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정영찬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최고의 행복"
세상을 먼저 살다간 선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행복은 마음 속에 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는 타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정작 자신은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은 더없이 행복하다며 매사에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다. 남해중학교 16회 졸업생 정영찬 동문은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때, 그는 세속적으로 출세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큰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는 물론 지인들로부터 신임을 받으며 고향 남해를 위해 묵묵히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큰 행복이라는 그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이 너무 이기적이고 삭막하기 때문일까?
▶ 주경야독을 하며 꿈을 펼치다
그는 1951년 3월 23일(음력 2월 16일)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광두부락에서 이미 고인이 되신 부친 정기동(1994년 작고)선생과 모친 김채봉(2004년 작고)여사의 4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초초등학교(16회)와 남해중학교(16회)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1967년 당시 실업명문고인 덕수상업고등학교(현재 덕수고등학교),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동국대학교 경영대학원(인사, 노무관리전공, 경영학 석사)에서 수학하였다.
덕수상고 3학년 때인 1969년 12월 국영기업체인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며, 1971년 3월에 건국대학교 이부대학 경제학과에 입학 주경야독하였고 1975년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하여 26사단 75연대 7중대에서 서무병으로 복무하고 만기 전역과 동시에 한국관광공사를 퇴사하고 1978년 당시 취업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해외근무를 위해 신화건설(주)에 한국관광공사 근무당시 상사였던 분의 추천으로 입사하였다.
신화건설에 입사하여 팔레비정권 시절인 1978년 이란 쉬라즈 비료공장 현장에서 경리업무를 수행하다 회교혁명(호메이니 혁명)
으로 철수하여 본사 관리본부와 국내현장에서 근무하다 1989년에는 사우디 리야드지사 관리업무 책임자로 근무하며 걸프전쟁 때는 직원 한 명과 현지에 남아서 걸프전을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1992년 귀국하여 본사 지금부장과 공사관리부장, 법정관리 신청 중에는 정리기획팀장으로 근무하다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고 2001년 23년 동안 삶의 터전인 신화건설을 퇴직하고, 2002년 친구의 소개로 케이블 방송인 강서방송에 입사하여 상무이사로 강서방송을 경영하였다.
강서방송의 매각 계획에 따라 강서방송을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에는 서초구청의 반포종합운동장에서 자원봉사자로 3개월간 봉사하며 반포종합운동장이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체육공간으로 정착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고 2006년 6월 강서방송의 계열사인 태경화학의 대리점을 인수하여 현재 수도권에 드라이아이스를 공급하는 드라이아이스 대리점을 은평구 용암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정영찬 동문의 삶은 동 시대를 살았던 동년배의 삶과 특이한 것은 없으나 좋은 부모와 형 만나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공부하였고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해서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주경야독하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 강한 리더심과 베풀고 더불어 사는 정신을 평생 교훈으로~
그가 초등학교 시절 선친은 매년 신학기가 되면 자녀들의 선생님을 초대하여 자식 가르침에 감사드리고, 자녀 교육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며 자식 교육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나가다 들리는 걸인에게는 식사를 제공하고, 행상들에게는 식사와 잠자리 제공은 물론 그분들의 물건들을 사주기까지 하며 정을 나누는 생활을 실천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이러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정영찬 동문은 남에게 베풀고 더불어 사는 정신을 자연스레 체득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남해에서 살던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은 정영찬 동문에겐 자긍심을 키울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대학에 다니던 형이 방학에 고향에 내려올 때면, 연출과 무대제작을 해서 연극을 공연하고, 시화전도 개최하였으며, 동생이 재학하고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환경미화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여 동생은 항상 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정영찬 동문 자신도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하며 리더로서의 마음가짐을 쌓아 왔고,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날, 같은 반 학생들이 잘못했다고 모두 책상 위에서 손을 들고 있는 단체 벌을 받게 되었다. 그때 교실로 돌아온 담임선생님(남해중 2회, 곽영희)은 당시 반장이었던 정영찬 동문에게 "반장이 반을 통솔 잘못한 것에 대해여 대표로 사죄하고 앞으로는 반을 이끌겠다고 해야지, 똑같이 벌을 받고 있으면 되겠냐"고 따로 충고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그 말씀은 그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을 할 때는 물론이고, 회갑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리더는 책임을 지고 공은 부하 직원에게 돌려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남아 평생의 교훈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모범적인 초·중학교 생활을 보냈던 정영찬 동문이었지만, 서울에서의 덕수상고 생활은 솔직히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자신의 형은 인문계 고교와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했고, 동생 또한 당시 명문이었던 경기중학교를 다니며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는데, 자신은 실업계 고등학생이었던 민망한 일도 있었고, 고무신을 신고 등교했다가 기율부에 걸려 몽둥이로 엉덩이를 얻어맞기도 하고, 사투리가 부끄러워 질문도 잘 하지 못하는 등 낮선 서울 생활은 사춘기와 겹쳐서 방황과 갈등의 세월이었다.
