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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배문학의 현장을 찾아서

내용
유배문학의 현장_남해군에 남겨진 당시의 흔적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 소개
출처
한국문학관협회
출생지
-
시대
-

상세내용

유배문학의 현장을 찾아서

 

유배는 죄인을 연고가 없는 벽지고도(僻地孤島)로 내치는 형벌이다. 그래서 유배를 온 사람은 대개 참기 힘든 고통을 겪는데, 때로 질병이나 정신적 절망감 때문에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때문에 유배는 목숨을 직접 빼앗지 않는달 뿐 사람을 열명길 코앞까지 보내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조선시대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정치가, 문인치고 유배를 한두 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 유배는 전가의 보도처럼 쓰였다. <조선왕조실록>만 뒤져보아도 유배와 관련된 기록이 2만 건이 넘을 만큼 유배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익숙한 경험이었다.

 

유배자가 오면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 해서 그 지역의 유력자에게 죄인의 관리와 감호를 맡겼다. 그러나 유배인의 생활비는 본인이 직접 부담해야 하는 게 원칙이라 처지는 더욱 난감했다. 더구나 유배인은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 취급을 당하기 일쑤인지라 보수주인이 방치해버리면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 닥치면 의식주 전체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경남 남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많은 사람들이 유배를 와 살다 떠나거나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다. 짧게는 몇 달 길면 수십 년을 유배지에서 살아야 했으니, 아무 일도 않고 무위도식할 수는 없었다. 평소 농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사대부 유배인들이 주로 한 일은 그 지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거나 학동(學童)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정치적으로는 명망가였고, 문인으로서도 학식이 있었던 사람이 꽤 많았으니, 지역 유지들에게도 도성의 유력자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오고 싶어 온 유배지도 아니고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기만 바라는 처지였으니, 많은 유배자들이 살았다고 해서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살던 집은 대개 허름한 초가집이었고, 살림도 단출했다. 이렇다 할 서책을 갖추기도 힘든데다가 죄인의 신분이었으니 유배지에서 업적을 남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유배라는 색다른 경험과 새로운 환경을 접한 일부 사람들은 그런 체험을 글로 남겼고, 답사하고 연구한 결과를 저술로 전해 후세 큰 가치를 지닌 문헌이 되기도 했다. 여느 유배지들과 마찬가지로 남해에 유배 왔던 사람들의 당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그런 형편에서도 유배인들의 옛 모습을 되새길 만한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금석문(金石文)일 수도 있고, 유허(遺墟)일 수도 있으며, 문학 작품 속에서 거론된 특정 장소일 수도 있다.

 

그 중 몇 군데를 소개한다.

 

먼저 <화전별곡>을 남긴 자암 김구를 기리는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追慕碑)>가 있다. 김구가 이배(移配)되어 남해를 떠난 1531년(중종 26)부터 175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에 세워졌다. 김구의 6대손인 김만상(金萬祥)이 남해현령으로 왔다가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지금은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 충렬사 앞 언덕에 있는데,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번역한 원문을 실어 김구의 생애를 살피는 데 참고한다.

 

오호라, 이곳은 나의 선조이신 자암 선생이 귀양살이하시던 고을이다. 선생의 6대손인 내가 이 고을에 수령으로 와서 처음으로 선생의 유지를 찾았다. 고을 사람이 그곳을 알려주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선생의 음덕이 이곳 사람들 마음속 깊이 스며있음을 알았으며, 이미 여기저기 돌아보며 사모함과 존경스러움과 슬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현인과 군자들이 지나거나 머물러 사시던 곳이라면 그러한 사실들을 분명하게 보여주어 영원히 잊지 않게 하는 법인데, 불초 자손이 여기에 와서 어찌 선생의 유적들을 돌보지 않아 그 자취가 길이 전하지 않도록 하겠는가? 그러므로 임피에 유배되셨던 장소나 예산 고향 땅에 모두 선생의 서원(書院)이 있으니, 이곳에도 반드시 비에 새겨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16살 때 한성시에 장원급제하셨고, 약관 20살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급제하니, 시험관이 선생이 쓰신 작품의 시에 쓰기를 “퇴지 한유의 작법이고, 왕희지의 서체(書體)”라고 놀라워 했다.

