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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향우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이환성(李渙成) - 라이프스토리, 모교의 역사, 추억, 학창 주변의 유배문학이야기

내용
이환성(李渙成) -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 남해대교의 비하인드 스토리(PDF)
출처
망메새

상세내용

노블레스 오블리주

'쓸모있는 사람'을 지향하며

 

 

 

▶ 가을밤 고향 선배와 후배의 만남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 이환성 동문(남중10회)을 만나러 최동진 사무총장과 동부 이촌동을 찾았다. 오랜만에 후배들이 왔는데 저녁을 사겠다고 하시면서 부근의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환성 동문의 첫 마디는 "동문회지 만드느라 고생이 많을 걸세.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아네, 뭐 별 거 없고 그냥 저녁이나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나 하세나." 툭툭 던지는 말씀이 소탈하고 정답다.

그리고 잘 생긴 얼굴만큼이나 술술 풀어내는 화술 또한 뛰어나다. 오랜 만에 만난 반가움과 함께 선후배의 격의 없는 대화가 오고간다. 숨김이 없다.

그저 술술 풀려나오는 누에 실처럼 투명하고 여유롭다. 여유롭게 그리고 진한 감동 속으로 엮어가는 스토링텔링의 진수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 학창시절의 감회

 

학찰 시절 특별히 기억나는 일을 여쭈니, 내가 태어난 곳이 바로 현재 남해전문대학내 관사여서 유년기에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와 함께 넓은 운동장을 마음껏 뛰면서 체력을 키운터라 학창시절에는 남해군대표로 각종대회에 많이 나갔는데 육상선수는 호르라기 '휙' 불면 출발해서 순식간에 끝이 나는 게 몹시 서러웠고 끝나면 점심은커녕 사이다 한 잔도 못 먹고 돌아왔던 이야기를 하며 단거리 육상선수는 인기가 없는 하나의 이유라고 설명하신다.

그래도 단체 경기인 축구나 배구는 경기 시간이 길어 응원도 많이 받고 쉬는 시간에 음료수라도 제대로 마실 수 있었다고 농담 섞인 육상선수의 애환을 이야기 하면서 세 사람은 허심탄회하게 웃기도 하였다.

스파이크가 없어 남의 스파이크를 빌려 신고 달렸는데 상대 선수가 코너에서 스파이크로 이환성 동문의 발등을 찍었다. 

아픔을 참고 결승선에 들어왔을 때는 발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상처는 심각하였지만 병원에 갈 생각보다는 비싼 남의 스파이크가 찍혀 찢어진 것에 더 걱정을 했던 이야기도 털어놨다.

그리고 선친과의 관계로 선생님들의 애정 어린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상기하기도하고 그래서 남중, 농고의 학교 주변은 남달리 애정이 있는 곳이라 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치 있는 삶'

 

1년 전 재경남해읍향우산악회에서 충청도의 옥순봉을 등정하고 단양팔경을 감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이환성 동문은 산행에 참가한 모든 향우들을 단양관광호텔로 초청하여 맛있는 점심을 대접한 적이 있었다.

점심 식사 후 호텔 건물 앞 '觀光報國(관광보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를 배경으로 모든 향우가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누군가 '觀光報國'의 연유에 대해 물으니 지방에서의 호텔사업은 이익보다는 좋은 쉼터를 제공하는 사회사업 정신으로 국가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이 대형석탑을 세웠다는 설명을 들은 바 있다.

투철한 긍정적 사고와 국가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평소의 인생관을 물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환성 동문은 부친 이청옥(李淸玉) 남해공립농업중학교(5년제/현 남해중 · 제일고 전신) 교감으로 재직하실 때 학교 관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1950년 3월에 진주공립농업중학교 발령을 받았으나 혼란기라서 사임하고 있던 중 6·25를 맞아 북으로 납치되던 그 해에 지리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족상잔의 쓰라린 아픔은 이환성 동문의 가족에게도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재경남해군향우회 8대 회장으로 재임했고 재경 남해농업고등학교(남해제일고등학교 전신)동문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향우회와 동문회를 크게 발전시킨 강창호 회장은 이환성 동문의 부친 이청옥 교감께서 가르친 수제자였고 스승과 함께 납치되던 중 탈출하였기에 스승의 아들인 이환성 동문을 동문회 이사로 선임하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 고향을 향한 마음들

 

이환성 동문은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학교 최고위과정을 수료한 학구파이기도 하다. 신동관 전 국회의원의 청와대경호차장 보좌역을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수행하면서 많은 향우를 도왔다. 이후 사업에 뛰어들어 특수강, 기계부품수입판매 경영도 했으며 관광사업을 운영하는 등 그의 사업실적은 다양하다. 현재 (주)이화특수교역을 운영하고 있으며 단양  BENIKEA호텔(단양관광호텔)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2002년 9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재경남해군향우회 감사, 재경남해농업고등학교 동문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재경남해읍향우회 고문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1997년에는 남해읍에 18층 남해현대아파트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2012년에는 설천 노량공원에 남해대교 기념탑 건립도 주도하였다. 그리고 남해군과 일본 오오구치(大口)시와 자매결연 산파역을 맡아 남해읍에서 고현면 입구 도로까지 벚꽃나무 200만 엔(한화 2000만원)어치를 식수하였으며 '천안함 폭침'시에는 아버지 없는 가정을 겪은 탓에 유가족 돕기를 선도하여 애국심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한편 1982년에는 재서울남해경제인친목회를 발기하여 수년간 남해 소년 소녀 가장 돕기, 도립남해전문대 기숙사 건립지원 등 고향 돕기 사업을 통해 보통사람들이 쉽게 하기 어려운 애향정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 지금도 어쩔 수 없는 의리와 의협심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로 인해 실직, 실업자들이 대리운전자로 추운 길거리를 밤늦게 해매며 삶을 이어 가는 어려움을 보며 약 5,000여만 원의 사비로 2010년도에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에 사단법인 대리운전협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회 빈곤층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며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려는 마음이 와 닿는 대목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이러한 정신은 여러 방면에 나타난다.

