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조선시대
조선시대 첫 남해 유배객_박의손(朴義孫)
상세내용
박의손(朴義孫) : 조선 전기에, 주부, 감찰 등을 역임한 문신
세종은 태종으로부터 왕권은 받았으나 병권은 넘겨받지 못했다. 박의손(朴義孫)은 태종의 병권 장악에 따른 피해자 병조판서 박습의 아들로 박습은 반역죄로 처형되었지만, 박의손(朴義孫)은 죄인의 아들로서 남해로 유배되던 중 좌찬역(佐贊驛)에서 도망치다가 다시 잡혀 유배지 남해로 오게 되었다. 이후 세종 4년(1422) 4월 19일에 사형 되었다.
왕조 : 조선 시대 : 전기 왕 : 세종 본관 : 함양(咸陽) 생몰연대 : 미상~1422년
1411년(태종 11)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 주부(主簿) ·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아버지 박습이 병조판서로서 아직 병권(兵權)을 쥐고 있었던 상왕(上王) 태종에게 군무(軍務)를 전혀 보고하지 않아 모반대역에 속하는 불경죄로 참형을 당할 때에 친자로 연좌되어 함께 참형을 당할 목숨이었으나 용서하여 곤남현(昆南縣) 관노(官奴)로 몰입(沒入)되었는데, 천역(賤役)을 싫어한 나머지 원망과 분노를 품고 지낸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1422년(세종4년)에 마침내 참형을 받았다.
박의손(朴義孫, 생몰연도 미상~1422)
조선시대 첫 유배객은 박의손이다. 강상인의 옥사 당시 병조판서였던 박습(朴習)은 고려 공민왕 16년 (1367) 합양군 안의에서 태어나 고려 우왕 9년(1383)에 등과하였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그해 의렁현감에 부임한 후 정종 때 좌간의. 태종 때 우간의, 강원도관찰사 인녕부운 등을 거쳐 태종 11년(1411)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백성들이 물이 부족해 농사를 짓는 데 애를 먹는 모습을 보고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300년 만에 다시 수축하여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 후 박습은 의금부 제조, 호조참판,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8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심온을 제거하려는 태종에 의해 9월 6일 사천에 유배된 후 11월 26일 참수 당하였다.
박습은 문종 원년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등이 주청하여 아들 박의손과 함께 신원되고 직첩도 환급 받았다. 아들로는 의건, 의곤, 의보, 의경, 의손 다섯을 두었다.
박의손은 합양 박씨 부사공(副使公) 지수(之秀)의 7대손으로 당시 사헌부 감찰이라는 벼슬 자리에 있었다. 태종 11년(1411)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事) 2등으로 입격하여 주부 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1418년에 아버지가 병조판서로서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병무를 처리했다는 죄로 참수형을 당할 때 남해로 귀양가다가 좌천역에서 도망하였지만 유배지로 다시 돌아왔다가 세종 4년(1422) 적신의 아들로서 반성하지 않는다 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박의손의 유배와 도망 그리고 처형 과정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 여러 가지 자료에는 강상인의 옥사 때에 아버지 박습과 처형되었다고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참형에 처해질 때 곤남현 관노의 신분으로 기록되어 있어 남해에 오지않고 곤남으로 바로 갔다거나 이배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남해군의 역사를 뒤짚어 보면 분명히 남해로 유배왔음을 알 수 있다.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나기 1년전 행양현이었던 남해는 금양부곡의 진주 합병으로 남해현으로 복현되었다가 옥사 후인 1419년 곤명과의 합병으로 곤남군으로 개칭되어 1437년 남해현으로 될 때까지 18년간 곤남군이였기 때문에 박의손이 처형될 때는 곤남군이다. <출처. 남해군지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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