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남해군
3·1독립운동 기념비
상세내용
▶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고 얼을 받들기 위하여 남해군 남해읍 남산공원 입구에 입석되어 있는 3·1독립기념비는 1968년 3월 1일에 3·1동지회에서 건립하였다.
남해군의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인 설천면 문항리 솔곳에 1985년 세워졌던 남해 3·1독립운동발상기념비는 협소한 주변공간을 넓히고 2007년 12월 남해군에서 중건하였다.
두 개의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남해 3·1독립 운동 기념 비문(남해읍 남산입구)
민족의 굴욕은 주검보다도 오히려 참기 어렵고 자유는 생명보다도 차라리 고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무서운 역경 속에서도 자유를 구하는 민족의 정열과 의기는 활화산 같이 타 올랐던 것이니 그 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저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려 했던 3·1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파도처럼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남해에서는 2일에 설천면 남양에서 비롯했고 4일에는 읍내를 중심으로 전군 일제히 일어났었다. 여기는 비록 떨어진 섬일지언정 오랜 역사의 전통을 지녔고 특히 충무공이 순국의 피를 흘린 성지라 그날 외치던 민족의 부르짖음은 망운산과 금산에 메아리 쳤고 남해의 물결조차 뒤끓게 했던 것이다. 그랬으나 일제의 운동 선배들은 혹은 옥사도하고 혹은 복역도 하는 등 비통한 역사를 빚어냈었다. 세월은 다시 흘러 마침내 이 땅에 광복된 조국을 새로 세운 오늘 우리 어찌 그들의 공로를 잊어버리랴. 여기 온 군민의 정성을 모아 돌탑을 쌓고 그 날의 사적을 새기는 뜻은 오직 그들의 정신을 받자함이니 이 고을 사람들로써 이 앞을 지나는 이는 누구나 옷깃 여미고 피 흘린 독립유공자들을 추모함과 아울러 다시금 두 주먹 부르쥐고 민족자주의 힘으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갈 것을 다짐해야 한다.
1968년 3월 1일
이은상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글씨를 쓰다
기념비 좌측 : 남해 독립 유공자 명단
이예모, 정흥조, 정몽호, 정임춘, 윤희도, 정용교, 하상근, 유주순, 정재모, 정순조, 강한문,
하준호, 정갑린, 원복상, 유봉승, 박경수, 정익주, 이찬덕, 김희조, 정학순, 유판숙, 양재문.
기념비 우측 : 기념비 건립자
명예회장 - 최치환
회 장 - 김성오
집행위원 - 한규식, 장진관, 박희수, 홍남식, 김덕범, 이종갑, 김정현, 정재홍, 김재현, 3·1동지회원 일동
● 남해 3·1독립운동발상기념비문(설천면 문항리 솔곳)
우리가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고 그 포악무도한 입정에 시달리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거족적인 항일 투쟁으로 발전되었다. 그때 총성은 천지를 울렸고 강산은 피로 물들어 갔건만 설천 사람들은 이를 겁내지 않고 이 고을에서 맨 먼저 애국의 횃불을 들었다. 그 해 4월 2일 이예모의 선도로 정갑린, 정상기, 한준천의 권면으로 하준호, 정순조, 정흥조, 정임춘, 유찬숙, 윤주순, 정학순, 정익주, 정재모, 정몽호, 이찬덕, 윤희도, 양재문, 류봉순, 문한조, 정두기, 정남섭등 많은 설천면민이 남양, 금음, 문항,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는 남해읍 장터로 가서 김희조, 박경수, 강한문, 정용교, 하산근, 원복상, 정학순 등과 합세하여 태극기를 들고 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른 뒤 군청, 경찰서, 주재소외 각 기관을 점거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이로 인해 일제 통치는 빛을 잃었고, 고을에서는 연달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통분하게도 이 중 23명은 일경에게 붙잡혀가서 1년 내지 3년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고 마침내 정학순은 순국까지 하였다. 장하다. 그 충절 조국으로 되찾고자 죽음으로 항거한 그 공로를 우리 어찌 잊으랴. 그로부터 67년간 나라의 사업으로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 강토를 길이 지키자 함이니 다시는 남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굳게 뭉쳐 힘을 기르자.
1985년 월 일
문신수가 글을 짓고 이성숙이 글씨를 쓰다
남해군수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