 

26살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니 괴원(槐院, 승정원)을 거쳐 홍문관 정자와 저작박사가 되시고, 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셨으며,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간원 사간, 또 다시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직제학을 지내셨다. 사가호당(賜暇湖堂)하셨으며, 이어 부승지로 승직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겼다. 일찍이 달 밝은 밤 옥당에서 숙직을 하며 독서를 하는데, 중종 임금께서 달빛을 따라 친히 술을 가지고 오셔서 책 읽는 청아한 소리에 이끌려 시가(詩歌)를 읊게 하신 다음 담비 가죽옷을 내려 융숭하게 대우하신 일은 실로 고금에 드문 일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정암 조광조, 충암 김정 선생과 함께 도의로서 사귀어 서로 마음을 모아 도와 나가며 요순시절과 같은 새 세상을 실현코자 하셨으나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기묘사화가 일어나 이 땅 남해에 귀양을 오시니, 일의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겁내는데 정작 선생은 화복을 개의치 않고 대나무 숲에 작은 집을 지어 시가와 술을 즐기며 한가롭게 지내셨다. 유배오신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계사년(중종 28년, 1533)에 풀려나고, 이듬해인 갑오년에 관직에 다시 오르셨다. 유배하던 중에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쳤는데, 마침내 송추(松楸)에 돌아오셔서 추복(追服)을 입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통곡을 하니 눈물이 초목을 적셔 다 말라 죽었다.

 

선생은 홍치 무신년(성종 19년, 1488)에 나시고, 가정 갑오년(중종 29년, 1534)에 세상을 떠나시니, 그때 나이 47살이셨다. 만력 신묘년(선조 24년, 159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니, 종계변무(宗系辨誣)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오호라!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선생의 행장에 쓰여 있고, 또한 나라의 역사에 등재되어 있어 가히 속일 것이 없어 불초 후손이 짧은 소견으로 보탤 것은 없다. 이제 기묘사화가 지나간 지 188년 만에 이곳에 비를 세우니, 이 어찌 우러러 사모함이 나 혼자만의 사사로운 정이겠는가? 장차 멀고 외딴 시골의 사람들도 추모하고 분발하여 선생의 유적이 여기 있는 것을 잊지 않게 하노라.

 

숭정기원후 79년(숙종 32년, 1706) 병술년 3월 6대손 통정대부 행남해현령 만상이 짓고, 후학 통훈대부 전행사헌부장령 김만주가 삼가 썼다. 높이가 267센티미터로, 세월이 많이 흘러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여전히 남해의 관문이라 할 노량 충렬사 앞 언덕에서 지난날 유배의 시간들을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이어 찾아볼 곳은 섬 안의 선이라 할 노도 안에 있는 김만중 선생과 연관된 유적지다. 김만중은 남해의 유배인들을 대표할 만큼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작가다. 1689년 유배와 1692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평론집 <서포만필>을 남해에서 완성하거나 창작했다.

 

김만중이 유배와 살던 장소가 어딘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람에 따라 읍성 주변이라 보는 이도 있고, 용문사 아래였다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남해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앵강만 입구에 있는 노도를 김만중의 적소(謫所)라 믿고 있다. 이곳에는 김만중이 세상을 떠난 뒤 임시로 시신을 모셔두었다고 전해지는 허묘(虛墓)가 산 중턱에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적소를 복원한 초가집이 있었다.

 

유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의 탄생지로서 노도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자 남해군에서는 오래 전부터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고 군비를 보태 노도에 ‘노도 문학의 섬’ 조성을 추진했고, 올해 6월 완공을 보게 되었다. 노도 섬 전체가 김만중의 문학을 구현하는 꿈의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섬에는 서포문학관을 비롯해 구운몽 공원, 사씨남정기 공원, 그리움의 언덕, 서포 초옥, 서포전시관, 민속체험관, 작가창작실 등이 갖춰져 언제 찾아와도 서포 김만중의 문학을 발로 디디고 가슴으로 호흡하면서 느낄 수 있다. 노도 문학의 섬은 남해군의 새로운 인문학 관광 명소로 자리할 것이다.

