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유배인물과 유배문학
상세내용
▶ 유배인물과 유배문학
남해 유배인물
"죄인에게 장 일백 대를 쳐서 삼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라!"
집권자들은 훗날 화근을 없애기 위해 정말 죽이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부득이 유배를 보내게 되는데 삼천리 밖으로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중앙을 중심으로 삼천리가 되는 곳은 없고 겨우 천리 정도이므로 삼천리는 최고의 변방을 일컫는 말로써 최남단이나 최북단이란 뜻이 담겨 있다.
귀양이라는 것은 본래 귀향해서 죄를 뉘우치고 조용히 반성하라는 것이었는데 죄인을 고향이 아닌 먼 변장이나 외딴 섬 같은 데로 보내어 제한된 지역에서 살게 한 것을 귀양이라 했다.
유배는 정쟁이나 당쟁으로 인한 피해자들로서 왕손으로부터 삼정승은 물론 노비에 이르기까지 역모행위를 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연루된 자, 그리고 가족과 친척까지 혈연의 피를 끊으려는 최고 형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야심에 불탄 왕족들과 권신들은 왕권 다툼과 집권에 대한 욕망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투쟁하였고 상대편의 약점을 찾아 중죄인으로 만들었으며, 사형 또는 유배형에 처하게 하였던 것이다.
피로 얼룩진 당쟁과 퇴보적인 망상 등으로 결국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였으며, 국나과 당파로 얼룩진 추잡한 형태가 정치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 위대하고 훌륭한 현사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우리 전통시대 역사인물로 손꼽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샌이 순탄하지 못하였고 유배 정도는 한번쯤 다녀온 기록들이 있다.
유배객들의 당시 역할과 판단력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에 국가의 번영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유배되어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여유로움을 가지고 정치를 비유하는 작품들을 저술하면서 인간의 삶을 뒤돌아 보았다.
남해로 유배 온 유배객들은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주요 사건들과 관련된 주요 인물이나 주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등에 기록되어 있지만, 연루된 자나 친인척들의 인물은 상세하게 기록되어지지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해현으록 기록하지 않고 막연하게 남해 또는 남예 등으로 기록된 것이 남해현 또는 남해군을 지칭하는 것인지 확인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유배지라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법질서와 인륜을 저버린 죄인들의 수용소가 아니라 국가의 안위와 발전 그리고 정의를 위해 노력하다 당쟁과 정쟁에서 패배한자들의 별거지라는 점을 상기할 때 후손들은 오히려 부끄러움보다 자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유배객들은 정치를 멀리하면서 남해의 자연에 심취하여 많은 글귀들을 남겼으며 향사들과 교유하면서 선비들의 올바른 정신을 깨우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사대부의 모습과 품위를 향인들에게 가르쳐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남해유배객들은 남해 향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작품과 현재까지 영항을 받아 전해지는 풍습은, 첫째로 남해의 방언에 궁중용어가 섞여있다는 것이고, 둘째로 왕족이나 사대부들의 풍습이 전해진다는 것 등은 유배객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유배객들이 남해에서 저술한 작품 속에 남해를 신선도(神仙圖)라 표현하였고 남해의 유적지, 민간신앙, 효행. 풍습, 삶의 자취 등을 세밀하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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