그가 다시 긍정적인 인생관과 자신감을 재확립하게 된 것은 대학 진학 이후의 일이다. 실업계 고교인 덕수상고 졸업 후 곧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했던 정영찬 동문은 부친의 격려에 힘입어 1971년 건국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낮에는 직장 생활로, 밤에는 서울 낙원동에 있던 건국대학교 이부대학(야간대학)을 다니는 주경야독의 바쁜 생활이었지만, 다행히 직장에서 퇴근시간보다 30분 일찍 퇴근하도록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영찬 동문은 이러한 배려에 그 두 배로 보답했다.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여 상사의 신뢰를 받았던 것이다.
대학교에서의 생활 또한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학생회 체육부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독재 정권의 암울한 시기에 학생의 날(11월 3일)이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것과 더불어 전국 이부대학 재학생들의 자부심을 고양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대학 3학년이었던 1973년 11월 초 전국 이부대학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타향살이 속에서 고향 남해에 대한 애정 또한 더욱 커져만 갔다. 군 생활 중에는 모범사병으로 선발되어 산업 시찰을 다녀와서 포상휴가를 받고 고향 남해에서 봉사 활동한 내용이 전우신문에 소개되기도 했고, 4학년 때는 마침 남해대교도 완공되어 수학여행 겸 졸업 여행의 행선지를 고향 남해로 유치하기도 했다.
그는 학생활동을 하면서 서울지역 대학교 학생회의 협조를 얻어 대학교 교지와 대학신문을 남해 중, 고등학교 도서관과 군립도서관에 보내 고향 후배들이 대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대학 진학의 꿈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일조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 모교인 다초초등학교에 초등학교 시절 약속을 지키다
그러나 고향 남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신의 신념,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는 삶에 대한 가장 뚜렷한 흔적이라 하면 역시 그가 평생에 걸쳐 꾸준히 개최해 온 다초초등학교 어린이날 체육대회가 아닌가 싶다. 대학 재학 시절이던 1974년, 장학금을 받게 된 정영찬 동문은 "이제야말로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미뤄왔던 약속을 실행할 수 있는 날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그약속이란 다름 아닌 그의 초등학교 시절, "만약 제가 학생회장이 된다면, 어린이날 기념 동네 대항 축구 대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는 정영찬 동문의 학생회장 출마 공약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초초등학교는 말로만 어린이날이었지 별다른 기념 행사가 없었기 때문, 하필 축구 대회였던 이유는,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당시 6학년 선배(박상춘 전 제일은행 지점장, 최광 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등)들이 남해군내 축구대회에 우승한 것이 어린 마음에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결국 실행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그리고 중·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 내내 정영찬 동문의 마음 한 구석에 종종 떠오르곤 했다. 그러기를 10년, 장학금을 받아 쥔 그는 마침내 자신의 약속을 실행할 수 있는 돈을 얻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영찬 동문은 자신의 재학 당시 6학년 담임이셨던 하정희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 어린이날 축구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오니 도와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마침 하정희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 갔었다가 다초초등학교로 다시 돌아와 계신 상태였고, 당시 교장선생님이셨던 (고)고석홍 교장선생님께 보고 드리고 교직원 회의를 통하여 1974년 5월 5일 제1회 동네 대항 축구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생 수도 많았을 뿐더러, 사회 초년생 봉급 생활자인 정영찬 동문의 경제적 능력도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저 학년 선물 밖에 준비할 수 없었다.
