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남해군
정익주(鄭翼周)
상세내용
▶ 정익주(鄭翼周. 1896..03.17 ~ 1975.03.28)
1919년 4월 3 · 4일에 걸쳐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설천면 문의리에 사는 이예모가 4월 2일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가지고 귀향하여, 정순조·정학순·정몽호·윤주순등과 만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그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인근 동리에 이 계획을 알리었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4월 3일 오후 3시경,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남양리 노상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리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도 안 시위군중은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들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서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광복 소식에 남해 만세운동 회상하며 한시로 감회 읊어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보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세 번째 기록자료로 1919년 남해 독립만세운동 주동자 정익주(鄭翼周) 선생이 1945년 광복을 맞이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글을 게재한다.
이 글에서 정익주 선생은 남해 만세운동 당시 함께했던 동지들을 호면하고 옥중에서 겪은 고초를 서슬하는 한편 해방의 감회를 노래한 자작 한시 두 편을 담았다. 정익주 선생의 한시는 이동면 금평마을에 귀촌한 조재수 씨가 번역했다.
갑진년(1904년) 1월 16일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계축년(1913년) 2월 15일에 우(又) 한문서당을 종료하고 갑인년(1914년) 4월 1일에 남해군 삼동면 사립동명학교에 입학하여 제사학년을 졸업하고 그후 20년은 농업에 종사함.
기미년(1919년) 에 갱(更)히 한문 선생을 청빙하여 한문을 수학하던 중 2월 하순에 환희하기를 조선독립만세운동의 밀보를 접하고 남해군 일원을 중심으로 하여 시위운동을 거행코저 하던 제에 4월[원문은 3월이나 착오로 보여 수정함] 3일에 동지 윤희도(尹希道), 양재문(梁在文), 양인을 득하여 차의를 표하고 면내 각 서당을 통하야 동의자가 유하거든 명시일 성내 김능수(金能秀) 주사(酒舍)에서 상봉 타합하자고 사송(使送)하였더니
죽시일(卽市日)인 4일 우 김능수 주사에서 동지 윤희도, 양재문 외 윤주순(尹柱舜), 이찬덕(李燦德), 문환조(文桓祚), 정학순(鄭學淳), 정순조(鄭順祚), 정몽호(鄭夢虎), 정임춘(鄭任春), 정흥교(鄭興敎), 류봉승(柳奉承), 하상근(河祥根), 정재모(鄭載模), 제군을 상봉하여 타합 약속하고 거사코저 함에 감수(監守)하나
순사 5명 외 경비 방어함을 불구하고 오후 2시경에 시장 중간에 분산하여 암비하였던 태극기를 고거(高擧)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한 결과 수백명 군중이 일시에 부화 수행하여 만세를 화창하는 동시에 본인이 지휘 솔선하여 당시 남해군수, 학교 일(왜)인 교장, 금융조합 일(왜)인 이사, 일(왜) 순사부장 등에게 조선독립만세를 강제 화창케 하고
우 부화 수행자 장학순(張學淳), 박경수(朴敬洙), 정용교(鄭鎔交), 하준호(河準互), 김희조(金熙祚), 강환문(姜桓文) 등이 군청 급 학교에서 장자(障子 :문) 급(及) 초자(硝子 : 유리)오십여 매를 파괴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행하고 오후 6시경에 해산하였더니
그후 일 헌병 급 순사 십여 인이 설천면 각 서당을 수사한 결과 본인 외 십수인이 검속되어 본군 주재소에서 칠일간 엄중 악형 고문을 당하고 사천군 삼천포경찰서에 인도되어 십회일간 이구막론(以口莫論)할 악형 고초를 재당(再當)한 후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검사국으로 호송되어 미결소에서 구십여일을 경과한 후에 2개년 징역에 판결을 언도한 바 부득이 진주형무소에서 처형(處刑)하던 중 불행히 설상가상으로 학질을 득하여 이십사일간을 일일 고통하던 중 일일은 청약(請藥)하다가 무도한 일인 감수 놈의 발길로 협부를 축(蹴)한 바 되어 악십분간 기사회생함을 동지에게 문지(聞知)하였으며
그후 경신(1920년) 6월 26일에 감형 석방되어 금일까지 농업에 종사하여 시일은 갈상(曷喪)고 상송(常誦)하던 중 거(去) 8월[원문은 7월] 15일 몽외(夢外)에 아(我) 조선해방의 정보를 문(聞)하고 즉시 수십인의 구회석(區會席)에 조선독립만세를 독창 연호하고 여광여취(如狂如醉)하여 그후 이간시(二看詩)를 음(吟)하니 왈(曰)
1.
欣然撲手解愁眠(은연박수해수면) : 흔연히 박수를 치며 시름의 잠에서 벗어나
哀怨方知徹上天(애원방지철상천) : 슬픈 애원은 바야흐로 하늘에 통했음을 알겠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