 

이어서 찾아볼 곳은 소재(疎齋) 이이명(李頤命, 1658-1722)과 관련 있는 금석문이다. 이이명은 남해에 두 차례 유배를 왔다. 1692년(숙종 18)과 1721년(경종 1년)인데, 30년 터울을 두고 같은 장소에 두 번 유배를 오는 일은 드문 경우다. 이이명은 김만중의 사위이기도 한데, 처음 유배를 와서 그는 <매부(梅賦)>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첫 번째 유배 온 해 이이명은 지감재(止坎齋)라 이름한 집을 짓고, 이곳에서 남해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나중에 다시 유배를 왔을 때 예전의 지감재를 고쳐 짓고 습감재(習坎齋)라 불렀다. 이이명이 사약을 받아 죽고 난 뒤 남해의 뜻있는 선비들이 합심해 그를 제사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이름이 봉천사(鳳川祠)였다. 망운산에서 발원해 남해읍 왼편을 흘러 강진만으로 빠지는 봉천 인근에 지었다. 지금의 죽산(竹山) 마을 언덕에 있었을 듯한데, 완공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 <봉천사묘정비(鳳川祠廟庭碑)>다.

 

이 글은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지었다. 봉천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비석만 남해터미널 길 건너편에 남았는데, 지금은 유배문학관 야외공원으로 옮겨져 옛날을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묘정비 전문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남해현은 바다 섬 안에 있다.

현의 동쪽에 죽산리가 있고,

그 아래 봉천이 있다.

이 시내 위쪽에 사당이 있으니 이름이 봉천사다.

세상을 떠난 좌의정,

충문공으로 호는 소재인 이 선생의 영정을 받들어 모신 곳이다.

섬사람들은 무슨 연유로 이이명 공을 제사지내는 것일까?

공은 백강 이경여 선생의 손자다.

태어나기 전부터 조상이 남긴 가르침을 익혀 도의와 문장이 당대부터 추앙받던 뛰어난 군자였다.

 

23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29살에는 중시에 합격했으며, 30살에는 품계가 통정에 올랐고, 39살에는 녹봉이 가선에 이르렀으며, 44살에는 정경에 올라 49살에는 상부에 들어갔다. 경종 신축년(1721)에 영의정 충헌공 김창집, 충익공 조태채, 종부제(從父弟, 아버지의 사촌동생) 이건명과 함께 군왕 앞에 나가 영종(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가 얼마 뒤에 남해로 위리안치되었다. 다음 해 체포되어 한강 나루터까지 와서 후명(後命, 귀양살이 하는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명령)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3년 뒤 복관되면서 시호가 내려졌는데, 한양 노량에 사당이 세워지고 사충사(四忠祠)로 헌액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들 네 분을 ‘건저사대신’이라 부르는데, 공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도를 지키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군주를 섬길 때는 지혜를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을 신조로 여겼다. 군자는 사람을 믿으면서 원만하게 대하지만, 소인은 사람을 꺼리면서 질투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비록 훌륭한 군주의 신임을 받았어도 삼사(三事, 벼슬아치가 지켜야 될 세 가지 중요한 일, 청렴, 근신, 근면)를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유년(1717) 이후로 하루도 마음에 근심이 끊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기사사화 때에는 영해로 유배를 갔는데, 5년 뒤 남해로 유배지가 옮겨지니 마침내 작은 서재를 지어 장사 가의의 <복조부(鵩鳥賦)>에 실린 글을 따서 편액을 지감(止坎)이라 했다. 건저 문제로 화를 입고 다시 남해로 유배를 왔을 때 지난날 세웠던 서재를 고치고 이름도 ‘습감(習坎)’으로 바꾸었다. 얼마 뒤 공은 재화를 당하고 말았다.

 

공은 전후 4-5년 동안 이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충신효제의 도리로 섬사람들을 가르쳤다. 섬의 선비들이 공이 살아있을 때에는 스승의 예로 섬겼고, 돌아가신 뒤에는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다. 이후 백 년 동안에 그의 은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없어지지 않았고, 그를 애모하는 마음도 시간이 멀어질수록 더욱 간절해졌다. 이것이 제사를 지내게 된 까닭이다.

