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남해의 항일독립운동가

남해군

한인식(韓麟植)

내용
미 포상 항일투사
출처
남해문화원
출생지
남해읍 북변리
시대
-

상세내용

한익신 선생은 경남 남해군 남해읍 북변리 혹은 도마리 1129번지에서 1910년 출생했다. 하동군 읍내리 출신 항일투사 김계정(1914.1.3.출생, 2019년 대통령 표창 추서)의 남편이다.

 

『고등경찰관계적록』109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남해군 남해에 한이식, 박태권, 박진환, 최봉기, 정용환, 김장은, 정효계 같은 군 설천면 유한주 등과 공모하여 한인식을 중심으로 박태권 집에서 수차례 회합을 가지고 현사회제도는 부족하고 미흡함을 지적하고 상호 의견을 교환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목적수행을 위하여 남해공산주의자 전위동맹을 조직하기로 협의하고

 

  1.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1. 농민들의 일상생활의 이익옹호 외 6개 항을 결정하여 책임부서를 정하고 확대 강화를 도모하여 제5회 국제 반전 데이에 맞추어 노동자 농민 근로자 형제제군에게 라는 제목의 격문(불온문서)50여 장을 인쇄 배포하는 등 실천 활동을 전개하다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으니 1932년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의 문수한가택 갑 14호 945호 강용수 집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일제 경찰에 포착되기도 했다.

 

서울로 귀국한 선생은 1930년 2월 5일 서울 종로서에서 잡혔는데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를 받았다.

 

이 때 체포된 조선인 수십 명 가운데 경남 출신은 통영군 산양면 송남리 고승곤, 합천군 덕곡면 장봉리 827번지 노옹호 등 2명이었다.

 

선생은 수시로 체포되어 구속 재판을 받게 되는데 정상적인 생활보다 체포되어 조사 받고 구금되는 날이 많을 정도로 활발하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서대문 감옥에서 1933년부터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 곧 부산에서 사회주의 활동으로 또 체포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4년 4월 24일 부산지법에서 2년 6월형이 구형되었고 1934년 5월 1일 부산지법에서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흥적색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경남적색교원노조 활동으로 체포되는 등 한 선생 뒤에는 일본 순사가 밤낮으로 따라 다니고 조사하고 상부에 보고하고 수 십 차례 체포, 구금을 거듭했다. 1936년 11월 2일 부산형무소에서 출옥하자 고문후유증으로 요양하면서 투쟁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1942년 10월 1일자와 1942년 10월 8일자 『신한민보』에 '광복군에 대한 정당성'이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부인 김계정 여사는 하동지역 사회주의 활동가 김계영, 김태영, 김두영 3형제의 여동생으로 김두영은 거제 출신 사회주의자 윤택근의 사위가 되어 일제 때 항일투쟁으로 2년~5년간 옥고를 치렀으나 김태영 등과 함께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을 위하여 일했다는 이유로 포상이 성사되지 않았고 오직 김계정 여사만 2018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