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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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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정재권(鄭在權)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남해읍 남변동
시대
-

상세내용

▶ 정재권(鄭在權)

정재권 선생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변동 334번지 출신이다. 생년월일은 1914년 7월 7일생이다.

남해보통(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자 가르치는 선생님이 중등학교로 진학해야 한다면서 교장 추천서를 받아 주었다. 그 당시 조모가 계셨고 부모형제 자매가 있었고 논이 4,500평, 밭이 1,200평을 소유한  부유한 가정이었다.

진주고동보통학교로 진학해 열심히 공부했다. 국어와 영어, 수학 등을 좋아해 우수했고 운동에도 취미가 있어 정구를 잘했다고 전해 온다. 그러나 주위에서 동료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선생들도 노골적으로 식민지 교육에 몰두하고 조선어 사용은 집에 가서 쓰고 학교에서는 사용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일본 역사가 조선역사보다 오래 되었다고 가르치고, 진주와 경남 일대는 임나일본부에 속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진주시 옥봉 고분군을 파서 보여주며 굽다리 모양의 도기 등이 임나일본부를 증거한다는 황당한 말을 듣고 있으니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황민화 교육에 진절머리를 내고는 교육 거부 의식을 항상 지니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투쟁을 시작한 것이 백지 답안 제출이었으니 백지동맹 의거했다.

선생은 1930년 1월 17일부터 2월 4일까지 정학 처분이 되고, 1931년 12월 23일에는 백지동맹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되어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남해 고향에 거주하는 동안 1932년 2월 19일 다시 퇴학 처분되었다. 백지동맹으로 퇴학 당한 학생은 박진팔, 정재권, 이봉호, 김복진, 박진영, 장지원, 박응대, 정화표, 윤태곤 등이다.

이들 학생들은 장래가 밝지 못하고 취업과 진학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일생을 버렸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광주학생 사건과 함께 반드시 명예회복이 되고 정부포상이 성사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