 

정조 경신년(1800)에 섬의 인사들이 진양(진주)의 유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사당을 창건하니, 습감재에서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또 행장을 꾸리고 여비를 마련해 한양 도성으로 가 노량진 사당에 있는 영정을 모사하여 돌아와 사당에 모셨다. 그러면서 나(김조순)에게 비문을 부탁해 받으니, 섬의 인사들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무리일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강직하게 했지만, 이익에 눈이 먼 사람은 그 본성을 억눌러 소인배가 된다. 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군자의 마음으로 하늘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신임사화의 위태로운 형국을 당하여 군왕에게 병이 있어 후사를 세우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종사의 위태로움이 끊어질 듯 두려웠는데, 저 흉악하고 패역한 무리들인들 어찌 처음부터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세력을 타고 악행을 드러내어 마침내 충성스럽고 선량한 분들을 무참히 죽였다. 인륜도덕을 저버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한때의 이익에 눈이 먼 까닭이었다. 오호라! 공과 세 분의 대신은 몸은 죽었어도 두려워할 줄 몰랐고, 집안이 뒤집어져도 보살필 줄 몰랐으니, 오직 나라를 지키고 세자를 돌보는 일만 생각했지 다른 것은 알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직을 안정시키는 일로 기쁨을 삼았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옛날 사직을 안정시켰던 사람은 왕왕 몸은 편안하고 집안도 넉넉해서 재앙이 뒤따르지 않았으니, 반드시 온갖 형벌을 당하고 가문 전체가 적몰할 근심이 있고난 다음에야 그 충성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온갖 형벌을 당하고 가문 전체가 적몰되는 것이 어찌 공이 기뻐할 일이었겠는가? 하고자 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몸과 가족이 망할 수는 있어도 마음이 하늘에 부끄러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난 날 흉악한 무리들의 계략대로 되었더라면 세자의 지위는 반드시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고, 세자의 지위가 보존되지 못했더라면 많은 사람들의 원통함도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다. 공 또한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의리의 분별이 마음에서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왕이 제위에 오르자 흉악한 무리들이 물러가서 많은 사람들의 원통함이 해소되며, 나라의 바탕이 크게 안정된 것이 어찌 공과 세 분의 능히 기필(期必, 반드시 그렇게 하고자 기약함)할 수 있는 바였으리오. 진실로 국가를 떠받드는 신령스런 복이 하늘과 함께 다함이 없어서였으니 착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이에게 재앙을 내리는 하늘은 참으로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맹자께서 “내 반드시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고 말한 것은 의로움을 두고 한 말이었고, 공자께서 “내 몸을 죽여 어짊을 이루었다.” 고 말한 것은 어짊을 두고 한 말이었다. 군자가 의로움을 취하여 어짊을 이루었으니,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옛날 구래공이 소인배들에 의해 견제를 당해 뇌주(雷州)에서 죽임을 당했는데, 뇌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제사지낸다. 이 섬사람들이 공을 제사지내는 것도 역시 마땅하다. 또 공이 겪은 일도 구래공의 경우와 닮았으니, 처음 네 대신이 유배를 당했을 때 경종이 질병이 있어 이 일을 살피지 못했었다. 하루는 경종이 경연에 나가 문득 좌우를 살피더니 묻기를 “항상 백발이 성성한 대신이 경연에 올랐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했는데, 대개 공이 여러 신하들 가운데서도 머리카락이 유독 하얀 탓이었다. 흉도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이 일은 송나라 진종이 “내 눈에 오랫동안 구준이 보이지 않는구나.” 라고 한 말과 완연히 일치되고 있다.

 

저 흉도들이 군주의 질병을 피하여 사람을 죽였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천세가 지난 뒤에도 그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한 어리석음을 다 알 것이다. 오호라! 승정 기원후 4무자(1828) 5월 세운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노량 인근 언덕에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서원은 자암 김구가 남해에서 유림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연마한 일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역시 지금은 없어졌다.

 

이 밖에도 유배인들이 남해의 곳곳을 탐방하면서 시를 지을 때 찾았던 명승고적은 세월이 흘렀어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금산의 보리암은 너무나 유명하고, 망운산 기슭에 있는 화방사나 호구산의 용문사 등을 찾아 쓴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사찰뿐만 아니라 읍성 뒤편 망운산을 오르는 길목을 따라 흐르는 시내에 형성된 오동뱅이도 오래전부터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런 곳을 찾아가면 그 옛날 남해에 유배 와서 쓸쓸하게 살아가던 유배인들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문학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