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유배 이야기

고려시대

최세보_고려시대 무신

내용
왕조 : 고려 시대 : 고려 왕 : 의종 본관 : 미상 생몰연대 : 미상~1193년
출처
남해문화원_남해유배인물 100인전
출생지
-
시대
고려

상세내용

최세보(崔世輔) : 고려후기 동수국사, 판이부사, 수태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고려시대 무신이었으며 2번에 걸쳐 남해로 유배 왔다. 첫 번째 유배는 의종 21년(1167) 당시 금군대정으로 유시(流矢)의 변(變)에 협의를 받고 남해로 유배되어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후 1170년 정중부 등의 난을 계기로 복직하였고, 1184년 문하시랑평장사, 병부판사, 상장군에 올랐다. 1186년 무관으로는 최초로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되었고 1189년에 판이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수태사(守?師)가 되었다. 그러나 명종 21년(1191) 아들 비가 여승을 간통한 죄에 얽혀 남해로 두 번째 유배를 오게 되었다.

왕조 : 고려 시대 : 고려 왕 : 의종 본관 : 미상 생몰연대 : 미상~1193년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글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의종 때 금군(禁軍)의 대정(隊正)이 되었는데, 1167년(의종 21) 왕이 연등(燃燈)을 위해 봉은사(奉恩寺)에 행차하였다가 밤에 환궁할 때 승선(承宣) 김돈중(金敦中)이 탄 말이 날뛰는 바람에 기사(騎士)의 화살이 왕의 가마 옆에 떨어진 일이 발생했다. 최세보가 왕의 곁에 있었다 하여 혐의를 받고 남해로 귀양갔다가 1170년에 정중부(鄭仲夫) 등의 쿠데타로 무신들이 득세하자 복직되었다.

벼슬이 올라 1181년(명종 11)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고, 1184년에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상장군(門下侍郎平章事判兵部事上將軍)이 되었다.

1186년에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되었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중방(重房)에 참소하기를, “지금 수국사 문극겸(文克謙)이 의종이 살해된 사실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무관에게 이 직을 겸하게 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문극겸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왕에게 알렸으나 무신들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우려한 것과 같이 최세보가 동수국사(同修國史)에 임명되자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역사를 꾸밈으로써 『의종실록』에 빠진 것이 있고 허위사실이 많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유관(儒官)으로 상장군이 된 것은 문극겸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무관으로서 동수국사가 된 것은 최세보로부터 시작되었다. 1188년에는 평장사(平章事)로서 왕을 대신하여 하체(夏禘)를 주관하였다. 1189년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어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이듬해 특진 수태사(特進 守大師)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집필자 : 민병하(전 성균관대학교, 한국사)

 

최세보(崔世輔)는 가계(家系)가 본래 한미하여 글을 몰랐다. 의종(毅宗) 때 금군(禁軍)으로 대정(隊正)에 충원되었다. 정해년(1167) 〈왕의 수레 옆으로〉 떨어진 화살로 인한 변고 때 최세보가 왕의 곁에 있었다 하여 의심을 받아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뒤에 무인(武人)이 정권을 잡게 되자 소환되어 옛 직책을 회복하였다. 명종(明宗) 초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명종〉 14년(1184)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상장군(門下侍郞平章事 判兵部事 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어떤 사람이 중방(重房)에 참소하기를, “수국사(修國史) 문극겸(文克謙)이 의종이 시해된 사건에 대해 ‘왕을 시해(弑害)한 것은 천하의 큰 죄악이다.’라고 사실대로 썼으니, 무관(武官)에게 이 직을 겸하게 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문극겸이 이를 듣고 두려워하여 은밀히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무신들의 뜻을 어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이 옛 제도가 아니어서 싫어하였지만 결국 최세보를 동수국사(同修國事)로 임명하였다. 최세보는 함부로 〈동수국사(同修國事)의〉 사(事)자를 사(史)로 고쳤다. 이로 말미암아 『의종실록(毅宗實錄)』에는 빠지거나 생략된 사실이 많아 부실하게 되었다. 문극겸이 일찍이 쇄사당(曬史堂)에서 최세보를 놀리며 말하기를, “유관(儒官)으로 상장군이 된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무관으로서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된 것은 공(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함께 껄껄 웃었다. 당시 최련(崔連)와 김부(金富) 역시 장군(將軍)으로서 함께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으니, 무인으로 유관을 겸임한 것은 이 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종〉 19년(1189) 최세보가 문극겸을 대신하여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는데, 성품이 탐욕스러워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마음대로 벼슬을 올리고 내리고 하여 거만(鉅萬)의 재산을 모았다. 곧 특진수태사(特進守大師)를 더 받았다가 〈명종〉 23년(1193)에 죽었다.

아들 최비(崔斐)는 용모와 태도[容儀]가 아름다웠는데, 동궁지유(東宮指諭)가 되었을 때 태자가 총애하는 여종이 궁의 담 안에서 귤을 던져 유혹하자 최비가 결국 그 여자와 사통(私通)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왕이 법으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이의민(李義旼)이 구해주어 죄를 면하였다. 태자가 여종을 쫓아내자 여종은 비구니가 되었는데 최비가 여전히 사통하였으므로 최충헌(崔忠獻)이 그 죄를 조사하여 남쪽 끝으로 유배 보내었다. 처음에 최세보가 집을 지을 때 한 마을[坊]에 두루 퍼지게 하고 사방에 각각 저택을 지어 자손들을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오래되지 않아 집안이 다 멸망하였다.


상세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