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정동효 - 라이프스토리
상세내용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열정적으로 책을
저술한 발효학의 大家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 일 년에 책 두권, 논문 세편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내가 쓴 책을 쌓아 내 키만큼 되면 그것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기는 나의 유산이 되게 하고 싶었다. 50여 년 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할 때 키 높이까지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지만 당시 식품공학 부문 국내 교재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나 타자기도 없어 일일이 노트에 적은 것을 부인이 모두 다시 정서를 해서 책이 만들어 질수 있었다. "육필 원고의 4분의 3은 아내가 꼼꼼히 정리한 것"이라며 "그 때문에 가운데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아직도 남아 있는 아내의 희생"이라며 고마움을 전하였다. 정동효(설천문항 80) 동문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학교를 퇴직하고 지금까지 15여년을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책을 집필하고 논문을 발표하여 1998년 퇴임 때까지 저서 100여권, 학술논문 110편을 쌓아 놓으면 자기의 키를 넘어 선다. 정년 후 1998 ~ 2012년까지 우리건강을 위한 기능성 식품, 한국의 전통발효식품 등 47권의 책을 펴냈다. 매년 3권 정도(약 1000페이지 정도)의 양이다. 2013년에 출판된 「발효식품대전」, 「발효식품의 기능성」, 「전통장류발효식품대전」등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발효학의 저술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대학에서 행정뿐만 아니라 연구도 많이 하여 학술지에 1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공로로 건국대학교 연구상(1971년), 한국농화학회 학술상(1973년), 한국 식품과 화회 학술상(1994년), 남해 인상(1995년), 교육표창장(1995년), 국민훈장 석류장(대통령, 19998년) 등을 받았다.
▶ 남해농고에서 서울대학교 농대에 최초로 입학하다
1933년 남해 설천 문항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남해농고(3회)에서 서울대에 진학한 첫 학생이었다. 고정훈선생님의 권유로 195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화학과에 입학하였다.
1958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모집에 합격하고 육군에 현지 입대하여 논산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연구소에 배치되어 식품 연구를 시작하였다. 1년 후 귀휴만기 제대하여 1962년 4월까지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195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농화학과에 진학하고 1961년에 수료하였다(농학석사).
1962년부터 건국대학교 전임강사에서 정교수까지 되었고 1971년에는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를 받았다. 이 사이에 일본정부 초정으로 2년 간(1968~1970년) 일본 구주대학 농학부 농화학과에서 발효학을 연구하고 다시 건국대학교로 복직하였다.
1972년 중앙대학교 농과대학 식품공학과 교수로 옮겨 여러 보직 교수로 있으며 행정을 하게 되었다. 농대학장(1979년), 안성캠퍼스 장학감(1980년), 산업대학장(1982년), 교무처장(1985년), 안성캠퍼스 부총장(1995~1997년), 일본 오사카대학 공학부 발효공학과에서(1983~1984) 생명공학을 연구하였고, 안식년을 이용하여 미국 MIT(1994년)에서 연구를 하였다. 연구단체 활동도 활발히 펼쳐 김치연구회 부회장을 맡았고 한국식품과학회 회장을 맡아 많은 연구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활발한 연구 활동 덕분에 퇴임 시 국민훈장 석류장과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되는 영광을 안았다. 현재 그가 관여하고 있는 학회는 김치를 국제적인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한국산업미생물학회와 발효식품에 관해 연구를 하는 전국식품과학회다. 둘 다 우리식품의 우수성을 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본 토대를 연구하는 모임으로 정 교수는 이 모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발효식품인 김치의 장류 그리고 차에 대한 처서와 논문을 많이 발표해서 발효학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가이고 아직까지도 연구는 진행형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저서와 논문 발표를 계속하고 한국 식품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 위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연구실에서 실험하여 좋은 결과를 얻고 자신이 가르친 석사, 박사가 40여명으로 이는 그의 자랑거리이다.
또한 연구뿐만 아니라 정부의 기관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즉 보사부 식품위생심의위원회 위원(1975~1988), 한국과학기술단체 기술봉사단 전문위원(1976), 대한주정협회 자문위원(1975~1988), 농산물 규격심의위원회 위원(1980~1990), 수출용원재소요량 심의위원회 위원(1981), 국방부 조달본부 규격자문위원(1987), 농림부 전통식품위원회 위원(1996~1988), 김치연구회 부회장(1991), 한국종균협회평의원 위원(1996~2009), 한국미생물·생물공학회 회장(1995), 한국식품과학회 회장(1997), 상록인 명예의 전당 현정자(2009),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자문위원(1995), 재경진양정씨참정공파화수회회장(2207), 한국전통주진흥협회 고문(2008)등을 역임하였다.
▶ 서울대학교 농학대학 상록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다
서울대학교 농학대학 동창회에서 농학교육 100년을 빛낸 영광의 얼굴(2008년)로 선정되었다.
100년 동안 졸업한 동문 중에서 농학자 100명, 정치인 20명을 선정하여 농학교육 100년을 빛낸 영광의 얼굴(2008년)로 추대되고 이들을 상록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모교 도서관 옆 건물에 상설되어 있다.
그리고 모교인 남해농업고등학교는 많은 농업인을 양성하였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농고 건물을 현재 남해 대학이 사용하고 있고 학적부 등은 남해제일고등학교에 이관하였다. 그래서 제일고등학교에 남해농업고등학교의 박물관을 세웠다. 여기에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 정동효 교수의 책과 논문(200여권)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 기증된 많은 정 교수님 책들이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도록 잘 전시해 주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향우회 활동을 적극적이다.
1962년 이영자(남해 지족/초등교사)와 결혼했는데 결혼과 동시에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편의 저술 작업에 한 몫을 거들었다. 건국대 재직시절 장만한 집에서 40년째 살고 있고 2남 1녀 모두 출가해 다섯손자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장남 정성욱(일본 동경대학 약학 박사), 정성원(중앙대학교 대학원수료)회사원, 정성아(약사, 중앙대학교 대학원 수료)약서로 근무 중이다.
평소 운동을 좋아하는 정 교수는 향우회 활동도 적극적이어서 재경 남해테니스회 회장을 맡았고 골프도 즐기는, 80살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체격과 모습이다.
고향 남해를 위한 교수들의 모임인 '남해포럼'에 적극 참여하여 고향의 발전을 위해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는 남해의 특산물 유자, 치자, 비자 중에 가공개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유자를 꼽았다.
"비자 개발은 의미가 없고, 치자는 천연색소로 개발 가능성이 있지만 이미 대만에서 개발해 수익성이 없어졌다. 그러나 남해 토종 유자만은 그 향이 뚜렷하고 좋아 가공 개발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특히 유자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비타민 C와 혈관수축제의 역할을 하는 비타민 P가 들어있어 향음료로 개발하면 적격이라는 것이다.
고향인 설천면 문항에는 형님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있어. 명절 때 너무 멀고 번거로워 자주 찾지 못한다는 그의 얼굴에 향수와 고향 사랑이 가득하였다.
그의 좌우명은 '정직하게 근면하게 성실하게'인데, 이는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말해준다.
젊은이보다 더 열정적으로 자신의 키 높이보다 더 많은 책을 저술하고 후학양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일분 일 초도 헛되이 쓰지 않는 뚝심 있는 모습은 존경과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