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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박태을(朴泰乙)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설천면 금음
시대
-

상세내용

▶ 박태을(朴泰乙)

박태을 선생은 경남 남해군 설천면 금음(길음)리 458번지에서 밀양 박씨인 박득신과 박향란의 슬하에서 1914년 10월 21일 태어났다.

보통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가르치는 선생이 교장선생님의 추천을 바다 진주고동보통학교에 진학했다.

진주고 재학 중에 보니 일본 선생이 일본인이 더 우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말하고 가야 일대는 임나일본부로 일본 땅이었다는 설을 주장하고 가르치자 분노가 치솟아 항의하자 근신처분이 내려졌다.

1928년 7월 진주 고보생 1,2,3,4학년이 학교 수업을 거부하고 동맹후학에 들어갔다. 이는 방학 전에 임시시간표를 교무실 현황판에 게시 할 때 학생들에게 일본인 영어교사가 '바가야로', '조선징' 등을 말하는 것을 듣고 발생한 의거였다.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에 대하여 일제의 악랄한 간교를 알고 떨쳐 일어난 것인데, 첫째 조선어 시간을 늘려 달라, 둘째 국사시간을 늘려 달라, 셋째 도선관을 확장해 달라, 넷째 관련 교사를 퇴진시켜 달라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교측은 주동 3학년 학생들을 전원 무기정학에 처하는 등 강경책으로 맞섰고, 학부형들이 중간 역할을 했으나 2개월간 무기정학을 유지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고 약속하고 등교를 종용했고, 학생들도 등교함으로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30년 1월 17일 진주고보생 전원이 진주시내로 진출하면서 일신고보생을 합류시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노예적 교육폐지' 와 '경찰진입금지', '광주학생석방'이었는데, 일제 경찰은 학생 2백여 명을 검거해 유치장에 감금했다. 진주고보는 246명이 무기정학을 무기정학 시키고 29명을 구속했고 일신여고보는 정금자, 이을례 등 4명이 구속되었다.

이 투쟁으로 조방제, 권태익, 정갑생, 정한영, 김병호, 이진하 등을 검찰에 송치하고 징역 6월형부터 징역 4개월 집행유예 5년이 언도되었다.

이 항일투쟁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나주학생 의거에 대하여 동조한 성격이 짙은데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왜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면서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사건을 불공정하게 처리하자 전국에서 민족차별에 대하여 항의하며 진주고보에서도 떨쳐 일어나게 된다.

3학년과 4학년이 중심이 되어 조방제, 김재용, 이안호, 김두봉, 황성표, 최진두, 정인수 등이 비밀회합을 개최하고, 광주학생 1명이 찾아와 의논하고 비봉산 뒤 가마못 부근에서 힘을 합해 투쟁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1주일 뒤 광주학생들이 진주로 찾아와 궐기를 다짐하고 서울에서 내려 온 권유근(경신학생 사천 출신), 원재희(중동학교생)등과 협의했다.

진주고보생 권태익과 소용수, 조동규, 박상태, 박태을, 정화표, 정성수 등이 동참하게 된다. 남해 출신 박태을, 정화표, 정성수 등이 동참했다.

일경이 눈치를 채고 집집마다 조사하고 엄중해지자 집합장소를 진주 봉곡동 306번지 정인수 집으로 변경해 모임을 가졌다.

정인수의 동생 정원수 보통학교 학생을 설득하고 1930년 1월 16일 밤 11시경에 20여 명이 모였다. 사천 출신 황숙주가 파수를 보고 정상진의 사랑방과 박재표의 사랑방을 전전하면서 비밀 회합을 가졌다.

1월 17일 오전 9시 학교 교정에서 교장이 등단해 훈시하고 내려가자 3학생 조방제가 등단하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된 격문을 살포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진출했다.

이때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하고 학교재단 이사인 강대창이 진두지휘하고 일신여고보 정문에서 울타리를 넘어간 김용하가 담장을 넘어 여학생들의 동참을 외치자 그 당시 교장 백남훈(광복 후 신민당 대표위원)은 "알아서 하게."라고 말하고 돌아 서게 되었다.

사범학교 학생들은 일부가 동참하고 교실 내에서 만세를 외치고 4학년 조동규가 열렬한 연설을 하고 투석전을 전개하고 농업학교로 진출했다.

제2보통학교(봉래초등학교)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동참했고, 진주고 정문에서 권태익이 연설을 했는데,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폭압으로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청년 하진, 신간회 상무 유덕천, 심산 선생의 아들 김찬기, 강위황 등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이후 백지동맹 사건으로 퇴학당한 학생이 11명이었고, 정학 당한 학생은 부지기수이었다. 퇴학당한 학생은 취업이 불가해지고 출세가 막혀 버렸으니 조국을 위하여 투쟁하다 개인은 큰 희생을 치른 셈이다. 이어 비밀 결사 사건으로 제적된 학생은 장호관, 이종근, 성훈영, 박상태 등이다.

학생들이 모여 회합한 결과 백지동맹을 결행키로 하고 전교생이 시위를 전개하자 주모자라 하여 정학처분이 결정되었다. 운동을 잘하고 활발해 정구 선수로 뽑혔으나 일본학생을 우선 선정한다는 원칙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 당시 항일운동의 돌파구로 사회주의에 심취해 애국 동지들을 포섭하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1938~1939년 남해 창선보통학교 훈도(교사)로 근무했으나 일제를 비판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면직처분을 받았다.

1967년 5월 10일 김해김씨 김명준의 딸이며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 243번지의 김진수의 매의 김복연과 혼인해 슬하에 박모주(전희순), 박지은(정재휘), 박선혜(김용찬)을 두었다.

선생은 부산 토성동 12번지에서 별세했다. 자녀들은 창원시와 부산에 거주한다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