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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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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유덕천(柳德天)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남해읍 평리
시대
-

상세내용

▶ 유덕천(柳德天)

유덕천 선생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평리에서 1904년 7월 26일 태어났다. 소년 때 아버지를 따라 진주로 이주하여 진주시 신안동에 거주했다.

1918년 진주제일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숭실학교 중퇴한 뒤 사립 협성학교를 졸업했다.

진주 3·1운동을 목도하고 시위에 동참하고 감화 감동을 받고 1920년 7월 5일 진주학생대회를 개최하고 일제 경찰의 제지와 구금으로 엄중한 조사를 받았다.

임시정부를 위해 혈성단을 조직할 때 박덕실(2018년 대통령 표창), 강상은, 홍수원(건국훈장 추서)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군자금을 제공한 분이다. 유기영 삼촌이 진주 변호사로 활동하기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덕을 보았을 것으로 본다.

호주 선교사의 배려로 기독교 계통의 광림학교 교사로 2년 동안 근무하고 진주청년회를 조직할 때 동참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 2월 시민 학생들을 모아 강연할 때 “인간의 역사는 투쟁사”라는 제목으로 피정복자와 정복자의 역사적 설명을 계속하다 임석한 경찰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바로 체포되어 엄중한 조사를 받았으나 선교사의 선도 조건부 보증으로 석방되었다. (동아일보 1926.2.26.)

1927년 10월 신간회 진주지회가 창립될 때 동참하고 1929년 8월 교양부 간사가 되고 상무 간사가 되었을 때 학생들의 시위가 전개되자 배후 조종자로 하진(하혁용)등과 함께 지목되어 체포, 40일간 유치장에 감금되기도 했다.

1930년 3월 신간회 진주지회에서 장두관(예비역 대령, 건국훈장 추서)을 위원장으로하고 유덕천 선생은 점사위원이 되었다.

조선일보사 진주지사가 되었을 때 1930년 4월 진주고보생 조방제 등이 학생시위를 전개되었고 또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어 재차 점속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진주 평거면 신안리에서 농장을 경영했고, 1941년 8월 일제를 위한 묵념식이 개최되자 화장실에서 2시간 숨어 있다가 나와 일본 놈 대변은 엄청 독하다면서 다시는 공중화장실에 안가고 싶고 말했다고 전해 온다.

진주소채생산조합 상임이사와 진주농회 부회장이 되었으나 이름만 등재되었고 적극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1946년 4월 진주 신안리에서 농회장이 되었고 1946년 12월 과도입법의원 경남도 제 4구 대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민족청년단 진주지부장이 되고, 진주후생협회 이사와 경남도 미군정의 고문관이 되었다.

일제 때 창립되었던 진주기독교청년회(YMCA)를 1947년 3월 재 창립할 때 회원으로 동참했고 1947년 8월 18일부터 1948년 4월 13일까지 9개월 동안 진양군수를 역임했다. 진주시 신안동에 거주할 때 1948년 5월 10일 총선에 출마했으나 이장우(진주 3·1운동 지도자)에게 차점으로 낙선했다.

1949년 12월 진주사범학교 신축기성회 부회장이 되었고,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당하게 당선되어 4년 동안 국정을 위해 크게 활약했다.

진주원예조합장이 되었고 1963년 정부 지원을 받아 재건국민운동본부 개발부장이 되어 활약하고 1965년 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73년 10월 10일 별세해 선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