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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배문학의 산실, 경남 남해군

내용
유배문학의 산실 경남 남해군에 대한 소개
출처
한국문학관협회
출생지
-
시대
-

상세내용

유배문학의 산실, 경남 남해군

남해군은 경상남도 서남쪽 끝에 있는 군(郡)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인 남해도와 열한 번째로 큰 섬인 창선도 등 13개의 부속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구역은 1개 읍과 9개 면으로 구성되고, 인구는 2019년 12월 현재 43,622명으로 확인된다. 남해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지만, 1973년 남해 노량과 하동 노량을 잇는 남해대교가 준공되어 육지와의 교통이 연결되었다. 2003년에는 창선면과 삼천포를 잇는 대교가 완공되고, 2019년에는 제2남해대교라 불리는 노량대교가 남해대교 옆에 건설되어 단절의 불편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남해는 섬이지만 산과 들도 고루 발달되어 있다. 가장 높은 해발 786미터의 망운산을 비롯해 626미터의 호구산, 701미터의 금산 등이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이어져 있다. 망운산에는 천년 고찰 화방사와 망운사가 들어서 있고, 호구산에는 용문사, 금산에는 기도 사찰로 유명한 보리암이 자리하여 섬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또 강진만과 앵강만, 동대만 등이 육지와 바다가 서로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을 갖춰 산록의 절경과 해양의 광활함을 함께 즐길 수 있기도 하다. 남해는 자연 그 자체도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역사 유적도 대단히 많은 고장이다. 창선면 가인마을에는 약 1억 1천 년 전 백악기 전기에 퇴적한 해안에 공룡화석 발자국 화석이 있다. 1997년 발견되어 천연기념물 제499호로 지정되었다. 섬 곳곳에는 고인돌 들이 산재해 있는데, 특히 이동면 다정리 고인돌이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노량해전의 전적지이기도 한 남해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고, 이락사를 비롯한 순국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호국(護國)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기도 하다. 남해를 대표하는 유산 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남해는 오래전부터 유배지(流配地)로 알려져 왔다. 죄를 지은 사람을 평생 또는 일정 기간 연고지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 고립시켜 살게 하는 유배는 교통이 불편했던 시기 육체적, 정신적으로 죄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었다. 자신이 원해 유배를 온 사람은 없겠지만, 오랜 기간 유배인 들이 남해로 쫓겨 와 살면서 자연스럽게 독특한 삶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유배를 떠올리면 으레 문인사대부들을 연상하게 되지만, 사실 유배는 군왕(君王)부터 왕족, 궁인(宮人), 서민과 천민들에 이르기까지 남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해진 형벌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이역에 와 죽을 때까지 살았고, 후손을 낳아 대를 잇는 삶의 터전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하여 유배지는 자연스럽게 언어와 문학, 지식과 풍속, 주거와 식생활, 의복과 생활도구 등과 같은 전통이 교류하는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배는 형벌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교류사의 측면에서도 한 구실을 담당한 특성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해에 유배를 와 살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족히 수천 명에 이를 것이고, 그 가운데 이름과 행적을 남긴 사람만도 백여 명을 훌쩍 넘긴다. 남해에 유배의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 고려시대에는 백이정(白頤正, 1247-1323)을 손꼽을 수 있다. 그는 남해에 유배를 와 살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오랜 탓인지 남해에는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두 군데 있다. 우선 남면 평산리 망기산(望崎山) 우지막골에 백이정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이 있다. 또 이동면 난음리 난화산(蘭花山)에도 그의 무덤이라는 곳이 있다. 남해에는 백이정을 제향하는 난곡사(蘭谷祠)가 난음리에 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아진다. 남해는 제주도와 거제도를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배인들이 살던 곳이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 초기에는 경기체가 <화전별곡(花田別曲)>으로 유명한 자암 김구(金絿, 1488-1534)가 유배를 왔다.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꿈꾸다 기묘사화로 좌절하고 남해로 유배를 왔던 그는 1519년부터 1531년까지 13년 동안 남해에서 살았다. 이 기간 동안 김구는 남해의 지식층들과 교유하면서 유학을 가르쳤다. 또 남해에서의 삶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화전별곡>을 남겼다. 이 작품은 남해가 문학으로 형상화된 최초의 예일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고 두 번째 한글 소설로 알려진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창작한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남해의 유배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1689년 남해로 유배를 와 이곳에서 죽었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어머니 윤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도 유명하다. 남해에서 완성된 "구운몽"은 홀로 서울에 계실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세종 때 창제되었지만, 지식층들의 외면을 받아 서자 취급을 받던 한글로 문학 활동을 한 그의 식견은, 우리말을 남의 문자로 적는 일은 앵무새가 사람 말 흉내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임을 강조했다. 남해에서 후반부를 마무리한 그의 문학평론집 "서포만필(西浦漫筆)"도 잊을 수 없는 유배 문학의 백미편이라 하겠다.

 

영조 때에는 두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남해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먼저 겸재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 있다. 그는 1744년(영조 20)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겠다던 영조를 만류하다 남해로 유배를 와 2년 뒤에 해배(解配)되어 돌아갔다. 17개월 정도 남해에서 산 그는 남해의 자연과 역사유적, 사찰, 명소 등을 다니면서 300편이 넘는 한시를 썼다. 남해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쓴 한시도 많지만, 당시 남해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작품도 많이 남겼다. 이런 작품들은 18세기 남해의 풍속과 문화, 설화 등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이때 쓴 작품들은 그의 문집에 실려 "남천록(南遷錄)"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어 후송 유의양(柳義養, 1718-?)이 있다. 그는 1771년(영조 47) 2월 유배를 왔다가 다섯 달 만인 7월에 해배되어 돌아갔다. 기간으로 보면 짧지만, 그는 이때의 유배 체험을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이란 이름으로 남겼다. "남해문견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쓰인 유배 기록이란 점에서 의의가 남다르다. 작가의 생생한 육성이 살아 있는 한글 기록은, 한문으로 정제된 여느 기록과는 달리 그야말로 활어처럼 살아 있는 체험들이 녹아 있어 그 가치가 빛난다. 이 책에서 유의양은 남해의 색다른 풍속과 효행(孝行), 유배인들의 실제 생활 모습, 유물과 유적 등을 우리글로 풀어냈다. 특히 당시 남해의 사투리를 구어(口語)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 국어사에서도 소중한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유의양은 1773년에도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석 달 동안 살았는데, 이때도 "북관노정기(北關路程記)"라는 한글 유배 기록을 남겼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남해에 유배를 와 애달픈 삶을 살면서 문학으로 남해에서의 생활과 견문을 기록했다.

 

남해는 이처럼 유배 문학의 산실로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조선 팔도가 한양 도성을 제외하면 모두 유배지였다고 해도 좋을 만큼 유배는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유배 또는 문배 문학과 관련된 실상을 보여주고 관련 자료를 모으면서 그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남해군은 이런 우리 문화사의 보고 중 하나인 유배 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시, 소개하기 위해 2011년 ‘남해유배문학관’을 개관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남해 유배객이었던 김만중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김만중문학상’을 제정해 올해로 11번째 작품을 공모하고 있다. 다양한 유배와 관련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남해유배문학관은 유리나라 유일의 유배 관련 문학관으로 앞으로도 국민들에게 유배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기여할 것이다. <출처. 한국문학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