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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이야기

조선시대

유배와 유자

내용
약천 남구만의 남해 유자 - 김준호, 손심심
출처
남해문화 25집
출생지
-
시대
-

상세내용

유자 11. 유배와 유자 -김준호 재피방;

“日落天如黑(해 떨어진 하늘은 칠흑 같고)

山深谷似雲(산 깊은 골짜기는 구름 같네)

君臣千載意(임금과 신하의 천년 약속의 뜻)

惆悵一孤墳(슬프도다. 하나의 외로운 무덤뿐이로구나)”

1519년 중종 시절, 조광조 등 신진파가 숙청당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를 가 탱자나무 울에 갇힌 위리안치 생활을 하가가, 얼마 되지 않아 29세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은 기준(奇遵, 1492 ~1521)의 피 끓는 절명시이다.

유배는 사형을 간신히 면한 죄인을 먼 곳으로 추방하여 격리 수용하는 무거운 형벌로, 사면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는 무기수와 같았다.

주로 왕권에 반하는 행위를 했거나, 당쟁에 희생되거나 종교적인 이유 등이 대부분이었고, 실제적인 큰 죄를 질렀다기보다는 주로 양심과 소신을 굽히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왕족들은 주로 가까운 강화도 보냈고, 가벼운 형벌은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보내고, 나머지 중죄인은 한양에서 천 리가 떨어진 남쪽 지역으로 보냈고, 대역 죄인은 흑산도나 제주도로 보냈다.

함경도 경원, 제주도, 추자도, 흑산도는 일 급지이고, 가덕도, 거제도, 남해, 고금도, 진도 같은 섬은 이 급지이고, 장기, 언양, 기장, 광양, 순천, 흥양, 장흥, 영암, 강진, 해남 등의 해안가 육지는 삼 급지였다.

그중에서 섬은 바다로 사방이 막힌 절해고도로 폐쇄성과 단절성으로 천연 감옥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곳을 다스리는 수령이나 병졸은 그대로 교도소장과 교도관을 겸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거에 최정상 고관 자리에서 권세와 지위를 누리다가.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유배객들은 심리적인 위축감과 허무함에 심리적 고통이 엄청났다.

거기에다 언제 사약이 내릴지 모르는 공포심과 지리적, 심리적인 거리감에 따른 향수병과 거기에다 위리안치 탱자나무 울타리의 고립감과 원망과 배신감은 잠시였다.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낯선 환경과 입에 맞지 않는 거친 음식, 대화할 상대가 없는 외로움, 가족에 대한 죄스러움 등으로 고통을 겪다가 풍토병을 얻어 안타깝게도 배소에서 죽기도 했다.

“今朝欲寫思親語(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는 말 쓰려 하니)

字未成時淚已滋(글씨도 쓰기 전에 눈물이 가리네)

幾度濡毫還復擲(몇 번이나 붓을 적시다 도로 던져 버렸으나)

集中應缺海南詩(문집 가운데 응당 남해 시는 빠지게 되겠구나)”

이 시는 장희빈의 국정농단을 비판하다가 남해 하고도 노도로 53세에 유배를 온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생일을 맞은 칠순 노모를 그리워하며 쓴 시다. 그는 얼마후 이곳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고 그다음 해 56세에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김만중의 사위 소재 이이명(李頤命, 1658~1722)도 모함을 받아 34세와 63세에 남해로 두 번씩이나 유배를 왔다가 64세에 한양으로 이송되어 사사를 당했다.

처음 영해에서 남해로 이송되었을 때, 장인은 이미 남해 노도에서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는 장인의 배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를 자신의 배소인 남해읍 죽산마을로 옮기고 장인을 기리며 ‘매부(梅賦)’라는 시를 남겼다.

“炎州地瘴(불타는 고을에 병은 나돌아도)

卉木滋兮(풀과 나무는 잘 자라네 ) .

玉玦南遷(옥에 티로 남쪽에 귀양 가니)

梅受知兮(매화가 미리 알았네)”

이에 앞서 조선 중종 때 남해 노향으로 유배 온 자암 김구(金絿, 1488~1534)는 12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중앙 복귀의 꿈을 체념한 듯한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풍류를 읊은 ‘화전별곡(花田別曲)’을 남겼다.

그 내용 중에는 그가 남해의 유생, 준사, 기생들과 어울려 유흥을 즐기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는데, 유자 껍질로 만든 유자잔(柚子盞)이 등장한다.

“綠波酒 小麴酒 麥酒濁酒

(녹파주와 소국주에 보리술과 막걸리)

黃金鷄 白文魚 柚子盞 貼匙臺예

(황금 닭 흰 문어 유자잔 접시 대에)

偉 가득부오 勸觴 景기 어떠하닛고

(아 가득 부어 술잔을 권하니 이 모습이 어떠합니까)

鄭希哲氏 過麥田大醉 再唱

(정희철씨 밀밭만 지나쳐도 크게 취한다니)

偉 어느제 슬플저기 이실고

(아 어느 때에 슬픈 적이 있을까)”

특히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숙종 때 대사간, 도승지,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명신으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50세 이후 총 4회의 유배를 갔다. 그중 첫 번째 유배지가 남해였다.

그는 이곳에서 1679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용문사 대웅전 앞에 서 있던 유자나무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그것과 연관된 영유시(詠柚詩) 20편을 남겼다.

당시 남구만이 짧은 남해 유배 생활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적은 영유시는 남해 유자의 재배 상황을 알려 주는 기록일 뿐만 아니라,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과 유자 공물 상납으로 인한 고통과 약용 식품으로서의 쓰임새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을 아끼는 목민관으로 이름이 드높았고, 명문장가인 남구만이 남해 유배지에서 남긴 ‘영유시(詠柚詩) 20수’로 인해 남해 유자는 절망적인 유배(流配) 산물에서 희망적 유자(柚子로 등극한다.

“聞土人言 數十年前 村家柚樹 處處成林 每於秋冬之齋 黃色耀林望如雲錦(이 지방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수십 년 전에는 마을의 집에 유자나무가 곳곳마다 숲을 이루어, 매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황금색 숲이 찬란하여 바라보면 구름 비단과 같았다네)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

[출처] 유자11|작성자 김준호손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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