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재경남해군향우회
동문발자취 - 박희태
상세내용
자랑스러운 남해中 선배
-한국정치사의 巨星
▶ 박희태 동문이 걸어온 길
1938년 8월9일 경남 남해군 이동 정거리 출생
남해중(3회) 경남고 서울대 법대 졸, 미국 버클리법대 수학
건국대 법학박사
사법고시 13회, 부산 고등검찰정 검사장
남해·하동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
양산 18대 국회의원 (6선 의원)
한나라당 최장수 대변인, 원내총무 (여야 2회)
법무부장관, 한나라당 대표최고의원 (2003년, 2008년)
현재 변호사, 건국대 법대 석좌교수
위의 화려한 약력이 말해 주고 있듯이 박희태 동문은 우리 남해인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다 아는 너무나 유명인사라 구태여 소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색한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정치사상 4년 3개월이라는 최장수 당대변인을 하면서 많은 신조어를 만들며 화제의 인물이되었고, 국회의 꽃이라는 원내총무를 그것도 여당과 야당을 번갈아 두 번이나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의 당대표와 야당의 당대표까지 역임하고, 3부요인인 국회의장까지 하셨으니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동문회지 편집위원이라고 전화를 드렸더니 흔쾌히 인터뷰 일정을 잡아주셔서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28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2시간에 걸쳐 편안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동문회지인 만큼, 스포트 라이트가 비껴간 학창시절의 추억을 중심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진한 삶을 살아온 선배의 성공스토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박희태 선배는 6·25전쟁 중인 1951년 남해중학교에 보결생(TO가 빌 때 입학하는 학생)으로 입학하게 되는데, 그 사연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국가고시를 봐야하는데 남해 입시생 중에서 2등을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 천재성이 입증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부산의 명문, 경남중학교에 지원하여 전체 8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안 계시는데, 전쟁통에 객지로 보낼 수 없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다시 돌아와 남해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동 정거리에서 20리 길을 걸어서 등교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학교에 딸린 논밭들이 있어서 실습 명목으로 학생들이 인분도 퍼고 논밭도 메는 등 농사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점심시간만 끝나면 집으로 가는 친구들이 많아서 급장(요즘의 반장 : 이름을 적어 내는 막강한 권력)으로서 애로가 많았다고 회고한다.
결국 고등학교는 부산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당시 남해中에서 경남高에 여러 명이 응시하여 6명이 합격했는데, 남해학생 중 박희태 동문이 1등이었고 경남고 전체에서는 46등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70대 중반의 나이에 60여년전의 숫자를 정확히 집어내는 놀라운 기억력에...)
그리고 누님댁에 기숙하고 하숙도 하면서 서울대 법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게 되고, 거뜬히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당시 경남고에서 30명이 응시해서 6명이 합격했다고 함).
왜 법대를 지망하게 되었는지를 질문 드리자 "어릴 때부터 검사가 꿈이었고, 그 꿈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며 그 동기가 된 가슴 아픈 가족사를 들려 주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친이 별세했는데, 술에 취한 동네사람(마을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는)에게 맞아서 변사를 했다는 것이다.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데, 경찰에서는 '변사사건이니 진주 검찰청의 검사가 와서 확인을 해야 장사를 지낼 수 있다'고 해서 시일은 가고 유가족들은 슬픔 속에서 더욱 난감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경찰이 제일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 보다 더 높은 검사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그 때 받은 충격으로 커서 꼭 검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박선배는 사법고등고시 13회에 합격하여 부산 고등검찰청 검사장까지 25년의 검사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 남해·하동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변신, 곧 원내부총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대변인을 맡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총체적 난국", "정치9단" 등의 숱한 정치신조어를 만들어내 정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감동시키면서 화려한 정치인생을 펼치게 된다.
물론 박선배에게도 법부장관 조기사퇴, 18대 공천 탈락, 전당대회 사건 등 시련의 시기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그 때 세상을 향해 던졌던 "정치의 쓴 맛은 좀 봤지만, 인생의 폭은 풍만해 졌다"는 말씀은 지금도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동기생 중에서도 항상 앞서가던 법조인, 정계에 입문해서도 늘 두각을 나태낼 수 있었던 성공의 비결을 묻자 '남해의 정기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친화력의 원동력이 되었던 "화(和)"를 강조하신다.
和平, 家和萬事成 등의 용어에서도 시사하는 바와 같이 "和"는 인간의 삶에서 있어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 그래서 연설문집의 책이름도 "和"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며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농담을 던지며 여전히 바쁘게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건강관리와 친구들을 만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계획이라고, 끝으로 남해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하자 "남해사람들은 똑똑하다. 그러나 너무 똑똑하다는 말은 듣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때론 1등보다는 2등 3등을 가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대선배가 진정으로 고향후배들을 아끼며 충고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남해인은 사실상 한 뿌리인 만큼, 남해중, 남해종고교, 남해여고 재경동문회가 남해제일고등학교 동문회로 통합한 것은 잘된 일이라고 치하했다. 재경남해제일고등학교 동문회는 이처럼 탁월한 동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큰 복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