첫째로 서울 시내의 점심시간대 거주 지역 간선도로변에 상가운영과 주민 편의를 위해 주차단속을 완화하도록 건의하였는데 이 부분 박원순 시장의 민원시책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둘째로 지하철 5개선이 환승하는 번잡한 왕십리역 '환승표지' 부족과 미흡으로 시민들이 혼잡, 혼선을 겪고 있음을 수차례 지적하여 10월 현재 교체작업을 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편지와 감사의 선물을 시청당국에서 전해오기도 했다. 평소 이환성 향우는 중앙 정부에도 정책 건의를 한다고 했다.

 

 

 

▶ 마무리도 끝내 고향 사랑

 

이환성 동문의 부인 오영주 여사는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하고 이태리에서 수학하였고, 한국 YWCA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호텔 운영과 지역 교회에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큰딸은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조교로 있다. (인터뷰 이후 큰  딸이 2013년 11월 중순경 미술사 전공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경사가 있어 추기 함), 둘째 딸은 결혼하여 뉴욕에 생활하고 있으며, 아들은 대학원 호텔학과를 나와 단양호텔에서 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향과 향우회, 동문회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를 부탁하니 누구나 고향과 동문회에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한다. 순수해야 할 이러한 좋은 모임을 특히 정치적이나 사심을 개입시키는 것은 죄짓는 것과 같다며 오직 순수해야한다 했다. 시대가 많이 변해 고향사랑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인맥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예전과 달리 요즈음의 무관심은 어쩌면 필연일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후배들이 잘하면 된다고 했다.

얼마 전 이환성 향우가 고향신문에 기고한 '거마와 빵주사' 이야기는 나이 든 60대 남해인들의 아련한 향수처럼 느끼는 스토리인데 이러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것은 그의 마음이 항상 고향을 향해있음이 아니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누구나 고향 사랑의 마음이 있겠지만 자신은 고향을 향한 마음이 누구보다도 크다고 했으며 이 때 까지 고향을 위해 했던 일들도 모두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향우님들께 꼭 한마디를 당부했다.

즉, '향우회나 고향 일에는 사리사욕의 이해와 이용을 할려고 하면 안 된다.'며 신동관 의원과의 당시 청와대 시절은 찾아온 고향인들 모두의 민원을 다 해결해 줄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며, 한편 나에게도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된 은혜에 항상 감사를 한다며 많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주마등처럼 이어지는 선배와 후배의 이야기들은 때로는 학창 주변으로, 때로는 봉천을 타고 내리다가 강진 바다를 저어 선소항으로 이어지면서 어쩔 때는 망운산을 올랐다가 멀리 금산 소풍가던 추억의 길도 밟으면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나누기로 하고 필자가 먼저 자리를 일어선 것은 지하철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다음 12월 19일 동문회지 출판 기념일을 겸한 송년회 때의 만남을 약속하면서 선배와 후배는 서로의 건강을 빈다.

동부 이촌동의 가로 숲길의 발밑으로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 어느 듯 가을이 선뜻 다가 왔음을 느낀다.

 

 

 


 

 

거마와

              빵주사

 

 

 

최근 신동관 선생 기념탑 건립을 추진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1950년대 당시의 남해읍내에 살던 사람들은 '거마'와 '빵주사'는 방씨 성을 가진 금화의 하인이었다. 그러니깐 거마와 빵주사는 남해 사투리와 경상도 발음이 합성된 것이다.

당시 거마는 상당한 체격에 기품이 있는 얼굴로, 왕년에 기방에서 날렸다고 알려져 있었다. 요즘 생각해보면 글래머에 머릿결이 검고 숱이 많았다. 특히 걸치고 다니는 담요(망토)는 요즘의 패션에 비해서 결코 뒤지지 않은 것 같다.

빵주사는 한동안 거마의 동생 혹은 부부관계로 알았었는데 후에 안 사실은 주종관계였다. 어릴 때 궁금해서 몰래 살피면 거마의 2m이내에는 절대로 접근도 못하고 쩔쩔매는 빵주사를 목격하곤 했다.

그런 빵주사를 마추지면 놀렸다. 어느 땐 "빵주사!"해도 그의 눈에 나는 항상 놀리는 애로 찍혔던 것 같다. 그런 중에 남해경찰서에 방씨 가진 서장이 부임했는데 그때가 빵주사의 기가 제일 살았던 때다. 나만 보면 "너 임마 경찰에 이른다"고해서 사과를 했다.

그런 후부터는 우리 할아버지 심부름을 잘했다. 모자란 듯 해 보이는 빵주사였지만 우편료가 들고 통신시절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부고나 축하편지를 기가 막히게 잘 전해주었다. 그래서 이런 일을 잘하는 이들에게는 '빵주사'라는 닉네임이 따랐다.

빵주사는 그 후에 거마가 죽었을 때 그 옆에서 며칠을 굶고 울었다. 그리고 그 움막에서 곡기를 끊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밥을 갖다 주기도 했으나 언젠가부터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빵주사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배신이 난무하는 요즘 세태에 거마와 빵주사가 충성스런 주종관계였는지, 흠모한 순애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새삼스레 참 아름답고 좋아 보인다.

"빵주사 어른! 미안해요, 하늘나라에서는 꼭 소원 이루세요."(참고로 이 내용은 남해의 실화이다. 오늘의 각박한 세태에 교육적,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