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박윤일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차량운반용 특장차 제작분야
최고(最高), 최고(最古) 전문가!
▶ 일생일업(一生一業)
한 사람이 평생에 한가지 직업만 가지고도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그것이 좀처럼 용납되지 않거나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자연 수명은 늘어나고 종신고용은 어려워져 (불)명예퇴직이 일상화된 요즘은 사는 젊은 세대는 불행한 지도 모른다.
6·25전쟁 나던 해 태어나 이제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박윤일 동문, 그는 한가지 직업도 아니고 무려 12가지 분야에 종사하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오늘날 차량운반용(car carrier) 특장차 제작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있다.
우리가 길 가다보면 자동차 회사에서 출고돼 주인을 찾아가는 승용차 등을 싣고 가는 트럭을 만나게 되는데, 이 트럭이 바로 차량운반용 특장차다. 박 동문의 일성산업은 현대자동차 등에서 제작한 트럭에다 차량을 싣고 내리기위한 철골 구조물과 기계 장치를 부착하는 특수가공업체다.
▶ 얼핏 들으면, 단순한 작업 같아보여도 사실은 전혀 반대다. 자동차 공장에서 나온 새 차를 싣고 고속도로를 시속 100km 안팎으로 달리는 특장차(트럭)에서 만에 하나 안전에 문제가 생겨 사고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그래서 차량운반용 특장차 제작은 '안전과 완벽'이 생명인 사업이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업 분야가 대기업에 의해 장악돼 있듯이, 특장차 사업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대형업체 3곳이 특장차 사업 시장을 거의 지배하고 있는데 소규모 업체로 기술, 경험, 가격 경쟁력 등을 두루 갖춘 박 동문의 일성산업은 그런 점에서 독보적이다.
지난 5월 20일 기자가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그의 공장을 찾았다. 특장차가 제작되고 있는 그의 공장을 둘러보고 한참동안 설명을 듣던 기자가 "선배님 말씀 들어보니, 선배가 이 분야에서 최고(最高)의 전문가로 보이네요!"라고 운을 뗐다.
돌아온 그의 대답.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고, 회사 규모는 작지만, 특장차 제작에 관한 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네." 참으로 겸손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서 자부심이 금방 묻어난다. "차량 운반용 특장차를 몰고 다니는 운전자들에게 일성산업과 박윤일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모른다'고 대답하는 운전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특장차 운전 경험이 짧은 초보자라고 보면 틀리지 않네."
▶ 주경야독과 자수성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가 겪은 어려움과 거친 삷을 듣고 있던 후배(기자)에게 적합한 단어가 떠올랐다. 자수성가(自手成家)! 그렇다. 많은 동문들과 향우들이 그랬듯이, 박 동문은 글자 그대로 자수성가를 이룬 것이 분명했다. 그의 과거(?)가 더욱 궁금해졌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해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처음 간 곳은 대구, 그곳에서 인쇄소에서 잠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붓글씨와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낮에는 스테인레스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야학)를 다니는 주경야독(晝耕夜讀) 생활도 잠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오류동에서 누에고치 알을 까거나 실을 뽑는 (잠사)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남들보다 늦게 군에 입대해 35개월을 해군에서 복무하고 27살에 제대한다. 그런데 해군에서 맡았던 보직이 의외(?)였다. 보급, 서무, 작전을 담당하며 차트를 쓰는 보직이었단다. 인생은 알 수 없다고 했던가, 해군에서 익혔던 업무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업에 도움이 될 줄이야! 회사 이름(일성산업: 日成産業)과 자녀 이름도 직접 지었다고 한다.
▶ 1녀1남 자녀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워
박동문은 경남 함안 출신인 부인과 사이에 1녀1남을 두고 있다. 농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농사가 '자식농사'라고 했는데, 자녀들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운 것으로 보인다. 올해 32살인 딸은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아들(30세)은 세계적인 기업의 한국지사에 다니고 있단다.
실내(indoor) 골프장 시설 사업에 뛰어들어 일본 전문가들이 만든 설계도면을 어깨너머로 보고 직접 도면을 그리기도 했고, 방직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고, 삼성전자, 삼성코닝, 롯데와 해태제과 등에 기계를 납품하기도 했다. 전자제품을 납품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을 날리기도 했단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의 부도도 겪었고, 지금 가치로 치면 수억원, 수십억원에 해당하는 돈을 남에게 떼이기도 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역시 그를 지켜 준 것은 지혜로운 부인과 꿋꿋하게 자라준 아이들이란다.
"특히 아내한테 고맙지! 처음 부도가 났을 때, 아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전화를 받을 때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받았고,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 3일 동안 라면만 먹여서 학교를 보내면서도 나한테는 따뜻한 밥을 해 줬다네." 그가 부인에게 고마워하는 말 역시 빈말이 아님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이어지는 말. "부도가 났을 때도, 남에게 큰돈을 떼일 때도, 단 한 순간도 좌절한 적은 없다네. 아직 젋으니까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부도를 맞아도 술을 먹고 방황하거나 그런 적이 없었네."
▶ 그가 생각하는 고향과 친구
"먹고 살기 위해 정신없이 뛰다보니, 고향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 17살에 고향을 떠나, 둘째인 아들이 백일 때인 1984년이 되어서야 처음 고향을 방문했네."
이제 그는 친구들 모임에도 자주 나가고, 사무실과 공장에 여자 사무원과 영업사원도 두지 않을 정도로 회사를 절실하게 꾸려가는 등 실용주위가 몸에 배 있으면서도, 친구들을 만나면 기분 좋게 술을 사는 멋진 선배로 다가왔다.
그가 우리 남해중학교 동문과 향우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