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남해군
윤희도(尹熙道)
상세내용
▶ 윤희도(尹熙道)
윤희도 선생은 경남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636번지에서 파평윤씨 윤동준과 정복점 슬하에서 1900년 6월 6일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산경남3·1운동사』 901면에는 설천면 문의리 사람으로, 수려하고 매사에 기민했으며 사리에 밝고 애국심이 남달리 열렬했다고 했다.
경술합방을 당하여 반만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히고 일제의 잔인한 식민지 정책이 시행되자 그의 분노는 충전하여서 조국 광복의 염원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조국 광복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 민족의 결사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은 그는 그 방안에 대하여 혼자 천사만려도 했고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무수한 모의도 계속했다.
세월이 흘러 경술년에서 10년이 지나 기미년이 되었다. 고종황제의 붕어로 인산을 앞둔 3월 1일 33인의 이름으로 만방에 호소하는 독립선언이 있었고, 그를 외치는 독립만세의 외침도 있었으며, 우리의 의지를 표명하는 시위 행렬도 있었다.
이때 이예모와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이 주도하는 4월 2일 설천면 남양리 의거에 동지 유찬숙과 박내규, 하준호, 원복상, 김희조, 정용교, 강한문, 정익주, 유승운, 하상근, 이찬덕, 정갑린, 양태환, 정흥조, 정재모, 양재문 등과 같이 참여했다.
4월 2일 오후 3시경 남양리 노상에 1천여 명의 애국 군중이 모였는데 정순조는 큰 태극기를 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도 있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난 뒤 군중은 장대에 단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했다.
행진이 고현에 도착했을 때 그곳 면장 김치관이 경찰에 밀고를 했다.를 알게 된 이들은 일몰도 되고 하여 남해읍 장날의 의거를 위하여 일단 해산했다.
4월 4일 남해읍 장날에 전날의 독립만세 시위에서 자신을 얻은 군중들은 보다 많은 수가 원근에서 모여 들었다. 오후3시경 1천여 군중이 모여 손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입으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만세의 함성은 망운산을 올리고 사면 바다로 메아리쳤다.
시위 군중들은 군청, 학교, 우편국, 경찰주재소 등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고 만세를 같이 부르게 했으며, 순사들의 모자와 칼을 빼앗아 내동이 쳤다.
일제 앞잡이 김치관은 사천경찰서에 경비 전화를 걸어 경찰과 일본군의 응원을 청했다. 해가 질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다가 해산할 무렵 김치관의 소행을 알고 시위 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어 김치관의 행방을 찾아 고현면 이어리로 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는 남해경찰서 주재소 마루 밑에 숨어 있었으므로 만나지 못했고, 그의 집을 파괴한 채 해산했다.
4월 6일 드디어 현지 경찰의 요청에 따라 사천 경찰과 일본 헌병 수십 명이 동원되어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선생도 고를 치렀다.
시위를 주도한 다음 잠시 피신했다가 뒤에 체포되어 별도로 재판을 받은 것으로 보는데, 대구복심법원 재판기록에도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까지 가지 않고 진주에서만 재판을 받았을 경우, 진주동자로 몰려 진주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1년형이 언도되어 진주감옥에서 옥주지역의 재판기록은 소실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설천면에 기록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직계 후손들과 설천면사무소로 찾아 갔지만 1990년대에 자료도 남기지 않고 소각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공무원이 문서를 국가기록원에 넘기든지 소각 또는 없애는 작업을 할 때 근거를 남기지만 설천면은 아무 근거를 남기지 않고 소각했다는 것이다.
선생은 정종아님과 결혼해 장녀 윤기옥, 차녀 윤기금, 3년 윤정효, 4녀 윤정순이 있고, 장남 윤기정, 차남 윤기주, 3남 윤기호 등이 있다. 윤기정의 자녀들은 윤석 윤영선 윤한선 등이 있다.
선생은 1960년 4월 9일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 629번지에서 별세했다. 윤기정 씨는 『부산경남3·1독립운동사』 편찬 당시 하동군 자료 수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하동군 진교면에서 식당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