋)'라 하였는데 이는 전한(前漢) 시대 유명한 시인이며 정치인이었던 가의(賈誼)가 장사(長沙)에 귀양가서 쓴 '복조부(鰒鳥賦)'에 나오는 말을 취하였다고 봉천사 묘정비에 기록되어 있다.
소재 이이명 선생은 서포 김만중 선생이 노도 적소에서 키우던 매화 두 그루가 죽어감에 이를 거두어 소재 선생의 적소인 지감재(止坎齋)에 옮겨와 심어 살렸으며 꽃이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했다. 그리고 이를 감응(感應)의 이치로 여기면서 매부(梅賦)를 지어 칭송하였다.
봉천사가 훼철되고 묘정비가 현재 남해유배문학관 부지에 옮겨지기 전의 역사를 잠깐 알아볼 필요가 있다.
봉천사가 훼철되고 묘정비가 옮겨진 곳은 남해군 공용터미널 맞은편 봉강산(鳳降山) 자락의 남해읍 북변동 430번지였다. 이이명의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는 군보호문화재 3호로 등록되어 있는데 크기로는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로서 정사각형 철재 보호담(440cm, 440cm)으로 보호를 하고 있었다. 비문을 지은이는 문장에 능한 대제학 김조순이다. 한편 이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의 비문에 의하며 봉천사(廟庭碑)는 지감재와 멀지 않은 남해읍 竹山(대뫼)마을 봉천변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도 당연히 봉천사 뜨락에 있었음은 상식적으로 판단되어진다. 봉천사는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으로 보이며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만 봉강산 자락으로 옮겨져 왔다.
학자들에 의하면 봉강산 자락에서 동쪽 300미터 쯤 되는 곳에 봉천사(廟庭碑)의 터로 추정되는 허지를 발견하였다고 하였고, 이 곳에 봉천사(廟庭碑)를 복원하고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도 옮겨와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않고 있다가 2011년 12월 27일 자로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 사연이 퍽 길기도 하지만 언론의 보도를 통해 지방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방인터넷 양대 신문에 찬반 여론의 봇물이 터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필자 자신도 그 회오리의 중심축에 서 있던 상황에서 각종 여론들이 표출되었고 군에서는 적법한 절차를 통하여 봉천사 묘정비를 유배문학관내에 이전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타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또 다른 사연이 있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서 다 적을 수 없다.
이제 소재 이이명의 매부(梅賦)를 알아보기로 한다.
서포 김만중은 소재 이이명의 장인이다. 서포 김만중이 남해 노도의 적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그 해 사위인 소재 이이명이 남해에 유배되어와 노도 적소에 가보니 장인이 심은 매화나무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적소에 옮겨와 심고 매부(梅賦)를 지어 칭송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당시 남해유배문학관장의 글이 신문에 올라왔다. 이 때 까지 소개된 위에 적은 매부(梅賦)는 소재 이이명 선생이 그 시를 짓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산록에 방치 되다 시피 했던 봉천사 묘정비가 주목을 받으면서 유배문학관으로 옮겨진 상황에서 이이명 선생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발견되어 선보임은 퍽이나 낭보임에 틀림없다. 소재 선생의 혼백이 인도한 것일까? 이를 계기로 앞으로 소재 선생의 남해유배생활의 행적을 더욱 깊이 연구하면 또 다른 문학 작품이 더 발견되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봉천사와 습감재(소재선생의 적소로 학사의 역할을 한 곳)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비문에 적혀있으며 실제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2리~3리 쯤 떨어진 곳이라 했고 지금의 남해 대학이 들어선 죽산 마을 당산에 습감재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바로 얼마 전 까지 우람한 매원이 있었던 곳이다. 그 당시 죽산마을에 높은 벼슬을 한 선비 한 분이 소재 선생과 교우하며 지냈다는 이야기가 어느 가문에 전해내려 오는데 바로 습감재와 지척에 살았고 유배문학관으로 옮겨지기 전의 봉천사 묘정비도 그 가문에서 먼 옛날부터 소유했던 봉강산 자락이었고 그 가문의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선대에 들었다면서 봉천사 묘정비의 주인공은 자기네 선조님하고 교우를 한 분이니 그 비를 잘 보존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후손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어느 해 죽산 마을 그 선비의 고택 서재에 일어난 원인 모를 화재로 서책과 시문, 서찰이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 불타없어진 서찰이나 서책 중에는 소재 선생의 것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추정도 해본다.
