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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이야기

조선시대

연산군 남해유배객 :장순손(張順孫), 김전, 이세좌

내용
왕조: 연산 휘: 장순손(張順孫) 본관: 인동 생물연도: 1453~1506 유배기간: 1504~1506 유배시관직: 세자좌부빈객 최종관직: 영의정 유배사유: 갑자사화
출처
남해문화원_남해유배인물 100인전, 남해군지 상권
출생지
-
시대
조선 연산군

상세내용

장순손(張順孫)

 

왕조: 연산 휘: 장순손(張順孫) 본관: 인동 생물연도: 1453~1506

유배기간: 1504~1506 유배시관직: 세자좌부빈객 최종관직: 영의정 유배사유: 갑자사화

 

장순손의 자는 자활(自活)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요, 군수 중지(重智)의 아들이다. 계유년(1453)에 태어나서 성종 을사년(1485)에 문과에 올랐다.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 탐욕이 많고 더러워서 김안로에게 붙었다. 신묘년(1531)에 정상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렸고, 갑오년(1534)에 죽으니, 시호는 문숙공(文肅公)이다. 벼슬을 추탈 당했다가 뒤에 다시 관직이 회복되었다.

 

장순손의 유배지가 남해였다는 기록이 중종실록에 나타나는데 본 내용은 유배 관직이 회복되어 20여년의 후에 중종에게 아뢰는 내용 중 일찍 남해에 유배되었음을 예로 든 구절이다.

 

중종 13년(1518) 2월 2일에 아뢰길 신은 폐조 때 먼 해도(海島)에 귀양갔었고, 돌아와 형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 정신을 상실해서 일을 당하면 깜박 잊기가 일쑤입니다. 라 하였으며,

 

중종 19년(1524) 7월 26일에 지사 장순손이 아뢰기를 ,.전략.. 신이 번방의 수령에게 들으니 ‘죄를 짓고 들어가 사는 것은 다 도죄(盜罪)를 범한 사람이므로 그곳에서도 흑 마소를 홈치는데, 잡히면 본디부터 살던 사람도 옥사에 관련되어 형신을 받게 되므로 도리어 백성에게 해가 된다.’ 합니다. 신이 전에 남해(南海)에 귀양 가 있으면서 보니, 그곳 사람은 거의 도죄를 범하고 변방으로 옮겨진 자들이므로 수령이 제어하기를 어려워하였습니다. ... 후략 라는 점을 불 때 남해에서 유배생활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유배당한 왕조가 중종 때가 아니라 연산군조 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폐조 때 해도로 귀양 갔다는 것과 전에 귀양 가 있으면서... 운운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유배 이전의 국문 내용이다.

 

연산조 갑자년(1504) 5월에 “간사와 허위는 그 정상을 캐지 않으면 안되니, 장순손, 이점은 옥에 가두어 앞으로 고문하고, 한위는 보방하고 신수영은 놓아 보내라.” 하였다. 그리고 “6월에 장순손, 이과, 김전, 권민수, 남궁찬을 국문하게 하였는데 장순손과 박은이 도망하고 없으니 전교하기를, 빨리 잡아다가 국문하라.” 하였다.

 

잡혀온 장순손의 6월 14일 국문 내용이다. 추관 유순 등이 장순손, 박은 등 밤까지 사냥함을 앞장서서 주장하여 논계한 자를 국문하니, 순손이 공초하기를 “지난 경신년 10월 사이에 신이 부제학으로 수찬 박은과 함께 입직하였는데, 은이 ‘사냥의 일을 본관도 논계함이 어떠냐?’ 하기에, 신이 ‘동료와 의논해서 아뢰어야 하리라.’고 답하였더니, 은이 서리를 시켜서 동료에게 두루 알리어 의논이 합하였으므로 아뢰었습니다.” 하고,

 

은은 공초하기를, “신과 장순손이 본관에 입직하였을 적에 순손이 ‘밤까지 사냥하는 일을 동료와 의논하여 아림이 어떠냐?’ 하고 먼저 서리를 시켜서 동료에게 알리어 의논을 모았으므로 신이 말단 관원으로서 막을 수 없어서 논계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하략...

 

연려실기술에 장순손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장순손은 젊었을 때 얼굴이 돼지 대가리처럼 생겼으므로 친구들이 그를 ‘돼지 대가리’ 라고 조롱하였다. 연산주가 성주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어느 날 종묘의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고 난 고기를 궁중에 드렸더니 기생이 보고 웃었다. 연산주가 까닭을 물으니 기생이 “성주사람 장순손의 얼굴이 돼지 대가리와 같으므로 사람들은 장을 가리켜 ‘돼지 대가리’ 라고 합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하자 연산주는 크게 노하면서, “장순손은 반드시 너의 애부(愛夫)로구나. 빨리 돼지 대가리를 베어 바치라.” 하였다. 공은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있었는데 잡아 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오다가 함창 공갈못 아래 갈림길에 이르니 고양이가 길을 넘어갔다. 이를 보자 공은 도사(都事)에게 청하기를, “내 평생에 과거보러 갈 적에도 고양이가 길을 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합격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이 고양이를 갈림길에서 보았고, 이 길로 가면 매우 빠르니 저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더니 도사가 이를 허락하였다. 현에 이르러 선전관이 돼지 대가리를 빨리 베어 오라는 명령을 받들고 상주까지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 은밀히 중종반정(中宗反正)할 기미를 알았으므로 천천히 가서 조령에 이르렀더니 선전관도 되돌아와 조령에 이르렀는데, 벌써 반정이 성공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문헌 :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장순손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자호, 자활이며 본관은 인동이다. 경북 성주에서 군수를 지낸 장중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 16년(1485)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정언, 회령판관을 거쳐 연산군 2년(1496) 홍문관 부응교, 응교를 지냈다. 연산군 5년(1499) 사인으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의 직제학,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에 오른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그가 언제 유배되었는지는 사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재직시 후원관사를 간하여 남해로 유배온 것으로 추정되며,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경상도관찰사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어 대사헌으로 재직 중 정국공신인 박영문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중종 3년(1508) 형조판서를 거쳐 1509년 호조판서로서 경연특진관을 겸하면서 폐지된 저화를 재사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좌참찬으로 군량 확보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15년부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노모의 연로함을 들어 계속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는 1518년 병조판서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의 현량과 실시를 반대하였으며 1519년 사림을 축출하려 하였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면되었지만 그 해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자, 복직되어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처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권신 김안로가 정권을 장악하자, 우의정에 오르고, 좌의정을 거쳐 1533년 76세의 원로한 나이에 영의정에 올랐지만 이듬해 죽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에 그와 선대의 묘소가 있다.

 

<출처 : 남해군지 상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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