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문화와 역사

Home
문화와 역사
남해의 서적

2020년대

남해문협 제15집

내용
시, 소설, 기행문, 평론, 수필
출처
한국문인협회 남해군지부
작가
-

상세내용

◈ 남해문협 제15집 ◈

▶ 노인의 뒷모습

 앞에 걸어가는 노인의 걸음걸이가 위태로워 보였다. 굽은 등에 큼직한 배낭도 버거워 보이는데 휘어진 다리마저 양손에 든 짐에 휘둘려 휘청거렸다. 마치 동물의 세계에 나오는 도마뱀이 도망가는 모습처럼 볼품이 없었다. 얼마나 고생을 안고 살았으면 저토록 몸이 망가질 수 있단 말인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다.

오가는 행인들은 단지 흘러가는 풍경일 뿐이다. 자신과 무관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잠시 머물던 시선도 이내 거둬들인다. 삶이 팍팍해서일까, 그래서 인정마저 메말라 버린 것일까. 마침 저녁 운동하러 가는 방향이기에 조금이나마 거들고자 노인의 손에 든 짐을 냉큼 집어 들었다. 나의 갑작스런 호의에 반색을 하는가 싶더니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왕이면 이것도 들어달라며 다른 손에 든 짐을 불쑥 내민다. 순간 어이가 없었다. 가급적이면 무거운 것은 피하려고 몸을 사리는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떠미니 친절이 반감된다. 하지만 오죽 힘에 부쳤으면 처음 본 내게 그럴까 싶어 이해가 되었다. 노인은 시달리던 몸이 가뿐해지자 기분이 좋은지 큰소리 내어 웃었다.

비닐 봉지엔 석 단이나 됨직한 열무와 참외가 가득하다. 손수레라도 갖고 와서 장을 보시지 왜 이렇게 무모한 일을 하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한두 가지만 사려고 했는데 막상 떨이라 싸기도 하거니와, 누워 있는 영감 간식까지 챙기다보니 많은 걸 장만하게 되었다며 배낭에 든 토마토를 자랑삼아 들썩거렸다. 순전히 잔신의 안위보다는 가족 위주의 발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초라해진 몰골에 무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칠순이 넘은 듯한 얼굴에 검버섯이 만개했지만 호방한 웃음소리에는 질곡의 삶을 거뜬하게 버텨 온 자신감이 있었다.

묵직한 짐을 받아 들자 진땀이 났다. 양손에 든 무게로 나역시 걸음걸이가 반듯하지 않았지만 아무려면 노인의 힘듦에 비할까,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억장같이 쌓인 일도 척척해내는 청춘인 게다. 그래서인지 나의 동태는 안중에도 없고 묻지도 않은 가족사를 들려주기에 바쁘다.

한 십 분쯤 걸었을까,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만 건너면 될까 싶었는데, 100m 전방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킨다. 그곳은 오르막길이다. 노인은 황망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도와줘서 고마웠다며 이제는 갈 길 가라고 손을 내젓는다. 하지만 평지에서도 숨을 헉헉거리는데 이토록 무거운 짐을 들고 저 길을 어떻게 가나 싶다. 차라리 처음부터 외면했더라면 이런 불편한 마음은 없으련만, 내 오지랖 덕분에 땀깨나 흘리게 되었다. 다시 동행하게 된 기쁨 탓 인지 노인의 목소리는 더욱 고조되었다.

자녀들을 출가시킨 후에도 지속적인 뒷바라지며, 찬거리 장만에 택배까지 보내는 일은 자식을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다. 이제 그들에게 봉양 받아야 할 처지라고 두둔했더니 도리어 그런 수고가 삶의 활력소가 된단다. 쉴 틈 없는 얘기중에 잠시 격랑의 세월을 떠올리는가 싶었지만 노년의 쓸쓸함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보랏빛 수국이 구름꽃너머 탐스럽게 피어 있는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다. 늘 보는 꽃이지만 볼 때마다 어여쁘고, 자식처럼 사랑스럽다며 꽃숭어리를 연신 쓰다듭니다. 그때 보았다. 수시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떨치기 위해 무조건 웃는다는 것을, 그것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잠시 목을 축이고 가라며 잡은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애써 사양하고 나섰지만 노인의 애틋한 정은 호수를 걷는 내내 출렁거렸다. 일면식도 없는 노인과 삼십여 분의 동행에 긴 여운이 남았다.

내가 본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뒷모습은 삶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서툰 판단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보든 관여치 않고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아온 모습에 알량한 인정으로 거들먹거린 오만이 부끄럽다. 내가 거들지 않았어도 노인은 온몸을 억누르고 있는 무게에 저항하면서 꿋꿋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힘차게 오르막을 걸어 당연한 것처럼 아파트에 당도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고난과 끈기의 내공이 쌓여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득 요즘 미술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조영남의 그림 사건이 떠오른다. 자신의 것처럼 의기양양하다가 타인의 그린 대작으로 들통이 난 후의 수치심을 어떻게 하나, 본인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림에 애착을 갖고 거액 주고 사들인 사람들의 낭패감은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나. 명망을 떨치지 않은 작품 일지라도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면 언젠가 그 가치는 인정받게 되어 있다. 미술계에서는 이론이 분분하여 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조영남의 삶은 소박하게 혼신을 다해 살아온 노인의 뒷모습보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저녁마다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려는 것이 아니었다. 호수 번 바람이며 풀꽃이며 그것이 풍겨 주는 아름다운 향기로 정신의 충만함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만난 노인의 뒷모습에 어쭙잖은 잣대를 들이댄 것은 외형을 중시하는 속빈 강정이 아닌가.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은 어떨지. 갑자기 등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