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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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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서적

2020년대

남해문협 제12집

내용
시, 수필, 평론, 소설
출처
한국문인협회 남해군지부
작가
-

상세내용

◈ 남해문협 제12집 ◈

▶ 묵은지

아파트 옥상엔 숨겨두기 좋은 곳이 있다. 벽과 벽 사이에 항아리 두어 개 놓아두기에 알맞은 곳이다. 하루 종일 볕 구경하기 어렵지만 바람은 잘 통하는 바람의 길이다. 김장을 저장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세월과 바람이 숙성시킨 묵은지를 꺼내 한 가닥 쭈욱 찢어 맛을 본다. 세월과 정성이 숙성시킨 맛이며 우주가 담긴 맛이다. 땅 속에 묻어 두고 먹던 친정엄마의 김치 맛은 아니지만 발효 과학이니 김장독이니 하는 냉장고 묵은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맛이다.

여자가 시잡와서 김장 서른 번쯤하고 나면 할머니가 된다고 하는데 나는 마흔 번 넘게 김장을 하였다. 그것도 모자라 사계절 시간표대로, 가족의 입맛까지 챙겨 가며 김치를 담갔으니 김치만 담그다가 한 세월 다 지나간 것 같다.

인생을 김치 맛에 비교해 본다.

청춘은 봄이라는 유행가가 있지만 청춘이란 겉절이 맛일게다. 풋내는 나지만 풋풋하고 상큼함이 있어 초간장만으로 버무려도 맛이 난다. 오래 저장성 없는 김치이듯이 나의 청춘도 직장 생활하랴 아이 셋 키우랴 늘 달음박질로 살다 보니 내게도 청춘 시절이 있었나 싶다.

사오십대는 잘 발효된 깍두기 맛이다. 깍두기는 김치라 하지 않고 왜 깍두기라 부를까? 그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왕이 백성을 잘 돌보지도 않고 산해진미를 두고도 입맛 없다고 투정부리던 중 어떤 대감 부인이 고민끝에 무를 썰어 소금에 절여서 왕에게 진상했다. 왕이 입맛이 돈다며 이것이 뭐냐고 물어 그냥 무를 각독각독 썰어 절인 거라 하니 그럼 이것을 각독기라 명하노라 하여 지금의 깍두기가 되었다고 한다. 깍두기만의 독특한 모양과 홍시 감처럼 고운 빛깔, 국물 하나 버릴 게 없는 맛있는 김치다.

아이들 뒷바라지도 어느 정도 끝나가고 사는 재미가 쏠쏠하던 인생의 맛있던 시절이 오십대가 아니던가.

묵은지를 꺼내며 생각에 절여 본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져 아삭함 없는 내 모습이 묵은지다. 베틀에 북 지나가듯 세월은 빠르게 지나 이젠 인생의 8부 능선쯤 와 있는 나는 틀림없는 묵은지다.

하지만 내 안에 CF 광고처럼 긍정을 불어놓는다. 세월을 삭혔다 하여 맛있는 묵은지가 아니다. 적당한 간 절임과 욕심을 털어낸 양념으로 버무려 삭혀야만 묵은지의 깊은 맛이 배어난다.

참고 견뎌내며 절제된 삶이야말로 묵은지 같은 인생의 참맛이 아닐까.

올해는 실패 없이 김치 맛이 아주 좋다. 한 쪽씩 맛보라며 이웃에게 나눈다. 시집간 두 딸을 위해 그릇을 준비한다. 묵은지가 베푸는 삶까지 나를 가르친다.

남은 여생 몇 번이나 김장을 하고 이 맛을 느끼며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가올 겨울 김장을 위해 항아리를 비운다.

겉절이보다 상큼하고 깍두기보다 싱그러운 나의 멋진 여생을 꿈꾸며 티 없이 욕 안 듣고 살기를 희망하면서 항아리의 안팎을 닦는다.