자가용 승용차도 없이 선물을 바리바리 손에 들고, 야간열차를 타고 아침 진주에서 내려 남해 가는 첫차를 타고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모처럼 내려온 고향에서 친구조차 만날 여유 없이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가야 했던 등 열악한 조건에서 시작한 행사였지만, 그래도 정영찬 동문은 비로소 자신이 작으나마 고향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단 생각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3년 후부터는 전교생에게 연필, 크레파스 등의 학용품을 선물로 주었을 뿐 아니라, 선생님들과 상의하여 위인전, 음향시설, 시청각 교재 등도 제공하여 모교 교육 환경 개선에 정성을 다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대회는 점차 커져 축구뿐 아니라 다양한 종목을 다루는 소체육대회가 되었고, 학부형 등 지역 사회에도 알려져 다초체육회, 학부형 모임, 어미니회 등에서도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회를 전후해서는 그와 초등학교 동창생들까지 힘을 보태어 어린이날 행사 후 선생님과 참석하는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등 다초초등학교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완전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린이날 행사는 해마다 이어져, 정영찬 동문은 2002년 5월까지 무려 29년간이나 어린이날 행사를 후원하였다.
▶ 나눔과 베품은 매년 이어지는 전통이 되다
비록 다초초등학교 2003년에 폐교됨에 따라 체육대회의 역사 또한 2002년에 끝나게 되었지만, 고향 남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거기서 끝날 리가 없었다. 이미 1994년부터 재학 시절의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다초초등학교에 근무하셨던 여러 은사님들을 모시고 동기생 50여명이 참석하여 30주년 행사를 개최하였고, 그 이후 동기들의 모임은 매년 이어져 2013년 4월 부산에서 19회 동기회 모임을 갖고 초등학교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소중히 가꾸고 우의를 다지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다초초등학교 졸업생들은 매년 졸업 30주년 행사를 가지며 동기간에 우의를 다지는 전통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재경 다초초등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으로 수도권에 거주하는 동문들의 완벽한 주소록을 작성 재경 다초초등학교 동문회가 활성화하는데 기틀을 마련하고 2012년 12월 제6대 재경 다초초등학교 동문회장에 취임하여 재경 다초동문들의 친목 도모에 열정을 쏟고 있다.
작은 인연이라도 항상 소중히 하는 그의 성격은 초등학교 모임에만 그 범위가 그치지 않는다. 남해중학교 제16회 졸업생으로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남해중 16회 졸업생 친목모임인 새벌회 회장으로 다년간 재직하며 재경 남해중 8기회(14회~21회) 체육대회, 남해중 16회 졸업생이 주축이 된 남해 오일회, 부산 남우회, 서울 새벌회 합동 체육대회 개최 등에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성공적인 체육대회가 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재경 이동면 향우회 감사로 재경 남해중, 제일고 동문회 부회장으로 고향 남해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그가 졸업한 덕수고등학교 제16회 동기회 회장으로 남해인의 능력을 발휘하며 동기생들의 신임을 받고 활동하고 있다.
▶ 행복한 가정은 고향 사랑의 밑거름
그는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의 선생님, 대학교 학생 활동 할 때 인연이 되어 결혼 주례를 하신 은사님, 군대 복무 시 중대장, 직장 상사, 사회에서 만나 교우한 수많은 지인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친구들 모두가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생각하며 인연을 소중히 이어오고 있다. 고향을 위한 애향심을 잊지 않고, 남해인임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의 활동이 주변인들의 신뢰 속에 과거에도 오늘에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을 기대해 본다.
그는 대학시절 만난 후배 이명옥과 결혼하여 아들 영호(연세대 졸업, 현재 KAIST 재학중)군, 딸 수명(고려대, 영국 London Fashion College 졸업, 현재 코오롱 그룹에 근무)양과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 아닌가 싶다.
진정한 고향 사랑은 남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한 발 먼저 손을 내밀고 내 안에서 스스로 나오는 것임을 진심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향우회의 윤활유 같은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