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역사
남해군
정익환(丁益煥)
상세내용
▶ 정익환(丁益煥)
정익환 선생은 경남 남해군 창선면 가인리 606번지에서 나주정씨 덕성군의 40세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돈이와 어머니 장흥랑 슬하에서 1835년 5월 11일 태어났다.
천성이 강직하고 남달리 담력이 컸으며, 통송력과 장악력이 뛰어나 활쏘기 말 타기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민첩하여 무과에 급제하시고 사천시 선진리성에 파견되어 파견대장에 올랐기 때문에 대장이란 칭호를 듣게 되었다. 동학 의거에 동참하여 접주로 참여해 일제 타도와 외세를 물리쳐야 조선의 독립이 된다고 믿고 생사를 걸고 투쟁했다.
일제가 창선 일대에 군마를 방목하려고 목장과 초지를 조성하기 위해 창선면민들의 사유지를 관유지로 강제 수용하게 되자 반발이 일어났다.
조세 저항운동 또는 조세 징수에 대해 부당함을 성토했고, 정당한 판결을 위해 창선농민들의 대표가 되어 투쟁하다가 투옥되었다. 경남도 관찰사가 있는 진주 감옥에 갇히게 되자 창선 주민들이 교대로 3년간 석방운동을 전개하고 연좌집회로 대항했다. 선생의 선구적인 투쟁과 희생으로 강제 수용된 토지가 환원되었고, 조세가 감면되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남해군 창선면 상죽리 면사무소 남쪽 주택가 도로변에 사적비가 1940년 4월 건립되었고, 설천면 공원 안에는 철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남해읍 남산공원에도 공적비가 세워져 선생의 훌륭한 공적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첫 번째 투쟁은 외세 타도를 외치면서 선경 세상 5만 년을 위하여 동학 의거에 가담한 일이었다. 『한국독립운동자료』 15쪽 467면에 의하면 선생이 1909년 9월 16일 의병 가담 및 의병은닉 협의로 일본 헌병대 조장에 의해 전투 중 체포되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투쟁이었다. 하동 헌병분견대 조장 등에 의해 창선에 숨어 있다가 2명이 사살되고 2명이 중상을 입었고, 선생이 생포된 것과 납세거부 운동이 세 번째 투쟁이었다.
문화원연합회 경남도지회에서 발행한 『경남인물지』 655~664면에 기재된 공적을 요약해 본다.
정대장은 백 년 전 사람이지만 아직도 창선도민들은 우상처럼 섬기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과중한 세금에 시달려 도탄에 빠져있던 섬 사람들을 위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평생을 의를 위해 희생시킨 희생정신과 거룩하신 공의 전기로 남겨 후세에 귀삼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전기는 창선도의 역사에 국한된 전기만이 아니고 망설되어 가는 우리들의 인산성을 비춰주는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부인은 진주강씨 강한여고, 장남은 정극조며, 자부는 밀양손씨 손흥업이고, 장손은 정봉준이며, 손부는 진주강씨 강유순이다. 차남은 정일봉이고, 손부는 경주정씨 정이여다.
충남 대천시에 후손 정해주가 살고 있고, 창선 가인리에는 정해옥 씨가 선생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적과 희생을 기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창선면 상죽리에는 정규채 선생이 사적비를 세우기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선생은 독립협회 자매단체인 협성회 재정관리위원이었다는 말도 전해온다.
선생이 지은 ‘심심가’ 노래가 2018년 부경대학교 고순희 교수가 발굴했는데, 그의 논문 <도세 저항운동과 가사문학>에 노래 전문이 실렸다. 전남 담양군 소재 한국가사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느데, 4음보 1구 495구로 구성되었다.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심심가나 불러 보세
이 말 저 말 각설하고 시화연용 국태민안
어느 시절 다시 볼꼬 가련하고 가련하다
창선 목장 되었었던 거제 남해 적량 창선
4경 사는 백성들이 그 무슨 죄가 있어
일반 국토 일반 국마 창선 땅에 매였던고
불쌍하고 불쌍하다 우리 4경 백성들이
죽자하니 개화세상 살자하니 왕화부도
남쪽의 삼도 중에 고상이 되는구나
이 글을 짓자 하니 일도 많고 말도 많아
이 일을 하자 해도 말로만 하자 하고
나서는 사람 없어 아니한다 하려 해도
사는 자는 관속이요, 죽는 자는 백성이라
무지하다 저 위원 다민곤이 웬 말이냐
마라 마라 제발 마라 준민 고택 제발마라
준민고택 모르거든 위원이라 생각마오
조그만 현 위원이 근 삼십 명 관속이라
일이란 육방관속 내보내는 일이로다.
성덕할 자 탁자아문 봉세훈령 매 곁에
전대 동을 삼십 낭씩 받은 후에 백성보고
엿닷 냥을 상납하고 열닷 냥을 관원 관리
입으로 들어가고 민간 침침 없었는데
무상할사 궁내부는 어이하여 조세 봉상
한정 없이 위원 내어 다민곤하단 말가
마오 마오 그리마오 위원같이 그리 마오
우리 오경 사는 백성사사집이 집 이런가
오경에 사는 백성 노소 첨원이 이 글을 보고
상사사세 살펴보고 그리할까
아니할까 생각하며 돌어보고
해자 파담하여 가며
이 설음과 이 고생을 깊이 깊이 생각하여
사세가 그리할 듯 생각이 간다면은
오계백성 일인 듯이 탂상에 들러 앉아
단상공의 하여가며 우리 설음 풀어보소
아무리 자세하게 알리려고 애를 쓰도 독장난명 되었기로
창선의 남자들은 이일 저일 밝혀내어 거제 통영 남해 적량
사경 사는 백성들이 동무좌수 어인지공 나서길 바라지만
우리도중 사람없어 이번 일이 성사시킬 방법이 전혀 없네
이 글을 대강설파 면면장에 올리오니 그리 알라 처분하고
처분을 하시오니 이내 없고 얕은 소견 다름이 아니오라
관사아사 각항고사 사사집이 되어 있고
행여나 회옥될까 삼사 년을 기다려도 회목은 없어지고
풍마우세 기지회파 오거들랑 그만두고 그렇지 않거들랑
오경백성 상통문자 일처에 모여 앉아 공론을 하신 후에
이 관사 저 아사를 낱낱이 방매하고 계사 갑오 양년 밑에
상납의무 조위원과 김호방의 입을 통해 누설하니 어찌하여
누설이 났단 말가 차소위 청위신조 그 아니면 천작 일을
유가위 이지만은 자작지일 불가함을 일러주고 이르나니
조위원의 욕심보소 갑오년 7월 달에 목관을 폐지하고
시월에 가층목관 되어 와서 미태관이 관행이라 자충하고
삼백여 석 진임자와 목화근수 상동가이 묶었으면
족자족이 될 터인데 민간 초조 저판되어 근본없는 80설을
찾으려고 들렀기로 우리 백성 연유장정
제음내에 했으되 계사상납 청정후의 분간하자....
사적비는 1940년 4월 주민들에 의해 남해군 창선면 상죽리에 건립됐다. 박성민 기자와 이선규 기자, 유용식 기자, 유재주 기자, 정웅교 기자 등이 협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