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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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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이찬덕(李燦德)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설천면 남양리
시대
-

상세내용

▶ 이찬덕(李燦德)

이찬덕 선생은 경남 남해군 설천면 남양리에서 1900년 8월 11일 태어났다. 정의감도 강하고 매사에 기민했고 두뇌가 매우 총명했다. 한일병탄으로 나라 없는 백성이 되자 그의 애국충정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반만년 역사의 국치! 그의 의분심에 참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아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동지들을 만나 조국 광복의 방책을 모색해 보았으나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혹심하여 비통과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었다.

고종황제의 붕어로 인산을 앞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3인 민족대표가 세계만방에 독립국임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우리의 정신을 외치는 독립만세를 고창했고 우리의 지세와 굳센 태도를 표명하는 시위행렬이 있었다.

이때 정순조와 이예모,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이 지도하는 4월 3일 설천면 남양리의 의거에 유찬숙, 박내규, 정임춘, 윤희도, 원복상, 김희조, 정용교, 강한문, 하준호, 양재문, 정익주, 하상근, 정갑린, 양태환, 정흥조, 정재모 등과 같이 그는 의거했다.

4월 2일 오후 3시경 남양리 노상에서 1천여 명의 애국 군중이 운집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청년도 있었고, 대형 태극기를 흔드는 청년도 있었다고 전해온다.

독립선언이 선포되고 바로 장대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남해읍으로 진격했다. 군중이 고현면에 도달했을 때 면장 김치관이 일제 경찰에 밀고했다. 이 밀고 소식을 들었지만, 해가 진다는 이유로 군중을 해산시키고 다음 날을 의거일로 결정했다.

4월 4일 남해읍 장날 전날의 독립만세 시위에서 자신을 얻은 군중들이 인원들이 원근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일제 경찰은 전날의 시위를 고려하여 중도를 징계했으나, 군중의 기세에 중과부적을 느끼고 제지하지 못했다. 오후 3시경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 군중들은 군청과 학교, 우체국, 경찰 주재소 등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시위행렬에 동참토록 했다. 순사들이 가까이 오자 모자와 칼을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친일파 김치관 면장은 경비전화로 경찰과 일본군 헌병대를 불러 오게 만들었다. 일몰까지 시위가 계속되었고 시위 군중들은 분기가 충천하여 이어리 집으로 찾아갔는데, 그는 남해경찰서 마루 밑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그의 집을 파괴하고 해산했다.

4월 6일 드디어 현지 경찰이 모은 자료를 근거로 사천 경찰과 헌병대가 수색하기 시작하더니 23명이 모두 피검되었다.

선생은 징역 1년형이 언도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만, 재판기록에는 들지 않아 언제 석방되었는지 알 수 없다. 혹독한 고문의 여독과 옥고의 영향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 1972년 10월 17일 한 많은 여생을 마쳤다. 향리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