그 고택 서재 서까래와 상량이 불에 약간씩 타서 숯 나무가 된 채 수 백년을 이어져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필자도 어릴 적 그 숯 나무 상량과 서까래를 보며 그 사연에 대해 고택을 지켜오던 후손에게 들은 바 있다. 혹시 그 때 불타던 중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유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후손들은 모두 타지로 이주했고 그 고택을 인수한 사람은 그 고택을 헐고 새로 집을 지었다니 이제 그 흔적도 볼 수 없다. 선비들이 필담을 나누었던 이층 대청마루나 기와 굴뚝, 대문간에서 본채로 이어졌던 가지런한 판석들, 샘이 깊은 물이나 서재의 높은 문턱에 걸려있던 특이한 문살하며 봄이 되면 크나큰 문짝을 접어 올려 서까래에 매달아 가을까지 대청마루에는 그 집안 자손들의 청아한 글 읽는 소리가 들렸으며 뒷문 밖으로 난 오솔길은 맹종족의 대밭을 거쳐 뒷산 노송아래 매원의 매화향기가 무릉동원을 연상케 하였다. 바로 소재 선생의 습감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봉천사묘정비가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에 세워지고 뒤늦게라도 정본 매부(梅賦)의 시비가 새로 세워짐은 큰 다행이다. 그리고 남해읍 문화거리에 세워져 있는 매부(梅賦)의 조형물 시비를 당장 새로 고쳐야 함이 옳다. 당연히 고쳐졌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표지에 넣을 사진 촬영과 모교의 역사 이어가기 내용에 넣을 보충자료 확대를 위해 모교의 역사관을 찾아 갔을 때 읍내 문화의 거리에 세워진 이이명 선생의 매부는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매부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연유문이 매부의 진짜 시인 줄 알고 긴 세월 동안 읊조린 부끄러운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관계기관의 남해유배문학에 대한 인식에 어쩐지 마음이 무겁다. 어느 부서에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아야겠다. 관심 있는 사람이 남해유배문학관의 매부와 읍내 문화거리 매부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번에 유배문학관 야외공원의 시비에 새겨진 매부(梅賦)는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소재 이이명은 남해에 두 번씩이나 유배되어온 인물로서 이 곳 사람들과는 크나큰 인연을 맺고 호흡을 같이 하면서 많은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수 십 년 전만 하여도 봉천이 흐르는 동네 竹山(대뫼)마을 뒷동산인 당산(當山)에 매원(梅園)이 있어 꽤 많은 매화나무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죽산(대뫼)마을과 봉천과 강진바다에 매향(梅香)을 흘러 보내주었으나 도립 남해대학이 들어서면서 인지 아니면 그 이전인지 모르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의 그 매원의 향기를 잊지 못해 찾았을 때는 매원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대학의 기숙사 부지가 되어있었다.
이제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매원(梅園)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지만 소재 이이명선생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이 고장 사람들이 선생이 심어 아끼며 가꾸었던 그 매화 두 그루의 의미와 매부(梅賦)에 얽힌 사연을 그리며 은연중 매부(梅賦)의 문학적 또는 역사적인 면과 대쪽 같은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한 운동으로 적소 주변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까지나 가정이지만 유독 적소 주변에 매원이 생겨나고 오랜된 매화 등걸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유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남해유배문학에 대한 글을 마치면서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花田別曲)에 봉천(鳳川), 파천(巴川), 망운산(望雲山)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소재 이이명의 매부(梅賦)를 지은 곳과 적소도 봉쳔변(鳳川邊)주변이었던바 남해유배문학관이 세워진 곳도 바로 망운산 자락이 <강진바다> 쪽으로 펼쳐놓은 이 봉천변이다. 어디 그 뿐인가? 서포 김만중의 적소에 있던 매화 나무 두 그루를 그의 사위인 소재 이이명이 옮겨와 심어서 키운 곳도 적소로 추정되는 죽산리 당산 매원 주변의 습감재임을 생각할 때 남해읍내의 봉천변 주변은 남해유배문학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남해유배문학을 남긴 여섯 분 중 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를 뺀 나머지 네 분의 적소가 모두 남해읍내 읍성 주변임을 생각할 때 전국 어느 곳에 이런 다양한 유배문학이 집중적으로 태동하여 출산된 곳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서포 김만중은 3여 년간의 유배생활에서 시, 소설, 수필, 평론류의 다양한 창작이 이루어졌고 그 외의 다섯 분도 수많은 시가, 기행문, 부(賦), 한시 등 실로 그 다양함과 양적으로 풍부함에 노라지 않을 수 없으며 국문학사에 그 비중이 높은 대작들이 즐비하니 어찌 남해를 유배문학의 보고라 이름 하지않겠는가? 더구나 이 번에 발견된 박성원 선생의 300편이 넘는 시는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남해유배문학이 더욱 비중이 커지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서포 김만중 선생과 소재 이이명 선생의 영혼이 용해된 매부(梅賦)의 탄생이 모교가 태동한 당산 매원의 습감재(習坎齋)에서 이루어졌고 우리 모교가 자리 잡은 읍성 주변에서 조선의 거목, 거유, 문인들이 문학 작품을 창작해 읍성의 문창(文窓)에 혼 불처럼 내걸었고 기맥이 흐르고 박동치고 있음은 후세를 사는 우리 동문을 비롯한 남해인 모두들에게 시사 하는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이 곳에 전국 최초로 유배문학관이 건립되어 그 소임을 다하고 있음도 큰 자랑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